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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속에 나타난 사탄의 정체 1

nokobo 2009. 11. 27. 18:20

문화속에 나타난 사탄의 정체

 

이광호 목사

 

 

인간생활의 향상과 더불어 형성된 문화는 전체뿐 아니라 각 개인의 사고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일반적으로 [문화]라 하면 인간사회에 있어서 긍정적인 면을 투영하는 것 같이 생각되나 사실 그렇지만은 않다.

특히 현대사회에 있어서의 문화의 조류는 위험하기 그지없다. 특별한 방향이 설정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자기개성의 중시는 더욱 그 정도를 심각하게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백성으로서 문화에 대한 올바른 속성과 개념을 파악하지 않으면 안된다. [문화]라는 도구를 통해 목적을 펼치려고 시도하는 사탄의 전략을 볼 수 있어야만 우리는 거룩한 영적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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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 기독교문화의 흐름 역시 인본주의적 경향을 띠어가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ⅰ) 기독교 문화에 있어서 상당한 역할을 하는 분야는 역시 교회음악이 아닌가 생각된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교회음악에 매우 신경을 쓰는 것을 보지만 우려되는 바가 적지 않다.

어떤 사람들 가운데는 하나님께서 예술화(기능화)된 음악을 좋아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래서 그들은 문화의 한 틀을 형성하는 음악적 예술에만 지대한 관심을 가진다.

그들은 교회음악을 만드는 성도들의 신앙고백이나 말씀에 조화되는 삶보다, 겉으로 드러나는 형식에 더욱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그 결과 큰 교회들 중에는 밖으로 부터의 성가대원 스카웃까지 생겨나는 실정이다. 그쯤되면 그것은 이미 음악이 우상화된 경지에 이르렀음의 한 증거가 될 수 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어떤 독특한 예술성을 근본적으로 요구하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로서의 성실한 삶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고백적 표현인 것이다.

중세의 종교개혁자들은 교회음악의 기교화를 우려했다. 그리고 예술성의 강조를 염려했다. 그러므로 우상화된 음악 역시 미술품들과 더불어 척결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교회에서 공예배 시간에 특별한 순서를 담당하는 찬양대는 자기들의 음악적 기량을 다른 교인들에게 보이는 것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된다. 또한 그 예배에 참여하는 교인들의 귀를 통해 '찬양'이 평가받는 것이 아님을 잘 깨달아야 한다. 현실적으로 공예배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찬양대의 대표찬양은 어디까지나 고백적이어야 하며, 목청을 통한 아름다은 기교로써 온 교인이 함께 만족하는데 그쳐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찬양대의 찬양내용은 새롭고 어려우며 고상한 기교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예배에 참여한 성도들이 보편적으로 그 고백에 참여할 수 있는 내용이어야 하는 것이다. 만일, 신앙이 없거나 신앙고백에 허술한 사람들의 수준높은 음악적 기교만을 듣고 흐뭇해 하며 소위 은혜(?)를 받게 된다면 그것은 예술문화에 속고 있음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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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탄은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 문화적 형태들을 통해 우리의 신앙을 둔화시키고 있음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ⅲ) 또, 현대교회에는 기독교 문화를 자의적으로 구상하는 자들이 많다. 특히 자유주의 신학을 지향하는 인물들 가운데는 기독교와 토착문화를 접목하는 것을 사명으로 여기는 자들도 없지 않다. 원래는 우리가 복음의 원리를 닮아가야 하는 것이 옳은데, 그들은 기독교 토착문화를 부르짖으며 복음을 끌어와 보편 문화에 맞추려 한다.

예를 들어, 지금 교회에서 일반적으로 부르는 찬송은 서양사람들이 만든 노래이므로 우리 가락의 '창'이나 민요풍 찬송을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들은 반주도 피아노가 아니라 장고나 꽹가리가 우리 문화에 적합하다고 주장한다. 뿐만 아니라 성찬식도 '성찬 한마당'으로 바꾸어 포도주 대신 막걸리를 사용해 한바탕 벌이자는 식이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 속에는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가가 아니라 자신의 문화적 스타일을 더욱 중요시하고 있음이 역력하다. 우리는 종교의 형식이 아니라 복음의 내용, 즉 알맹이가 훨씬 귀중함을 안다. 비본질적인 껍질과 형식에 과다한 신경을 써서 그것들을 자기의 취향대로 바꾸려는 지나친 노력은 무의미함을 넘어 위험하다. 더구나 진리의 내용을 염두에 깊이 새겨두지 않을 경우에 그것은 복음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종교적 문화운동에 그칠 따름이다. 어떠한 경우에라도 특정한 문화에 대한 옹호적 입장으로 인해 기독교 진리가 다소나마 희석되어서는 안된다.

 

 

앞에서 언뜻 비추었듯이 문화는 일반적으로 화사한 모습을 하고 있어서 견제할 대상으로 생각지 않을 수 있다. 대개는 그 사회에서 보편적 성격을 띠지만 그것만으로 유익한 문화는 아닌 것이다.

우리는 문화가 마치 인간이 즐기고 누리는 것인양 섣불리 규정하려 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문화에 빠져들어서도 안되며 문화지상주의자가 되어서도 안된다. 문화는 감성에만 의존해서 안되며 진리를 통해 변화받은 이지에 근거해야 한다.

사탄의 드러난 전략에 대해서는 우리가 별로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탄이 광명한 천사의 모습으로 가장(고후11:15)하고 나타날 때, 우리는 더욱 바짝 긴장할 수 밖에 없다.

세월이 지남에 따라 문화의 가치에 혼선이 더욱 크게 빚어져가는 이 세대에 우리는 수용해야 할 문화와 경계해야만 할 문화 사이를 예리하게 분별할 수 있는 신앙적 안목을 가져야 한다.

우리가 지향할 바 진정한 문화는 하나님안에서 이룩되어 하나님께 영광으로 되돌려 질 수 있는 문화여야 한다.

성경말씀의 분명한 잣대를 거치지 않는 문화의 관대한 수용이 기독교를 세속화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됨을 염두에 두자. 그것이 곧 사탄의 전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