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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의 윤리의식 개발

nokobo 2010. 4. 3. 16:20

목회자의 윤리의식 개발

 

                                                                  

Ⅰ. 서론

많은 목사님들이 좀더 훌륭하게 목회를 해보기 위해 무더운 데도 불구하고 오셔서 고생하시는 것을 보니 평신도의 한 사람으로서 감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도 한국 교회를 사랑하고, 또 우리 한국 교회가 우리 사회에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믿는 사람으로서 여러 목사님들께서 스스로를 훈련시키고 의식을 개발한다는 것이 대단히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여러 곳에서 강의를 많이 합니다만 그때마다 항상 느끼는 역설적인 사실이 있습니다. 꼭 강의를 들어야 할 사람들은 오지 않고 안 들어도 될 분들이 온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오셨다는 사실 자체가 벌써 상당히 의식이 개발된 분들이라고 생각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적으로 빈익빈 부익부의 현상이 나타나지만 특별히 정신적인 영역에서 빈익빈 부익부가 있습니다. 한번 의식 개발을 맛보신 분들은 의식이 개발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기 때문에 더 의식 개발을 위해 노력합니다. 그래서 오늘 이런 집회에도 참석하여 강연도 듣고 책도 읽어 의식이 점점 개발되어 갑니다. 반면에 의식이 개발되어야 한다는 필요를 느끼지 않는 분들은 강의도 듣지 않고 책도 읽지 않으며 노력을 하지 않기 때문에 의식이 점점 뒤떨어지는 까닭에 정신적인 빈익빈 부익부의 현상이 두드러집니다.

이것은 대학에서도 항상 느낍니다. 국민학생이 대학 서적을 못 읽는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그것은 글자를 못 읽어서 읽지 못하는 것도 아니고 단어의 뜻을 몰라서 못 읽는 것도 아닙니다. 사전을 찾아보면 단어의 뜻은 다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단어와 단어가 연결되어 있는 것을 국민학생은 아무리 읽어도 그것이 무슨 소리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대학생들은 그것을 쉽게 읽습니다. 그것은 바로 의식이 개발되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자신의 의식을 계속해서 개발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교수들도 여러분 보시기엔 모두 비슷비슷한 것 같지만 교수들 세계에 들어가면 천차만별입니다. 어떤 교수들은 강의 시간을 제외하고는 바둑과 장기 두는 데 모든 시간을 보내는 분이 있습니다. 또 낮에는 테니스 하고 밤에는 텔레비전 보고 그래서 ‘주테 야테’ 교수들도 상당히 많습니다. 그런분들은 금년에도 작년에 썼던 강의 노트 그대로 강단에 섭니다. 저는 참 우리 학생들이 아주 너그럽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강의를 듣고도 가만히 참는다는 것, 그 얼마나 인내를 요하는 일인지……. 이런 분들에게 출판사나 잡지사에서 “글 하나 써주십시오”하며는 장기, 바둑 두느라 어디 글 쓸 여유가 있겠습니까? 장기 , 바둑 때문에 적당히 써서 던져 버립니다. 이것을 출판사나 잡지사에서 보면 이건 도저히 글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다시는 그분에게 글 써달라고 안 합니다. 그러니까 그분은 글 쓸 기회가 없어집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아무도 부탁을 안 하니 이제는 정말 장기, 바둑 두는 것밖에는 할 일이 없게 됩니다.

그런데 어떤 교수는 글 부탁을 받으면 아주 노력을 많이 합니다. 노심초사해서 연구하고 고치며, 책도 읽고 해서 아주 멋진 글을 써서 보냅니다. 그러면 출판사나 잡지사에서 감탄을 합니다. 그래서 자꾸 써달라고 합니다. 그러면 자주 쓰게 되고 자꾸 쓰니까 의식이 개발됩니다. 쓰는 법도 더 나아지게 되고 책도 더 많이 읽게 되며 정신적으로 풍부해집니다. 이것이 바로 교수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빈익빈 부익부 현상입니다.

의식 개발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동물과 달라서 본능대로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기계처럼 자연의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은 스스로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행동하고 말하며 이 세상을 삽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다. 마음속에서 나오는 것이 더럽게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마음입니다.

Ⅱ. 본 론

우리가 넓은 의미로 마음을 의식이라 말하는데 ‘의식 개발’이라는 말은 사실 60년대 남아메리카에서 ‘의식화’란 말로 변이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대학생들 사이에서 ‘의식화시킨다’라는 말을 쓰는데, 영어로는 ‘conscientization’이란 말입니다. 이 단어는 스페인어로 ‘conscientisac-jo’라고 하는데 본래 영어에는 없던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최근에 생긴 것입니다. 의식화라는 것은 무엇이며 어떻게 하면 의식화될 수 있을까요?

첫째,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여야 의식화가 됩니다.

우리 기독교는 정보를 매우 중요시합니다. 불교는 정보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다 아시는 바와 같이 불교에서는 가만히 앉아서 묵상하면 어떤 순간에 해탈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외부에서 정보가 들어올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깊은 산속에 가서 혼자 묵상하면 됩니다. 그것이 불교의 의식관입니다. 유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유교 신자들은 “공자는 생이지지(生而知之)였다”고 말합니다. 즉 태어날 때부터 이미 다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는 정보를 매우 중요시하는 종교입니다. 기독교가 계시의 종교라는 사실에서 나타납니다. 본래 창조 때부터 인간에게 진리가 주어진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진리가 없습니다. 우리 기독교는 진리가 바깥에서 들어온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그것이 계시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즉 성경을 통해 계시하시고 그것을 우리가 읽고 듣고 배워야 그것을 알지 배우지 않고는 알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기독교는 진리가 우리 인간에게 본래 주어져 있다고 보지 않고 바깥으로부터 들어와야 한다고 믿습니다. 우리 기독교는 계시의 종교요, 책의 종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설교를 들어야 하고 말씀을 배워야 하며 읽어야 합니다. 이렇게 기독교는 정보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떤 정보를 받아들이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생각과 인생이 결정이 됩니다. 마치 우리 의식이라는 것은 웅덩이의 물과 같아서 빨간 물이 계속해서 들어오면 의식도 빨갛게 됩니다. 또 파란 물이 계속해서 들어오면 파랗게 됩니다. 계속해서 더러운 소리만 들으면 의식이 깨끗하게 남아 있을 수 없습니다. 결국 의식이 더러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거룩하고 아름답고 깨끗한 말을 계속해 듣고 읽으면 의식도 깨끗해집니다. 그래서 그 깨끗한 의식에서 깨끗한 말이 나오고 깨끗한 행동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배운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배우되 중요한 것을 배워야지 시시한 것, 더러운 것을 배우면 이건 큰일입니다. 배우긴 배우되 항상 깨끗하고 거룩하며 정말 가치있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전철 안에서 청년들이 스포츠 신문의 만화나 보고 있는 모습을 보면 얼마나 안타까운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하루종일 피곤하니까 좀 가벼운 것을 읽기 위해 그런 것을 읽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그 귀한 시간에 그래도 좀 가치있는 걸 읽어야지 그 시시한 것, 더구나 음란한 것을 읽으니 마음이 음탕해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 결과로 우리 사회 전체에 아주 나쁜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제가 최근에 음란, 폭력만화 추방대책위원회를 만들어서 스포츠 신문계와 아주 대대적인 전쟁을 한 일이 있습니다만, 이런 만화 등 저질 문화가 얼마나 우리 청소년들에게 나쁜 영향을 주는지 아십니까?

둘째로, 의식화라는 것은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을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의식 속에 들어오는 것이 다 비슷비슷한 것이라 할지라도 어느 정도 의식이 제대로 개발되면, “아, 이것이 더 중요하구나, 이것이 덜 중요하구나”라는 것을 구별하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우리는 매순간 엄청난 양의 정보를 받아들입니다. 이것을 흔히 컴퓨터 문자로 ‘BIT, MEGABIT’라고 합니다. 우리의 두뇌는 아주 기묘한 기계와 같아서, 그 모든 정보를 다 수용하지 않습니다. 그 중에 어떤 정보는 속에 남겨놓고 어떤 정보는 버립니다. 사실은 우리가 머리에 간직하는 정보보다는 버리는 정보가 훨씬 많습니다. 그래서 프랑스의 유명한 철학자 베르그송(Bergson)은 “우리의 두뇌는 잊어버리기 위해서 존재한다”라고 했습니다. 사실 전체적으로 따지면 기억하는 것보다 잊어버리는 것이 훨씬 많습니다.

우리 마음은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계속해서 판단을 합니다. ‘이것은 중요하지 않다.’ ‘이것은 중요하다.’ 계속 판단을 합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수용하고, 중요하지 않은 것은 버립니다. 그런데 그 판단 능력이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아름다운 여배우의 허리둘레 같은 것은 아주 귀신같이 기억을 합니다. 또 어떤 팀의 어느 타자는 몇 타점을 올렸다는 것을 또한 귀신같이 기억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다는 것은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정치가들은 사람 얼굴 기억하는 데 아주 탁월합니다. 정치가들 한번 보십시오. 6, 7년 전에 그저 악수 한번 했는데 그 뒤에 다시 만나면 ‘손교수, 오랜만입니다’라고 말하니 깜짝 놀랄 수밖에 없습니다. 저 사람이 도대체 어떻게 기억을 하는가, 뭐 눈에는 뭐밖에 안 보인다고, 정치가들 눈에는 그런 것밖에 안 보이나 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룩한 말씀 ‘정직해야 한다,’ ‘깨끗해야 한다,’ ‘부정하면 안 된다’는 말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의식을 개발한다는 말은 올바른 것을 받아들이고 불필요한 것은 버리는 능력을 키우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 목회자들 사이에도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덜 중요한가에 대해서 혼란을 일으키는 분들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사실은 중요한 것인데 그것은 무시해 버리고 중요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집착을 합니다. 이렇게 되면 큰일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경을 열린 마음으로 읽으면 ‘아,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참 중요하게 생각하시는구나’ ‘예수님께서는 이걸 중요하게 생각하시는구나’하는 것을 우리가 깨닫고 우리 눈이 그쪽으로 밝아져서, 머리에 기억하고 ‘아, 이것은 덜 중요하니까 조금 보류하자.’ 이런 구별 능력, 즉 분별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에베소서에 보면 죄인의 특성 가운데 하나가 아주 마음이 혼탁해지고 마음이 둔해진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결국 영적 분별력이 없어져 버린다고 했습니다. 죄를 짓고도 죄 지은지 모르고 산다면 분별력이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정말 영적으로 분별력이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행동을 조금만 해도 가슴이 아프고, 분별력이 없는 사람은 사람을 죽여 놓고도 눈만 껌뻑껌뻑 하면서 “뭐가 나빠!”라고 태연히 말합니다. 돈이 2, 30만 원이 생기면 까맣게 보이며, 다른 사람을 속이고 탈세하며 다른 사람을 해롭게 하는 것은 조그마한 일로 여깁니다. 이렇게 되면 영적 분별 능력이 혼탁해집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의식의 개발이라는 것은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을 분별하는 것입니다.

오늘 제가 ‘윤리의식의 개발’이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윤리적인 것이 참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기 위해서 이렇게 왔습니다. 앞으로는 목사님들께서 윤리적인 것에 대해서는 커다랗게 보고, 비윤리적인 것에 대해서는 “이럴 수가 있나!”하고 분개를 하실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저의 강의 목적입니다. 만약 이것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면 제가 이렇게 하는 것이 꼭 약장사처럼 내 약만 팔려고 하는 그런 비도덕적인 행위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제가 몇 년 전에 우리나라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이 누구인가를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여러 사람들에게 사랑을 나누어 주어야 하는데 사랑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참 사랑을 베풀면 좋겠지만 그건 불가능하기에 제일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부터 시작해야 되는 것이 성경적인 원칙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항상 고아와 과부에게 관심을 많이 가지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왜 고아와 과부에게 특별히 관심을 쏟았습니까? 왜냐하면 당시 사회에서는 고아와 과부가 제일 불쌍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의지할 곳이 없고 보호해 주는 사람이 없으며 억울함을 당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의 보호자로 나섰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 가지로 생각을 했습니다. 물론 잘못되었을 수도 있지만 저의 판단으로는 장애자가 제일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장애자가 제일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20여 년 전부터 장애자들에게 관심을 많이 기울이고, 또 교회 여러 가지 구제사업에도 장애자들 위주로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철학을 공부해서 그런지 천성이 그래서인지, 아주 냉정합니다. 아무런 동정도 할 줄 모르고 끔찍한 일을 봐도 별로 놀라지도 않으며 불쌍한 사람을 보아도 불쌍한 느낌도 없는 아주 냉정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 어머니가 저를 보고 냉혈동물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장애자들에게 관심을 갖는 것은 그 사람들이 겉보기에 불쌍하게 느껴져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저렇게 따져 보니까, 장애자가 제일 불쌍하고 도움을 제일 필요로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꾸 장애자들에게 관심을 두다 보니 그 다음부터는 신문에 장애자라는 말만 나오면 눈이 번쩍 뜨이고 또 길을 지나다 장애자를 보면 더 관심이 가게 되고 그러다 보니 장애자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이런 것이 바로 의식 개발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다른 사람이 사는 것처럼 살아갑니다. 우리 인간들은 자기 주위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우리 한국 사람은 서양에 가도 한국 사람처럼 행동합니다. 또 일본 사람은 서양에 가도 일본 사람처럼 행동합니다. 일본 사람들 피 속에 일본 국기가 들어있는 것도 아니고, 우리 한국 사람의 피 속에 태극기가 들어있는 것도 아닙니다. 피는 세계 인류가 다 같습니다. 흑인의 피도 빨갛고 백인의 피도 빨갛습니다. 모든 피는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사람은 서양에 오나, 한국에 오나 일본 사람처럼 행동하고, 한국 사람은 어디를 가나 한국 사람처럼 행동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각자가 주변의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우리 대부분의 사람들은 의식적으로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다른 사람의 행동을 보며 다른 사람처럼 행동합니다. 목회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의 목회자는 미국의 목회자들과 다르고 일본의 목회자들과도 다릅니다. 역시 한국 사회와 교회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은 무의식적으로 살게 됩니다. 무의식적으로 산다는 말은 의식이 전혀 없다는 말이 아니라 가치관이나 행동방식에 있어서 다른 사람하고 별로 다르지 않게 산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사회의 의식구조는 계속 바뀝니다. 가령 산업화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변하지 않을 수 없는 것, 또 외국의 영향이 오기 때문에 바뀌어지지 않을 수 없는 것, 그런 것도 있지만 그러나 사회는 언제든지 창조적인 사람들에 의해 변화됩니다. 즉 다른 사람들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사회전체의 의식을 특정한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 의해서 이 사회가 변화되어 갑니다. 정신상태도 바꾸어집니다.

그래서 저는 한국 국민의 의식, 이것을 우리 기독교가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는 분들은 뭐니뭐니해도 목회자들입니다. 목회자들만큼 사람들의 의식에 영향을 크게 주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들은 엄청나게 중요한 위치에 있습니다. 영어로 말해서 ‘key position’이라고 합니다. 열쇠와 같은 위치에 있음을 말합니다. 아무리 큰 창고라도 열쇠만 있으면 문을 열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중요한 위치에 있는 분들이 목회자들입니다.

저도 주일날 가끔 설교를 할 기회가 있습니다. 그때 이런 말을 하곤 합니다. “여러분, 교회에 와서 연보 천 원씩 내는 것을 굉장히 손해본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얼마나 비싼 강의를 듣는지 모릅니다. 그 돈을 주고 이 세상 아무데나 가서 이런 강의를 듣지 못합니다. 내가 비록 회사에 가면 몇십만 원씩 받기는 합니다만, 내 설교가 손봉호의 설교하면 별로 가치가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여러분은 하나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그것은 돈주고 살 수 없는 겁니다. 그런데 괜히 연보 좀 했다고 해서 교회에 큰 덕이나 끼치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사실은 여러분은 돈은 조금 내고 엄청나게 많이 가져가는 사람들입니다!”

제가 어떤 때는 화가 나서 가끔 이런 설교를 합니다. 돈 천 원 던져놓고 뒤에 앉아서 ‘오늘은 목사가 무슨 연극을 하나?’ 하고 구경을 하고 앉아 있습니다. 그런 사람을 보면 얼마나 미운지 모르겠습니다. 학생들 중에 제일 앞자리에 앉아서 선생님을 쳐다보는 학생들은 대개가 공부 잘하는 학생입니다. 교인들도 앞자리 앉아 말씀을 경청하는 분은 대개 믿음이 자란 분들입니다. 어떤 분들은 제일 늦게 와서 구석에 앉아 ‘자, 목사가 오늘 무슨 연극을 하는가 한번 보자’는 식의 태도를 취합니다. 이 사람은 관객입니다. 학생들 중에도 그럼 사람이 있습니다. 다리 쭉 뻗고 앉아 신문이나 들여다보다 나간다면 그건 공부하러 온 학생이 아닙니다.

의식 개발이라고 하는 것이 단순히 여기 계신 목사님들 자신들의 의식 개발에 국한되는 것은 아닙니다. 목사님들의 의식 개발이라고 하는 것은 곧 모든 성도들의 의식 개발임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성도들의 의식 개발이라는 것은 우리 사회 전체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는 것이기 때문에 이번 집회에서 여러분들이 강의를 통하여 새로운 정보도 많이 얻으셔야 합니다. 그래서 중요한 부분에 목사님들이 관심을 조금 더 많이 써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우리 사회가 지금 당면하고 있는 문제들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가, 이 사회가 지금 집중적으로 관심을 쏟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살펴봅시다. 1960년대까지는 우리 한국 사람들의 주된 관심은 경제 문제였습니다. ‘우리가 편하게 배불리 먹고 살 수 있으면 오죽 좋을까’하는 것이 우리 한국 사람들의 모든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1960년대부터 경제가 조금 발전되고 보니 1970년대 인권 문제가 아주 심각하게 대두되었습니다. 인권이 탄압을 많이 받고 무시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의 카터 대통령이 한국에서 인권 상황이 고쳐지지 않으면 미군을 철수시키겠다고 할 정도로 인권 탄압이 아주 심했습니다. 1980년대에 들어와서는 인권과 관계가 있습니다만 이제 민주화가 문제가 되었습니다. 계속되는 독재 때문에 민주화의 소용돌이 속에 우리 사회가 휩쓸려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지금 1990년대에 들어와서는 우리가 무엇에 대해 걱정하고 있습니까? 물론 많은 사람들이 통일에 관해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문제는 통일입니다.

또한 그 다음에 도덕적 타락도 문제입니다. 사실은 인권 문제와 민주화 문제도 도덕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많은 사람들이 정치나 경제 사회 일반의 도덕적 타락에 대해 아주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 갑자기 도덕에 대한 많은 운동이 일어나고 또 언론도 거기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제가 몇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도덕이라는 게 사회 도덕이 있고 개인 윤리적인 것도 있습니다.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만 우선 모든 시대에 걸쳐 도덕이 타락하였을 때 제일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성도덕의 타락입니다. 우리 인간이 갖고 있는 본능 중에 제일 강한 본능은 역시 먹자는 본능일 것입니다. 식욕이 충족이 안 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그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그 다음이 성적인 본능입니다. 우리 사회가 이제 먹을 것이 어느 정도 있으니까 성도덕이 심각한 문제로 대두됩니다.

많은 예를 들지는 않겠습니다만 지금 세계 각국에 퍼져있는 우리나라의 고아들이 20만 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고아들이 어떤 고아들입니까? 물론 그 가운데는 전쟁 고아들도 있습니다만 전쟁이 끝난 지가 벌써 언제입니까? 그런데 지금도 매년 수천 명씩 한국 고아가 해외에 입양됩니다. 이 고아들이 어디서 나오는 고아입니까? 거의 대부분이 미혼모로부터 나온 고아들입니다.

지금 강간이 어느 정도입니까? 신문에 보도되는 것, 경찰에 보고되는 것은 실제 일어나는 것의 1/60 내지 1/600 이라고 전문가들이 이야기합니다. 제가 대학원에서 가르치는 학생들은 다 중고등학교 교사들입니다. 그래서 한번은 여자 중․고등학교에 있는 교사들에게 조사를 시켰습니다. 그중 선생 하나가 여자 중학교 3학년 담임 선생님인데, 자기 반 60여 명의 학생들에게 종이를 나누어 주고 이름을 쓰지 말고 마음에 있는 고민을 전부 말해 보라고 했더니 60명 가운데 세 학생이, 그러니까 20명 중의 한 명이 강간을 당했다고 썼고, 그 중의 한 학생은 임신을 했었다고 썼습니다. 그리고 세 학생 중 한 사람도 부모님에게 이야기하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서울 시내의 중고등학생이 약 110만 명인데 그중 여학생이 반쯤 된다고 생각을 하면 약 55만이 아니겠습니까? 1/20이 강간을 당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이것이 우리나라의 상황입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부모들이 그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사회도 그걸 모르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정치계, 교육계 학부모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가령 제가 조금 전에 스포츠 신문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YMCA에서 스포츠 신문에 실리는 음란 만화가 어떠한 영향을 끼치는가를 조사하기 위해서 서울시 중고등학생 1722명에게 앙케이트를 돌렸습니다. 스포츠 신문을 읽는 학생이 약 85%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스포츠 신문에 나오는 음란 만화를 보고 어떤 자극을 받았느냐고 물었더니, 77명이 실제 성행위를 하게 되었다고 대답했습니다. 스포츠 신문의 음란 만화를 보고 곧 성행위를 했다는 학생이 77명입니다. 약 5%에 달하는 학생입니다. 이것만 보아도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비디오는 훨씬 더 심각합니다. 서울시 중고등학생의 약 52%가 음란 비디오를 본 것으로 되어있고 그 대부분이 집에서 보았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 부모들이 자식을 사랑한다고 세계적으로 알려져 있습니다만 실제로는 한국 부모들은 자식들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한국 부모들은 자식을 통해서 자기의 이름이 올라가는 것이나 자식들이 성공하고 자식들이 좋은 대학에 가서 자기가 우쭐해지는 것을 즐기지, 진정 자녀들의 장래를 위해서 애쓰는 부모는 별로 없습니다. 만약 이런 통계가 나왔으면 우리 한국의 부모들이 벌떼처럼 일어나야 될 것 아닙니까? 그러나 냉담합니다. 정말로 심각합니다.

그 다음에 마약 문제입니다. 사람이 정상적인 성적 쾌락을 추구하지만 그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을 싫증나게 합니다. 그 다음에는 대개 퇴폐적인 성행위로 이어집니다. 정상적인 부부관계의 성행위에 싫증이 납니다. 그 다음에는 범죄적인 성행위를 추구하며 그것도 얼마 안 있어 싫증이 나 퇴폐적인 성행위로 이어집니다. 그것에 싫증이 나면 그 다음에는 마약이 등장합니다. 이것이 대개 선진국에서 일어나는 상황인데, 우리나라도 이화여대 김재은 교수가 조사해 본 바에 의하면, 서울시 중고등학생 25%가 환각제를 사용해 본 경험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미국은 현재 우리 대한민국의 국민총생산에 맞먹는 돈을 마약퇴치 운동에 사용하고 있습니다. 미국이 왜 저렇게 2등 국가로 변해가고 있는지 아십니까? 경제적으로 일본에게 뒤지고 독일에게 뒤집니다. 미국은 점점 내리막길을 걷고 있습니다. 그 가장 중요한 이유가 우리 대한민국의 국민총생산에 해당하는 막대한 돈을 아무 생산력 없는 마약퇴치에 사용하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완전한 소비입니다. 많은 돈을 비생산적인 일에 사용하고 있고, 한참 생산적으로 일해야 할 젊은이들이 마약 중독자가 되어서 병원에 드러누워 있습니다. 또 에이즈에 걸려서 누워 있습니다. 그러니 그 경제가 견뎌낼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에도 이 마약이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다른 문제는 부동산 투기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제 발전을 저해하는 가장 큰 암적 요소가 부동산 투기입니다. 집값, 땅값이 너무 올라서 근로자들은 월급을 아무리 많이 받아도 그것으로 집을 살 수 없습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집에 대한 집착이 강하기 때문에 어떻게든 집 한 칸 마련해 보려고 하는데, 최근에 집값이 너무 올라가서 근로자가 정상으로 월급을 받아가지고 집을 사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졌습니다. 그러니 근로자들이 더 많은 월급을 달라고 하는 겁니다. 월급을 자꾸 올려달라고 하니 월급이 어느 정도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이제 물건값이 올라가서 국제 경쟁력이 약해졌습니다. 지금 수출이 안 되는 이유도 우리나라의 상품값이 너무 비싸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지금 경제가 큰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근로자들은 이제까지 장만하고 저축해 놓았던 돈으로는 어차피 집을 못사니까 즐기기나 하자며 자동차를 삽니다. 그리고는 진탕 먹고 놀아버립니다. 즉 열심히 일을 해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으니까 적당히 일하고 놀자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생산성이 떨어집니다.

환경오염문제도 심각합니다. 이것도 도덕적인 문제입니다. 공직자의 뇌물청탁문제 역시 심각합니다. 정부의 어느 부처는 뇌물을 안 주고는 되는게 하나도 없는, 그런 부처도 있습니다. 특별히 건축관계는 뇌물 안 주고 되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과정이 반드시 뇌물을 주어야 합니다.

사치품 문제도 심각합니다. 지금 우리나라에는 자동차가 없어서 못삽니다. 어떤 여자 옷은 천 3백만 원짜리가 있다고 합니다. 남자들도 요즘 코트까지 갖추려고 하면 백만 원은 가져야 합니다. 음식값은 하루 저녁에 몇 사람이 먹고 나면 30만 원, 40만 원을 내야 되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골프장은 계속 늘어가고 임야는 파괴되어가고 있습니다. 자, 이렇게 되어가지고는 우리나라가 앞으로 견뎌내기가 참 어렵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심각한 문제입니다.

제가 이럼 말씀을 드리는 것은 윤리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우리가 윤리적이 되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기에 대해서는 우리가 여러 가지를 말할 수 있고 철학에서도 여러 가지 이론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우리가 윤리적이 되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윤리적이 되지 아니하면 그때에 다른 사람이 고통을 당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어떤 법칙에 의하여 움직입니다. 물은 반드시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법칙이 있습니다. 비가 올 때 비는 으레 위에서 밑으로 내린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비가 오면 우산을 가지고 나갑니다. 만약 비가 옆에서 오거나 밑에서 온다면 우산은 아무 소용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비가 항상 위에서 내려온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모릅니다. 안 그러면 우산을 어떻게 만들어야 되겠습니까? 옆으로? 밑으로? 특별히 밑에서 비가 온다면 우산을 어떻게 만들어야 하겠습니까?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비는 항상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옵니다. 그리고 물은 밑으로 흐르려 하기 때문에 우리는 팔당댐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물이 위로 올라간다고 하면 팔당댐이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렇게 자연 법칙은 일정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기에 대응해서 삽니다. 그렇게 때문에 우리는 안심을 하고 삽니다. 옛날에 무식했을 때는 이 법칙을 몰라서 번개 한 번만 쳐도 하늘이 내리는 벌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양심에 거리낌이 있는 사람들은 겁을 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요즈음은 벼락이라는 것이 양전기와 음전기가 부딪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피뢰침을 세울 줄 알고, 그 속에서 양심의 가책도 받지 않고 편안히 사는 것입니다.

동물도 인간과 비슷합니다. 동물은 욕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활동을 합니다. 그러나 동물은 욕구가 충족되면 그 이상 욕심을 부리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예를 들어, 사자는 배고프면 짐승을 잡아먹지만 먹다가 배가 부르면 먹지 않습니다. 그리고 나머지를 남기고 가버립니다. 그러면 사자보다 약한 동물이 와서 먹고 그놈이 또 배가 부르면 그대로 놔두고 갑니다. 나중에는 아주 약한 동물이 와서 나머지를 깨끗하게 치웁니다. 만약 사자가 사람처럼 욕심이 많아서 먹고 남는 것에 표를 해놓았다가 내일 먹고, 냉장고에 넣어 놓았다가 내일 먹고, 또 팔아서 돈을 저축한다면 아마 다른 동물은 살아 남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자연의 질서를 잘 만드셔서 사자는 새끼를 많이 낳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 강한 동물이 새끼를 많이 낳으면 다른 동물이 못 살기 때문입니다. 약한 토끼 같은 것은 자꾸 잡아 먹히니까 많이 낳도록 하셨습니다. 사자는 강하니까 적게 낳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자연은 질서가 잡혀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개 동물의 세계를 약육강식이라고 말하며 무질서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동물의 세계는 질서가 있습니다. 그래서 약한 동물일수록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도록 잘 만들어져 있고, 또 새끼도 많이 낳아서 종족을 보존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강한 동물일수록 새끼를 적게 낳고 쓸데없는 욕심을 부리지 않게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라는 동물이 문제입니다. 사람들은 이 본능을 충족시키는 방법이 아주 다양합니다. 욕심이 많아서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자기 배를 채우는 것으로 만족하지 아니하고 내일 배고플 것, 모레 배고플 것, 아들 배고플 것, 손자 배고플 것까지 지금 다 준비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의 욕망은 무한합니다. 그리고 단순히 그 욕망 충족뿐 아니라 다른 사람과 경쟁을 하기 시작합니다.

창세기 4장에 보면 가인의 후예들이 하나님의 보호로부터 벗어나자 불안하게 되었습니다. 불안은 죄의 특징입니다. 죄의 특징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질 때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인은 “내가 견딜 수 없나이다. 내가 두려워서 견딜 수가 없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가인을 내가 보호한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게 하겠다”고 말씀하시고 이마에 표를 주었습니다. 그래도 가인은 그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못 믿습니다. 그것이 죄가 갖고 있는 또 하나의 특징입니다. 가인은 그 불안을 “누구든지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라는 말로 표현하였습니다.

인간의 불안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옵니다. 그래서 가인은 성을 쌓았습니다. 그래서 그 성 이름을 ‘에녹 성’이라 이름 짓습니다. 자기 아들의 이름에서 딴 것입니다. 그 다음 구절에 보면 동과 철로 날카로운 기구를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무기를 만든 것입니다. 인간은 무기를 만들고 성을 쌓았습니다. 가인의 후예들이 성을 쌓고 무기를 만들었는데 다른 인간들이 안심하겠습니까? 가인의 후예들이 그렇게 하는 것을 보니까 그것에 대비하기 위해 자기들도 성을 쌓습니다. 자기들도 무기를 만드는 것입니다. 안심하기 위해서 성을 좀더 크고 튼튼하게, 좀더 높이, 그리고 무기도 좀더 날카롭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면 가인의 후예들이 그것을 보고 안심을 하겠습니까? ‘안 되겠다, 우리는 좀더 높이, 좀더 튼튼하게 그리고 좀더 날카롭게 만들자’고 하였습니다. 그걸 보고 있던 다른 사람도 ‘우리는 좀더 높이, 좀더 튼튼하게, 좀더 날카롭게 만들자’고 구상하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욕망이 무한하고 다른 인간에 대하여 사자가 되고 늑대가 됩니다.

영국의 유명한 정치 철학자 토마스 홉스라는 사람이 ‘호모 호미니드 울프(homo hominid wolf)’란 말을 했습니다. 그것은 “사람은 사람에게 늑대다”라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서로 잡아먹려고 덤빕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에게 이러한 욕망을 막는 질서가 없다면 결국 약육강식이 되는 것입니다. 강한 사람은 약한 사람을 다 잡아먹어 버리기 때문에 질서가 깨지고, 결국은 약자가 희생을 당합니다. 가장 원시적인 상태에서는 몸이 약한 사람이 희생되고, 요즘 사회 같으면 돈 없는 사람이 희생됩니다. 또 무기가 많은 미국과 같은 곳에서는 권총을 빨리 쏠 줄 모르는 사람이 희생됩니다. 나라마다 각각 다르겠지만 어쨌든 그 사회에서 제일 약한 사람이 희생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류는 질서를 만들어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규범이라는 것을 만들었습니다.

우리 인간이 만든 규범은 굉장히 많지만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 중에 제일 약한 법이 예의범절입니다. 예의도 하나의 규범입니다. 예를 들면, “젊은 사람은 노인에게 자리를 양보한다.” 이것은 예의의 차원에 속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하철에서 젊은 청년은 힘없는 노인이 오면 벌떡 일어나서 자리를 양보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약자를 보호하는 것입니다. 가령 어린 아이가 다리를 못 건너서 고생을 하면 힘이 센 사람이 가서 도와주는 것, 그것이 하나의 예의입니다. 심지어 집안에서 연세 많고 기운이 없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야 이놈!”하면, 건장한 아들이 “예, 아버지!”하는 것도 하나의 예의입니다. 예의는 참 중요합니다. 그러나 예의만 가지고 사회 질서는 유지하기는 너무 부족합니다. 사람의 욕망이라는 것이 너무 강하고, 경쟁심이 너무 크기 때문에 예의만 가지고 사회 질서를 유지 할 수는 없습니다. 공자는 예의를 가지고 사회 질서를 유지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안 됩니다.

가장 강한 질서 유지 방법은 법률입니다. 법률이라는 것은 사람의 행동에 물리적인 압력을 가함으로써 규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벌을 주고 벌금을 내게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어떤 특정한 방향으로 행동하도록 만듭니다. 예의는 너무 약해서 그것만 가지고 사회 질서를 유지하지 못하는 약점이 있는가 하면 법률은 너무 강해서 인간의 위신에 어긋날 때가 많습니다. 인간이라는 것은 자기가 원해서 행동을 할 때 위신이 나타납니다. 외부에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해서 하는 수 없이 하는 것은 인간의 위신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개 법률이 많아지면 그 사회의 개인적 책임의식이 약화되어서 점점 더 사회가 무질서하게 됩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도 가장 심각한 문제가 법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법이 그렇게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변호사 한 사람이면 모든 문제를 다 처리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합동 법률 사무소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왜냐하면 법이 많아져서 한 사람이 모든 케이스를 다 취급할 수 없기에 여러 전공 변호사가 같이 앉아서 어떤 사람이 오면, “아, 이것은 이변호사가 맡아야 한다.”, “이것은 김변호사가 맡아야 한다.” 이렇게 분담을 할 정도로 법이 많아졌습니다. 결국 법이 많아지면 우리의 행동에 규제가 더 심해지고 우리의 자유가 많이 위축을 당하며 그만큼 우리의 생활은 경직됩니다. 그래서 법도 예의도 아닌, 하지만 상당히 인간의 위신도 세워주고 동시에 어느 정도 사회질서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필요해진 것입니다. 이것이 도덕입니다. 이 예의와 법률과 도덕 중에서 도덕은 예의와 법률의 중간에 위치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도덕은 법률과는 좀 다릅니다. 비도덕적이라 해서 벌을 주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으로부터 비도덕적이라는 욕을 먹습니다. 그것이 유일한 규제입니다. 또 다른 사람으로부터 “저 사람은 비도덕적이니까 가까이 하면 안 된다”라며 소외를 당하게 되므로 도덕은 상당히 무서운 규제입니다. 그러나 도덕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은 대개 다른 사람의 눈이 무서워서 도덕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옳다고 느끼기 때문에 합니다. 그래서 그것은 자발적입니다. 사실 질서는 유지하는 방법 가운데서 제일 좋은 방법이 역시 도덕 질서입니다. 그래서 한 사회가 아주 도덕적이 되면 법률이 필요 없게 됩니다. 우리가 좋은 사람을 보면 “저 사람은 법 없이도 살 사람이다”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이 워낙 착한 행동만 하면 그 사람에게는 법이 필요 없게 됩니다. 그래서 서양에서도 옛날부터 이상적인 국가를 소위 Small Government, Minimum Government, 즉 정부의 힘이 약하면 약할수록 질서가 유지되는 사회, 다른 말로 말해서 사회 질서가 워낙 잘 유지되어서 정부가 규제할 필요가 없는 사회를 항상 이상 사회로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법률을 따지지 않는 사회라면 오죽 좋은 사회겠습니까?

옛날에 연 임금은 워낙 나라를 잘 다스리니까 백성들이 임금이 누구인지를 몰랐다고 합니다. 이 신화적인 존재인 연 임금이 어느날 국민들이 어떻게 사는지 살피려고 시골로 보통 사람인 것처럼 가장을 해서 돌아다녔습니다. 그런데 어떤 마을에서 농부들이 격앙가를 부르고 있더랍니다. 격앙가란 말은 평화의 노래입니다. 농사일을 하면서 신나게 부르는데 그 노래 가사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고 합니다. “등 따시고 배부르니 우리한테 임금이 무슨 소용 있나?” 즉 연 임금이 나라를 워낙 잘 다스리니까 백성들은 임금이 소용 없다고 노래하더랍니다. 지금 서양에서 질서가 잘 잡힌 나라는 그와 같습니다.

네덜란드에서는 국민의 95%가 요한 크라오페라는 축구선수 이름은 아는데 수상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약 40%라고 합니다. 수상이 누구인지를 모릅니다. 스위스 국민의 60%는 대통령이 누구인지를 모릅니다. 사회질서가 워낙 잘 잡혀 있어서 정부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않기 때문입니다. 누가 대통령이 되었거나 누가 수상이 되었거나 상관없이 평화로운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정치가 불안하고 정부가 잘 못 다스리니까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을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이것은 사실 수치입니다. 대통령이 누군지 몰라야 좋은 나라입니다. 질서가 무너지면 약자가 고통을 당하기 때문에 우리가 질서를 세워야 되고, 질서를 유지하는 데 있어서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가장 적게 주면서도 질서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이 역시 윤리적인 질서입니다. 그래서 윤리라는 것은 인간 사회에 그만큼 절실히 필요하고 중요합니다.

기독교에서는 인간의 고통이 죄 때문에 온다고 믿습니다. 인간의 고통은 사실상 자연적인 재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인간으로부터 옵니다. C.S. Lewis는 영국의 아주 유명한 문학자요, 캠브리지 대학의 교수로서 40세가 넘어 개종을 했습니다. 그는 아주 은혜로운 책을 많이 썼습니다. 번역이 많이 되어 있습니다만, 평신도로서 그렇게 많은 영향을 끼친 그리스도인은 아마 별로 없을 것입니다. 그분이 쓴 책 가운데 「고통의 문제」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을 보면 인간이 당하는 고통의 4/5는 다른 사람에 의하여 가해진다고 합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고통이라는 게 대개 자연적인 재해 등으로 가해지는 줄 알고 있는데 그분은 거의 대부분이 다른 사람에 의해 가해진다고 보았습니다.

놀라운 것은 장애자들 단체에서 조사를 해본 결과 그들은 92%가 후천적으로 장애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보통 장애자를 대개 선천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선천적인 장애자는 한 7, 8%밖에 안 됩니다. 거의 대부분이 후천적입니다. 후천적이란 말은 인간이 잘못해서 장애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잘못해서, 인간의 책임에 의해서 장애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만 보아도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고통을 많이 주는가 하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윤리적으로 된다는 말은 무엇입니까? 아주 쉽게 말해서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주지 않고, 다른 사람의 고통을 줄이도록 행동하는 것이 윤리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질서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은 결국은 다른 사람의 고통을 줄이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구원의 종교입니다. 구원은 고통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병자들의 병을 고쳐주셨는데 그 병을 고치는 것도 구원과 관계가 있습니다. 구원이라는 말은 병고침을 받는다는 것과 같은 뜻을 담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1장 3~4절에 보면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고 말씀하십니다.

천국의 특징 가운데 아주 중요한 것은 아픈 것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곳에는 애통하는 것도 없습니다. 눈물도 없습니다. 그러나 땅 위에는 아픔이 있고 눈물이 있으며 고통이 있습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에 의하여 가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주는가 하면 죄 때문에 그렇습니다. 죄가 왜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주는가 하면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떠나서 불안해졌기 때문에 자기 힘으로 자기의 불안을 해소하려고 하다 보니 대부분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주게 됩니다. 그래서 구원과 고통, 윤리, 사랑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곧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주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셨고, 예수님은 우리 대신 고통을 당하셔서 우리의 고통을 제거하셨습니다. 고통과 사랑과 구원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윤리도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래서 ‘윤리적이 된다’는 말은 곧 ‘사랑한다’는 말과 연결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사랑할 때 직접 돕는 것도 사랑이고, 고통받는 사람을 위로해 주는 것도 사랑이지만, 우리가 윤리적으로 사는 것도 사랑입니다. 일반 학자들은 우리 기독교의 윤리관을 ‘신명론’이라고 부르는데 ‘신이 명령한 이론’이라고 해서 그렇게 부릅니다. 즉, ‘Divine Command Theory’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무엇을 명령했느냐에 대해서는 기독교 신학자들 사이에 두 가지 이론이 있습니다. 그 하나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율법을 주셨다고 하는 이론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율법주의자’라고 합니다. 영어로 ‘Legalism’이라고 하는데, 이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중요시합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랑을 명령하셨다고 하는데,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을 영어로 ‘Agape’, ‘Agapisim’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극단적인 ‘율법주의자’가 있고, 극단적인 ‘사랑주의자’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극단적인 율법주의자들은 거짓말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면 안 된다고 말합니다. 거짓말은 그 자체가 나쁘기 때문에 어떤 입장에서도 거짓말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암에 걸린 환자에게 의사는 암에 걸렸다고 정직하게 말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거짓말을 꼭 해야 될 때도 있습니다.

제2차대전 때 독일의 비밀 경찰들이 유대인을 잡으러 돌아다니는데 네덜란드에 경건한 농부 한 사람이 자기 집에다 유대인을 숨겨 놓았습니다. 그런데 독일 경찰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는 단도직입적으로 “당신집에 유대인 있소, 없소?”하고 물었습니다. 그 농부는 있다고 하면 유대인을 잡아가서 죽일 것이고, 없다고 하면 거짓말을 하는 것이기에 고민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아주 좋은 방법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책상을 꽝 치면서 “여기는 유대인 없소”라고 말했습니다. 독일 말로나 네덜란드 말로나 우리 말로나 아주 똑같이 번역할 수 있습니다. “여기는 유대인 없소!” 그렇게 해서 경찰이 “아, 유대인이 없나보다”하고 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나중에 하나님께 갔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야 이놈, 왜 거짓말을 했느냐!”하고 물으니까 “나는 책상에 유대인이 없다고 그랬습니다.”라고 대답했답니다. 이것은 전형주의적인 율법주의적 사고입니다.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거짓말을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제가 미국 신학대학에서 공부할 때 그곳에 조직신학 교수가 두 분 있었습니다. 그런데 두 분의 입장이 아주 달랐습니다. 그중 한 교수가 존 머리라는 아주 유명한 조직신학자인데, 그분은 어떤 경우에도 거짓말을 하면 안 된다고 하는 율법주의자였습니다. 주일도 얼마나 잘 지키는지, 토요일 저녁 12시가 되면 그때부터는 다른 일을 절대로 하지 않습니다. 하루는 한 학생이 교실 청소를 하다가 12시가 넘었습니다. 그가 칠판을 닦다가 그 교수에게 아주 혼이 났습니다. 신학생이 주일을 어기면 어떻게 하느냐고 야단친 것입니다.

그보다 조금 젊은 조직신학 교수는 이런 율법주의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강의 시간에 만약 공산주의자가 우리 집에 와서 아내를 약탈하기 위해서 나에게 “아내가 어디 있나?”고 질문을 한다면, 그 사람 표현으로 “나는 마귀처럼 거짓말을 하겠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결국은 그 젊은 교수가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Joseph Fletcher라는 소위 상황윤리를 주장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사랑 이외에는 아무런 다른 법이 있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최고의 법이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에 근거해서 행동을 하면 어떤 행위라도 그것은 죄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하여 크게 문제를 일으킨 적이 있습니다. Fletcher의 주장에 대해서 어떤 사람이 “네 이웃 사람의 아내를 사랑해서 같이 동침을 하면 되느냐?”는 질문을 통하여 비판을 했습니다.

저는 이 두 가지를 그렇게 서로 양극에다 세워 둘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십계명을 사랑으로 요약하셨습니다. 그래서 율법과 사랑이 대치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이 사랑을 실천하는 구체적인 방법이라고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율법의 밑에는 사랑이 깔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태여 사랑주의와 율법주의를 극단적으로 대립되는 서로 다른 것이라 생각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한 가지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우리는 근본적으로 사랑을 해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 사랑을 하는 방법도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방법대로 하는 것이 지혜롭다고 생각합니다.

십계명을 가만히 생각해 봅시다. 열 개의 계명 중에 하나님에 대한 계명은 세 가지 뿐입니다. 그렇다고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아닙니다. 첫째,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마라.” 이것은 아주 중요한 계명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우리 기독교는 설 자리가 없습니다. 둘째, “우상을 섬기지 마라” 이것은 첫째 계명과 너무나 밀접하게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이외의 다른 신을 두지 말며 우상을 섬기지 않아야 당연합니다. 세 번째, “하나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마라.”는 계명은 상식적인 것입니다. 그 다음 제4계명부터 제10계명까지는 모두 이웃에 관한 것입니다. 제4계명에 관하여서는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계명이라고 합니다만 저는 이 계명이 사람에 대한 계명이라고 봅니다. 신명기 5장에 보면 십계명이 다시 기록되어 있는데, 거기에 안식일이라는 것이 결국 다른 사람의 노예가 되어 있는 사람, 다른 집에 고용되어 있는 사람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4계명도 사람에 대한 계명이요, 그 뒤의 모든 계명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윤리적인 계명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만큼 기독교에서 윤리가 중요합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윤리를 따르지 않으면 그 사람은 조금 이상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십계명에서 3계명만 지키고 4계명부터 10계명까지는 안 지켜도 된다는 주장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기독교와 윤리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기독교를 고등 종교로 만드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고등 종교와 하급 종교의 차이는 윤리에 대한 관심도의 차이입니다. 고등 종교는 윤리에 관심이 많고, 하급 종교는 윤리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가 박태선교나 문선명교를 한번 자세히 분석해 보면 비윤리적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나라의 무속 종교에는 윤리적인 가르침이 별로 없습니다. 기독교가 만약 무속화되면 윤리적인 것을 무시하게 됩니다.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바울 사도가 말한 “믿음으로만 구원 받는다”는 것만 강조해서 그저 행동은 엉터리로 해도 믿기만 하면 된다고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믿음은 행함이 따를 수 있는 믿음이라야지 행함이 없는 믿음을 믿음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믿음은 행위가 따르는 믿음이라야 합니다. 그것이 성경의 일관된 가르침입니다. 믿음으로만 구원받는 것을 그렇게 강조한 바울 사도도 그의 모든 가르침의 후반부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바울 사도는 결단코 행함을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윤리를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요즈음 윤리는 과거보다 조금 복잡해졌습니다. 소위 ‘사회 윤리’라는 것이 최근에 대두되었습니다. ‘사회 윤리’라는 말은 아직까지 철학적 윤리에서는 전문적인 용어로 정착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기독교 신학에서 사회 윤리라는 말이 제일 먼저 거론이 되었고 지금도 기독교 신학에서 많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 신학이 한 발자국 앞섰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회 윤리적 사고방식은 일반 철학에도 있습니다.

그러면 사회 윤리와 그에 대조되는 개인 윤리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이것은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만 가장 중요한 것은 개인 윤리는 어떤 윤리적 원칙에 입각해서 그대로 행하면 윤리적이 된다고 생각하고, 사회적인 윤리는 그 결과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즉 어떤 행동의 동기, 다시 말해서 “나는 선한 동기로 선한 원칙에 따라서 행동하면 나는 윤리적으로 책임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개인 윤리의 특색이고, 사회 윤리는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오느냐?”는 것을 중요시합니다.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차이는 개인 윤리에 비해 사회 윤리가 윤리적 주체는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구조 집단, 그 자체도 지켜야 된다고 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개개인만 윤리적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구조도 윤리적인 책임을 질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가령 우리나라에서의 농촌 문제를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해서 부지런히 일하면서 낭비하지 않고 저축하면 잘살고, 투기하고 노름이나 하면 가난해진다고 상식적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농부들은 부지런히 일하고 노름하지 아니하며 낭비하지 아니하고 다른 사람보다 몇 배나 열심히 일해도 계속 가난합니다. 그에 비해 서울의 어떤 부동산 투기꾼은 열심히 일하지 않고 아침에 출근하지 않아도 집이 열 채, 외제 승용차 다섯 대 그렇게 화려하게 삽니다.

‘왜 부지런히 일하는 사람은 계속 가난하고, 아무것도 안 하고 골프만 치러 다니는 사람은 그렇게 잘사는가?’라는 의문이 생깁니다. 이때 우리는 사회 구조가 잘못되어서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구조가 잘못되어 있으니까 농부가 고통을 당합니다. 그리고 억울함을 당합니다. 아무리 일을 해도 가난하고, 어떤 사람은 아무것도 안 해도 잘삽니다. 그러면 우리는 단순히 ‘부자는 나쁜 놈이다.’ 이렇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정부의 제도가 잘못되었다. 세금 제도를 고쳐서 바르게 해야 제대로 되지, 지금과 같은 제도를 가지고는 윤리적이 될 수가 없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때 그 나쁜 제도를 누가 만들었느냐는 것을 따지는 것은 상당히 어렵게 되었습니다. 김 아무개가 만들었다. 이 아무개가 만들었다 하기에는 참 어렵습니다. 이 제도라는 것이 역사적으로 여러 사람에 의해서 오랜 시간을 두고 만들어졌기 때문에 누구 책임이라고 따져 말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철학에서는 사회적 구조를 어떤 개인에게 환원시킬 수 없을 때 그것을 사회 윤리의 문제라고 부릅니다.

한 나라의 세금 제도가 잘못되어 있으면 억울함을 당하는 자들이 생기고 착한 사람이 고통을 당합니다. 우리가 우리 사회를 윤리적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또한 고통당하는 사람을 없애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를 윤리적으로 만들고 우리 개개인이 착하게 살 뿐 아니라 윤리적으로 행동해야 하고 또 사회 구조도 고쳐야 합니다. 사회를 윤리적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사회윤리학자’라고 부릅니다. 사회 윤리의 문제는 오늘날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리나라에 부동산 투기가 왜 생깁니까? 제가 지금 ‘경실련’이라는 데에서 중앙상임위원회 의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만 경실련에서 우리가 정부에 제안한 것이 재산세를 높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줄기차게 주장합니다. 우리나라는 재산세를 일본사람의 1/10을 내고 있고, 미국의 1/100을 내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집을 하나 가지고 있으면 세금 때문에 고생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2억짜리, 3억짜리 집을 가지고 있어도 그것에 대한 세금은 자동차 조그마한 것 한 대 가지고 있는 것보다 1/3, 1/4 밖에 안 냅니다. 이렇게 우리나라의 부동산에 대한 세금은 얼토당토하지 않게 비합리적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돈 있으면 땅 사놓으려고 합니다. 집 사놓으려고 하지 왜 안 사놓겠습니까? 세금이 거의 없고 집 사놓고, 땅 사놓으면 그것이 가져다 주는 이윤이 엄청납니다. 사실 자동차 한 대 몰고 다닐 때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이윤보다 집 한 채 사놓았을 때 그것에서 생기는 이윤이 훨씬 더 큽니다.

제가 십여 년 전에 돌아다니면서 강연을 했습니다. “여러분, 돈 벌고 싶습니까? 땅 사놓으십시오.” 자신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비교육적인 말입니다. 저에게는 땅이 없는데 그것을 몰라서 제가 사놓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제가 20여 년 전에 써놓은 글이 있습니다. 앞으로 돈을 벌려거든 레저 산업에 투자하라는 내용입니다. 딱들어맞았습니다. 저도 돈 벌 줄 압니다. 그러나 지금은 다릅니다. 여러분, 땅 살 돈도 없겠지만 땅 사봐야 별 수 없을겁니다. 저는 요즘 돌아다니면서 “이제는 빨리 팔아가지고 선한 사업 하십시오. 안 그러면 정부가 다 빼앗아갑니다.” 그럽니다. 두고보십시오. 제가 오늘도 여러분에게 자신있게 말씀드리지만 앞으로 재산 많이 가진 사람은 별 재미 못 볼 것입니다. 또 제가 중심이 되어가지고 반드시 재산 가진 사람 손해보도록 만들겠습니다.

불로소득은 없어져야 합니다. 성경적인 원칙에 의하면 모든 소득은 반드시 노동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노동을 거치지 않은 소득, 소위 불로소득은 하나님 앞에 옳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땅을 사놓았다가 돈을 버는 것 그건 불로소득이니까 하나님께 바쳐야 합니다. 목사님들은 분명히 교인들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품꾼의 삯을 아주 강조하는데 그건 노동의 대가이기 때문입니다. 노동의 대가로 벌어들인 돈은 신성합니다. 성경에 동족끼리 이자도 받지 못하게 했지 않습니까? 우리 기독교는 중세까지 이자를 받지 못하게 했습니다. 이자는 불로소득이기 때문입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은행제도라는 것이 불가피하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이자를 인정하기는 합니다만 그러나 이자를 가지고 먹고사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바쳐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오늘날 단순히 개인이 도덕적으로 올바로 살아서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주지 않는 데 그칠 것이 아니라 사회의 잘못된 구조도 고쳐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것을 고치지 아니하는 것도 비도덕적입니다. 그런데 지금 현대인들은 이것에 대해서 너무 관심을 안 씁니다. 저는 이것이 참 안타깝습니다. 경실련 같은 곳에서 이것을 제안했을 때 우리 국민 전체가 호응을 해주면 정부가 안 바꿀 수 없습니다. 경실련을 처음 시작할 때 우리는 1,2년 내에 회원이 20만 명은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5,6천밖에 안 됩니다. 우리 국민들이 이와 같이 무관심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무임승차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앞장서서 고칠 것은 고쳐야 합니다.

저는 지금 공명선거실천 기독교대책위원회 실행위원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참 바쁩니다.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다 나서면 선거를 깨끗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불법선거운동하는 것을 고발하고, 더 나아가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똘똘 뭉쳐 불법선거운동하는 사람은 절대로 찍지 않는다고 선언만 하면 겁이 나서 아무도 불법선거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앞장서서 돈 받아 먹습니다. 정부가 해주기를 바라지만 정부가 안 해줍니다. 우리 국민이 압력을 넣을 때 비로소 합니다. 정부가 마음이 착해서, 정부가 도덕적이라서 ‘이번에는 공명선거 해야지’ 할 것 같습니까? 천만에요. 국민이 압력을 넣지 않으면 절대로 하지 않습니다. 국민이 압력을 넣어야 합니다.

본래 정부는 정치하는 단체고 정치하는 단체는 본래 도덕적일 수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모든 정부가 다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정치가에게 설교만 해 가지고는 별 도움이 안 됩니다. 정치가로 하여금 눈물 흘리고 회개하고 깨끗하게 정치하도록 한다는 것은 환상입니다. 이 말은 제가 한 말이 아니라 유명한 사회학자 막스 베버가 한 말입니다. 정치라는 것은 죄송한 표현이지만 도덕적으로 더러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치가에게는 압력을 넣어야 합니다. 압력을 넣되 수의 힘으로 넣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정신을 바짝 차리면 우리 한국 사회를 뒤집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무임승차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이게 안 되는 겁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목사님들, 전단도 만들고 플래카드도 만들고 사무실도 만들어 여러 가지 정의를 위한 사업을 하기 위해 돈이 필요하니 도와주십시오”라고 하면 큰 교회에서 2만 원, 3만 원 보내줍니다. 돈이 안 들어옵니다. 지금 빚을 한 3,4백만 원 지고 있습니다.

정부는 돈을 주고 싶어서 어쩔 줄을 모릅니다. 제가 하고 있는 기독교 실천 운동에도 정부가 돈 주겠다고 그럽니다. 돈 받으면 참 편합니다. 그러나 정부가 주는 돈을 받아 가지고 어디 공명선거운동하고, 윤리운동을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호주머니에서 끄집어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십시 일반으로 한 분이 백 원씩이라도 내주면 깨끗하게 일을 할 수가 있는데 다른 데는 돈을 잘 쓰면서, 교회에서 식사하는 데는 비싼 음식을 먹고, 회의할 때는 일류호텔에서 하는데 정말 우리 사회를 위해서는 너무 인색합니다. 얼마나 안타까운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무임승차하지 말고, 다른 사람 의존하지 말고 앞장서서 우리 사회를 고쳐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만 이 땅 한반도의 고통이 줄어듭니다.

우리 윤리학에서는 많이 알려진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미국의 조그만 한 도시에서 어느날 오후, 키티 제노베이스라는 16살 먹은 소녀가 괴한으로부터 얻어맞았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윤리학에서는 ‘키티 제노베이스 사건’이라 합니다. 그 16살 먹은 소녀가 괴한으로부터 30분 동안 얻어맞았는데 그 옆 아파트 주민 38명이 30분 동안 그걸 보고 있었습니다. 그중에 한 사람도 나가서 말리지 않았고 한 사람도 경찰에 보고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소녀는 죽고 말았습니다. 왜 이 사람들이 경찰에 보고도 하지 않고 신고도 하지 않았습니까? 창문을 열고 보니까 모두 고개를 내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많은 사람 가운데 그래도 한 사람이야 보고하겠지. 꼭 내가 해야 되나?’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38명이 똑같은 생각을 한 것입니다. 결국 그 소녀는 죽고 말았습니다.

뉴욕 지하철에서 어떤 깡패가 젊은 아이를 두들겨팹니다. 승객들이 쭉 앉아있는데 그 한가운데서 두들겨팹니다. 그리고 지갑을 빼앗습니다. 승객 가운데 젊은 사람들이 더러 있었는데 가만히 보니까 그 강도가 너무 기운이 센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자기 혼자서 달려들어 가지고는 도저히 안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모두 기다리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뛰면 나도 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모두 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안 뛰었습니다. 기차는 그 다음 역에 서고 문은 열리고 강도는 천천히 지갑을 가지고 내렸습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의 상황입니다. 후자의 경우는 그래도 가능성이 있습니다. ‘누가 뛰면 나도 뛰겠다’는 생각인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혼자서 잘 뛰시오.’ 그럽니다.

제가 돌아다니면서 이 이야기를 하면 모두 다 “그거 참 좋은 일이네요. 꼭 해야지요.” 그럽니다. 그런 말 하지 않는 사람 한 사람도 못 보았습니다. “같이 합시다.”, “아이, 잘해보십시오.” 그럽니다. “다음에”, “나는 조금 바빠서”, “나는 다른 데 할 일이 많아서”라고 토를 붙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사회가 이렇게 무질서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고칠 것이 너무너무 많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조금만 뭉치면 얼마든지 고칠 수 있는데도 그걸 못 고치고 있습니다.

우리 한국 교회의 윤리적 약점은 다음 두 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무속 신앙의 영향이 우리 한국 기독교에 너무 깊이 들어와 있다는 것입니다. 무속 신앙은 도덕성이 없습니다. 이것이 하급 종교의 특색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만 무속 종교는 종교 가운데서 가장 원시적인 종교이고 가장 하급 종교입니다. 무속 종교에서는 그 사람이 윤리적으로 행동해서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운수가 좋아서 복을 받는다고 합니다. 운수, 이것이 우리 나라 국민성 가운데 깔려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재앙을 받으면 그 사람이 나쁜 짓을 해서 벌을 받는 것이 아니라 재수가 없어서 벌을 받는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복을 받으려고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무당을 통해 귀신한테 뇌물을 주어서 그 귀신을 기분 좋게 만들어 가지고 복을 받으려 합니다. ‘어디 가서 호박씨나 물어와 그저 금덩이나 많이 가져다 줘라.’ 이런 생각들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한국 교회에서도 많은 교인들이 그런 식으로 연보를 합니다.

연보를 왜 하느냐? 유명한 콘스탄틴 대제가 ‘DOS UT DEPS의 원칙’을 말했습니다. 이것은 라틴어인데 영어로는 ‘I give you so that you give me, 내가 이만큼 드리니까 나에게 주십시오’입니다. 이것이 콘스탄틴 대제의 원칙이었고 어거스틴은 그것을 아주 심하게 비판했습니다. 오늘 한국 교회의 연보가 이 원칙에서 하는데 불행하게도 단순히 ‘내가 연보한 만큼만 주십시오’하는 것도 아니고 30배, 60배, 100배를 달라고 합니다. 저는 이들을 사기꾼이라고 봅니다. 그런 불의한 강요가 어디 있습니까? 적어도 재물에 관한 한 부지런히 노동을 해가지고 노동의 대가로 받아야 합니다. 성경에 ‘30배, 60배, 100배’는 물질적인 축복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영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지금 무속 신앙이 들어와 한국 교회 노동관을 다 망쳐 놓았습니다. 정직하게 일하고 그것으로부터 받는 대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고 그저 기도해서 30배, 60배, 100배 물질적인 축복이나 받겠다고 합니다.

여기에는 윤리가 들어 설 자리가 없습니다. 하급 종교의 영향이 한국에 들어와서 윤리가 들어갈 자리가 없어졌습니다. 그 무슨 착한 일을 해서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잘 보이면 복을 받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잘 보이는 방법이 기도이므로 기도를 합니다. 기도를 무시하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기도는 우리 기독교인의 생명입니다. 그러나 그런 목적으로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방법이 아닙니다. 이것이 우리 한국 교회의 도덕 수준을 굉장히 낮추어 놓았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땅 위에서 도덕적으로 모범을 보이고 있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의 약점은 자유주의 신학에서 옵니다. 그동안에 자유주의 신학은 정치적인 구조만 바꾸어지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된다는 소위 구조 결정론적 사고 방식을 심어놓은 것입니다. 그리하여 한국 사람들의 책임의식을 망가뜨려 놓았습니다. 교인들이 땅 위에서 정직하게 사는 것에 대해서 관심을 안 쓰고 정치 구조를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정치 투쟁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필요하면 정치 투쟁도 해야 합니다. 그러나 개인의 윤리적 책임을 너무나 무시하고 구조적인 것에만 집중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회학자가 얼마 전에 글을 썼는데 “한국 사람이 길가에 침을 뱉고 버스를 탈 때 줄을 서지 않는 것은 줄을 서지 않는 구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그게 일류대학의 사회학 교수가 쓴 것입니다. 그것을 읽고 사람들이 무엇을 느끼겠습니까? ‘줄을 안 선 것은 내가 잘못한 것이 아니구나’하면서 더 신나게 줄을 안 설 것 아닙니까? 길가에 침을 뱉고서 조금 가책을 받다가도 ‘아, 내가 나빠서 그런 것이 아니구나. 이건 구조가 잘못되어서 그렇구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개인의 선행, 윤리적인 선함을 부르짖는 것을 부르조아적 사고방식이며 개인주의적, 낭만주의적, 감상주의적 사고방식이라며 정치적인 구조를 바꾸어야 한다고 합니다. 이건 막스주의의 영향입니다.

Ⅲ. 결 론

저는 우리 한국 목회자들이 도덕적으로 받는 유혹이 세 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돈에 대한 유혹이고 하나는 성에 대한 유혹이며 다른 하나는 명예에 대한 유혹이라고 생각합니다. 목사님들이 이 세 가지 유혹을 극복하지 못하면 성경적인 성공은 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목회자들을 가장 추하게 만드는 유혹입니다. 이것은 구조를 탓할 것이 아닙니다. 다른 무엇을 탓할 것이 아니라 철저한 자기 반성과 자기 훈련과 노력을 통해 극복해야 훌륭한 목회자가 될 수 있습니다. 저는 평신도의 한 사람으로 호소를 합니다. 목사님들이 이 세가지의 유혹만 극복할 수 있다면 우리 사회에 대단한 영향을 끼칠 것이며 또한 목사님들이 전하시는 메시지는 큰 힘을 가질 것입니다.

목회자는 그 사회의 윤리적 모형이므로 엄청난 교육적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윤리적으로 모범이 되지 못한 목회자의 목회는 진정한 목회가 아니며 이러한 것은 하나님과 교회를 위하여 중단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