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장. 치유사역을 위한 실제적인 능력
제 1절. 치유사역을 위한 은사
치유사역에서 성령의 은사 없이는 신유의 사역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이 은사가 어떤 것인가 다시 한번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오늘의 성령운동에 참여하는 많은 신학자들 가운데 영국의 성령운동가 도날드 지(Donald Gee)와 독일의 성령운동의 기수 아놀드 비틴저(Arnold Bittlinger)와 많은 신학자들이 이제까지의 은사에 대한 생각이 잘못 되었다고 보고 있으며 실제적으로 목회의 일선에서 사역하는 많은 분들이 현실과 맞지 아니하는 많은 부분들이 있음을 실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본인도 이러한 사실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만약에 우리들이 은사에 대한 그릇된 선입관에 우리의 생각이 잡혀 있고 목회 사역에 제약을 받고 있어서 활용하지 못하거나 성령의 역사를 제한하거나 소멸시키거나 은사의 개발에 장애가 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원하는 뜻이 아니오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는 불의를 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죤 윔버 목사도 은사에 대한 개념을 분명히 알고 난후 영분별의 은사를 개발하여 치유사역에서 놀라운 역사를 일으키는데 성공하고 있다고 많은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죤 윔버 목사의 선배 교수였던 교회 성장학 교수 피터 와그너 박사도 죤 윔버 목사와 가장 친밀했고 잘 알며 믿을 수 있던 동료 였음에도 불구하고 치유의 은사 활동이 배워서 된다는데 의문을 가졌던 사람이 였습니다.
그러나 현장을 참관한 결과는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사실로 나타났고 자신도 은사를 활용하여 놀라운 치유의 기적을 일으키며 ‘고도로 발달된 은사 갱신운동 즉 “성령의 제 3 의 물결”이 세계적으로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 했습니다’
제 2절. 은사에 대한 개념의 정리
“은사(카리스마타)는 여러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디아코니아)은 여러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역사(에네게마타)는 여러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파네로시스)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4-7)
“어떤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이에게는 한성령으로 병고치는 은사를 어떤이에게는 능력행함을 어떤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나누어 주시느니라”(고전12;8-11)
은사에 대한 개념이 오늘날까지 혼란된 이유는 용어에 대한 개념을 분명히 하지 못한데 원인이 있다.
고전12;8-11에서 ‘어떤 이’에게 주어지는 것 9 가지는 고정적으로 주어지는 디아코니아(직임)가 아니라 유동적으로 주어지는 파네로시스(성령의 나타남)이다. 우리들이 주로 ‘은사’라고 불렀던 용어는 성령의 은사들 가운데 ‘성령의 나타남’이라는 용어가 더 정확하다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것을 ‘은사’라 부름으로 ‘직임’으로 주어지는 은사의 개념과 혼동하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첫째 혼란의 한가지 원인은 롬12;6에 기록된 은사는 직임(디아코니아)을 말하는데 ‘예언이라는 은사가 여기에 사용되었기 때문에 고전12;7의 예언(파네로시스)와 같은 것으로 보았으며 은사의 분류를 ‘직임’과 ‘나타남’을 동일하게 보는 혼란이 일어나고 은사의 개념이 흐려졌다. 초대 교회에서는 은사가 강하게 일어났고 또 이러한 은사 자들이 자신들의 은사를 직분으로 활동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로마서 12장에 나오는 예언의 은사는 이러한 사역자체를 말하고 있으며 또는 직임을 가지고 사역하는 사람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고전 12;7의 ‘성령의 나타남’을 고정적으로 나누어주는 ‘직임’과 같은 것으로만 생각하는 고정 관념의 틀에 박혀서 ‘은사’라고 불러 버리고 말았다.
둘째 혼란의 이유는 고전12;28에 나오는 ‘병 고치는 은사’‘방언’이라는 은사가 고전 12;7의 은사와 똑 같은 개념으로 사용된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특별히 여기에서는 뒤에 계속되는 고전12;30의 나오는 문맥을 보면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 ‘방언을 말하는 자’‘통역하는 자’라고 분명히 ‘직임(디아코니아)’을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전12;7의 은사(나타남)와 동일한 의미로 보았기 때문에 고전12:30 절의 다른 은사 즉 사도와 선지자와 교사와 같은 고정적인 개념으로 이해하게 되고 고전 12;7의 ‘병 고치는 은사’도 고정적으로 주어진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물론 성령이 계속적으로 역사하면 고정적으로 보이겠지만...
셋째 고전 12;31의 “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는 이 용어 때문에 어떤 사람에게는 큰 은사를 주고 어떤 사람에게는 적은 은사를 주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성경 해석의 기본 원칙상 문자 적인 의미가 ‘나타남’이라면 문맥적으로나 성경 적인 전체 맥락에서도 일치해야 하는데 사도 바울은 고린도의 교인들이 자신의 은사가 더 큰 은사라고 자랑하는 교인들을 깨우치기 위하여 서신을 보낸 뜻은 분명히 큰 은사 적은 은사가 없다는 것을 말하기 위한 것인데 어찌하여 이곳에서 큰 은사를 사용했을까?
어찌하여 모든 주석들은 한결 같이 큰 은사가 13장의 사랑이라고 주석하고 있거나 침묵을 지키고 있을까 도저히 풀리지 않는 수수꺼기는 성령의 나타남이라는 개념에 대하여 확증하기 어려운 문제 였습니다.
원어주석을 조사해 보아도 큰 은사로 주석하고 있습니다 영어 성경은 모두가 한결 같이 큰 은사로 표기하고 있으니 과연 나의 성경 해석이 잘 못 되었는가 하고 이를 위해 고심하던 중 어느 날 새벽 예배를 위해 일어났지만 잠이 들깬 비몽사몽간의 순간에 번개처럼 지나가는 빛은 ‘큰 은사’라는 용어의 “큰”이라는 단어는 “형용사가 아니라 부사다”라는 말씀으로 내 심령에 크게 들리는 것입니다.
벌떡 일어나 성경을 다시 읽어보니 그것은 분명 형용사로 기록은 되었지만 우리들이 일상생활 가운데서 그런 용법이 얼마나 흔하게 사용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문자로 기록하는 표기법은 우리들이 흔히 사용하는 구어 법과 다를 때가 많다 우리는 뜨거운 것을 먹으면서도 ‘시원하다고 말할 때가 많은 것이다.
‘큰 사람이 되라’하는 말은 키 큰 사람이 되라는 말이 아니라 뜻을 높이 세우고 ‘크게 살아가라’라는 거와 같이 ‘너희는 더욱 은사를 크게 사모하라 그리하면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보이리라’ 이렇게 해석하면 전후 문맥에도 일치하고 고전 12장의 개념과도 성경 전체의 개념에도 일치하며 ‘성령의 나타남’이라는 개념과도 일치한다. 여기서는 형용사 용법으로 사용되었지만 ‘큰’은 형용사가 아니라 ‘크게’라는 부사라야 됩니다
‘큰’이라는 헬라어의 원어인 ‘메이조나’이가 어디에서 또 사용되었나 조사하니 이와 같이 사용된 원어는 마태복음 20;31에서 바디메오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에서와 같이 부사로 사용된 곳이 있으니 더욱 분명해 졌습니다.
헬라어 사전 “The Greek New Testment,Dictionary third edition.United Bible Societies” no 3187에 분명히 meizon;adv all the more 더욱 크게라는 비교급이나 최상급으로 설명하고 있고 A Concordance to the Greek Testament 에서도 분명해 졌습니다.
넷째 다음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는 고전 12;11절의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나니”라는 말은 은사가 주어지는 결정적인 개념으로 보이는데 ‘그 뜻대로 나눠주시는 것’이라는 11절의 뜻이 ‘성령의 나타남’과 어떻게 일치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언어(言語)와 문자(文字)는 항상 양면성을 가진 용어가 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 편에서 보면 절대적인 주권 적인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지만 인간 편에서 보면 ‘순종’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나눠주는 것은 성령님의 입장에서는 나눠주는 것이요 나누어주시는 것을 받는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나타남’인 것입니다.
‘주어지다’의 헬라어 ‘디도타이(didotai)’는 현재의 계속적인 긴장상태를 나타내고 있다. 즉 성령의 나타남은 단 한번 주시는 것으로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 유동적인 상태로 주어진다는 것이다(아놀드 비틀링거著 정인찬 조원길 공역“은사와 은혜” 기독지혜사 1982년판 25p)
그러므로 항상 주어진 고정적인 상태의 이미 주어진 은사의 개념이 아니고 각 사람의 영으로부터 ,혼을 통하여,육신을 뚫고 외적으로 나타나는 개념으로 이해되기 위하여는 위의 네 문제가 다 해결되어야 하는데 우리들이 주로 ‘은사’라고 부르는 고전12;7의 ‘성령의 나타남’이란 것은 분명 한사람에게 한번 주어지면 계속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어떤 영적 조건과 상태에서 유동적으로 주어진다는 것이 분명해 졌습니다.
안개 속에서 안개가 걷히고 은사(나타남)의 개념은 분명해진 것입니다. 우리들이 흔히 은사라고 하는 고린도 전서12:7의 은사는 특별하게 어떤 사람에게만 고정적으로 주어진 “디아코니아”가 아니라 성령 받은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내주 하시는 성령께서 인간의 영과, 혼과, 육신을 뚫고 수시로 나타나기도 하며 때로는 소멸 되기도 하는 “파네로시스”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성령이 나타나시는 이러한 현상들을 통하여 과거에는 특별하게 기름 부으신 선지자를 통하여 여러 가지 하나님의 신비와 능력을 나타내시고 신약에는 약속의 성령으로 인침을 받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통하여 들어내시는 것입니다 신약의 성도는 택하신 족속이요 제사장들이며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으로 성령을 통하여 누구든지 하나님과 직접 통할 수 있어서 하나님으로부터 말씀과 능력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 초기에는 하나님의 신의 감동이나 이상들이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나타났고 이러한 하나님의 신에 감동을 받았던 사람들은 일반적인 사람들을 초월하는 지혜와 능력으로 하나님의 신령한 사역들을 감당하여 엘리야나 엘리사 같은 능력자가 되기도 했고 예레미아와 미가와 사무엘과 같은 선지자가 되기도 하고 요셉과 다니엘과 같은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 축복의 사람이 되기도 했다. 나중에는 이것이 제도적으로 기름 붓는 의식을 통하여 왕이나 제사장이나 선지자와 같은 직책을 부여했다.
이렇게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만 나타내시던 내적인 성령의 기름부음을 통한 성령의 나타남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고서 성령을 소멸치 않은 신약의 모든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든지 다 이 성령의 나타남이 있게 되어 있고 또 나타나야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일군이 됩니다. 성령이 나타내시는 여러 가지 신령한 성령의 기름부음이 없이 하는 사역은 인간이 하는 사역입니다. 인간은 율법을 지킬 수도 없고 사람을 변화시키지도 깨닫게도 할 수 없습니다. 성령만이 하나님께로 인도 할 수 있고 성령만이 율법을 지킬 수가 있고 성령과 더불어 하는 사역 즉 성령이 나타나는 사역만이 참되고 거짓이 없는 하나님의 참된 사역입니다.
(엡3:5)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같이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게 하지 아니하셨으니
(벧전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요일2:27)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고전12:7절의 “성령의 나타남’은 각 사람의 영적 기질과 영성에 따라 ‘나타남’의 형태나 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요 우리들의 심령의 영적인 어떤 조건과 상태 하에서 나타난다고 보는 것이 상식적이요 목회선상의 실제 경험과도 일치하는 것이다. 성경 해석학 상에도 문제가 없으며 실제적인 여러 현상들과도 일치하며 문자적, 역사적, 성경적, 신학적인 종합적 해석에도 전혀 하자가 없음이 분명해 졌고 모든 맥은 뚫렸으며 해답은 주어 졌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은사는 특별한 사람에게 특별한 사명을 감당하게 하기 위하여 주시는 것”이라는 정의는 잘못 되었으며 성령이 임재하시고 내주 하신다면 이러한 성령의 역사는 당연히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이와 같이 은사에 대한 개념이 잘못 되었기 때문에 성령의 나타남을 제한해 왔고 은사를 받고도 의식하지 못하거나 활용한다는 생각이나 개발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상상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비 성경적이라고 까지 생각해 오기도 했다. 그러므로 먼저 용어의 개념들을 다시 한번 정리하고 우리들이 말하고 있는 은사가 무엇인가? 분명하게 정의를 내리자
1.은사(카리스마타);
교회의 지체들에게 주어지는 은혜의 선물을 말할 때 사용하는 용어로서 능력의 근원이 되는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결과를 나태 내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전 12:4-11).
(롬1:11)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 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함이니
(롬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롬12:6)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고전7:7)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하나는 이러하고 하나는 저러하니라
2.직임(디아코니아);(역사)
이 용어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사가 직책으로 사용될 때에 사용되는 용어이다 주어진 각종 은사를 주로 사용하는 은사 자를 말하여 직임을 맡은 자라하며 이를 은사별로 분류하여 사도,선지자, 목사, 교사, 복음전하는 자, 능력자(귀신 축사자), 병고치는 자(신유사역자), 서로 돕는 자(봉사자), 다스리는 자, 방언을 말하는 자 등으로 말하고 있다(고전12:28)
(민7:5) 그것을 그들에게서 받아 레위인에게 주어 각기 직임대로 회막 봉사에 쓰게 할지니라
(민9:23) 곧 그들이 여호와의 명을 좇아 진을 치며 여호와의 명을 좇아 진행하고 또 모세로 전하신 여호와의 명을 따라 여호와의 직임을 지켰더라
(대하31:2) 히스기야가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의 반차를 정하고 각각 그 직임을 행하게 하되 곧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며 여호와의 영문에서 섬기며 감사하며 찬송하게 하고
(고전12:5)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고전 12:28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
엡 4:11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교회의 직분은 보이는 유형적인 교회의 행정적인 직책이라면 직임은 보이지 않는 무형적인 교회의 영적인 신령한 직책이다.
사도:
눅 6:13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행 1:2 그의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행 1:25 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를 보이시옵소서 유다는 이를 버리옵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 하고
선지자:
민 11:29 모세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위하여 시기하느냐 여호와께서 그 신을 그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민 12:6 이르시되 내 말을 들으라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이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
삼상 9:9 (옛적 이스라엘에 사람이 하나님께 가서 물으려 하면 말하기를 선견자에게로 가자 하였으니 지금 선지자라 하는 자를 옛적에는 선견자라 일컬었더라)
삼상 10:5 그 후에 네가 하나님의 산에 이르리니 그 곳에는 블레셋 사람의 영문이 있느니라 네가 그리로 가서 그 성읍으로 들어갈 때에 선지자의 무리가 산당에서부터 비파와 소고와 저와 수금을 앞세우고 예언하며 내려오는 것을 만날 것이요
삼상 10:10 그들이 산에 이를 때에 선지자의 무리가 그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신이 사울에게 크게 임하므로 그가 그들 중에서 예언을 하니
왕상 13:20 저희가 상 앞에 앉았을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 사람을 데려온 선지자에게 임하니
3.역사(에네게마타);
이 용어는 은사가 힘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나 작용하는 과정을 말 할 때 사용하는 용어로서 하나님의 활동하시는 사건을 말할 때 사용되어지는 용어이다
(막16:20)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쌔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시니라)
(롬15:18)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케 하기 위하여 나로 말미암아 말과 일이며 표적과 기사의 능력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
(고후4:12)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 하느니라
(엡1:20)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 편에 앉히사
(엡3:7)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군이 되었노라
(엡3:20)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골1:29)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살후2:9)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약5:16)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4.성령의 나타남(파네로시스);
하나님의 신령한 여러 가지 역사가 성령을 통하여 나타나는 현상이나 결과를 말할 때 사용하는 용어로서 성전 삼고 내주 하시는 성령님이 각 사람의 영을 통하여 사람들이 혼(이성,감정,의지)이나 육신이 지각되어지는 현상을 말할 때 사용되는 용어이다
(요14:21)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눅22:43)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
(행2:43)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행8:13) 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 다니며 그 나타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라니라
(고후4:10)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제 3절. 성령의 기름부음과 성령의 나타남
(요일2:20)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고후13: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성령과의 영적인 교통이나 교류는 성령과 인간의 영이 서로 통하게 되어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는 것이기에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여러 가지 신령한 일이나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뜻이나 능력이나 사랑이나 지혜나 지식이나 믿음이나 신유나 말씀........등이 인간의 영에게 전달되어지거나 사람의 심령의 여러 가지 기쁨이나 슬픔이나 문제들이 성령에게 전달하거나 하소연하거나 하는 것이 성령과의 교통이라 할 것입니다.
이 성령과의 교통이나 교류는 성령 측에서는 성령의 기름부음이라는 현상이나 성령의 나타남이라는 현상과 인간 편에서는 기도라는 수단과 방편을 통하여 쌍방간에 이루어지는데
성경에서 성령의 기름부음이라는 것은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 왕을 세우거나 제사장을 세우실 때나 선지자를 세우실 때에 하나님 편에서 인간에게 하시는 일을 표현할 때에 이같은 용어를 사용하였다. 이 같이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이 선지자나 제사장이나 왕을 선택하고 직접 임명하고 성령을 부어주는 형식을 취하거나 제사장을 통하여 권위를 인정하는 형식적인 절차를 택하실 때 사용되어지는 용어이지만 신약시대에서는 성령이 인간의 영과 접붙임(요15:1-10) 받은바 되어 있기 때문에 성령의 기름부음 즉 성령의 흐름이 인간의 영으로부터 혼이나 육신으로 전달되어 지거나 전이되어지는 현상을 말한다.
이러한 성령의 흐름이 영과, 혼과, 육신을 뚫고 나타나는 그 과정을 신약 성경에서는 성령의 기름부음이라는 용어로 사용되어지고 있습니다. 이 성령의 흐름의 결과로 나타나는 여러 가지 현상을 은사라 하고 나타나는 결과들을 열매로 말하고 있으며 그 형태의 여러 가지 모습에 따라서 직임이나 역사나 성령의 나타남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그 여러 가지 성령 사역의 형태나 모습 가운데 성령의 흐름이 우리들의 이성이나 감정이나 의지에 지각되어지거나 육신이 지각되어지는 현상을 성경에서는 “성령의 나타남”이라(고전2:4-5,12:7)고 표현하고 이 성령의 나타나는 현상을 우리들은 넓은 의미에서는 하나님의 “은사”이기 때문에 우리들은 이 성령의 나타남을 속칭 “은사”라 부르기도 하는 것이다.
성령의 나타나심을 주심은 성령께서 신앙생활의 유익과 축복의 유익을 가져오도록 하신다고 하는데 (고전12:7) 우리들에게 ‘지혜‘를 주시어 신령한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정과 성령의 사역을 알게도 하시고 ’지식‘ 즉 사람이 이성으로 알 수 없는 직관적인 지식이나 영감을 통하여 어떤 사실을 알게 하거나 하며 성령이 우리의 마음에 부은바 되고 성령에 감동되어 ’예언‘의 말씀을 받게 하시고 우리의 입술을 통하여 영의 기도인 ’방언‘을 하게 하며 이 영의 기도인 방언을 알아듣는 ’통변‘을 하게 되고 성령의 흐름이 육신을 통하여 나타나는 능력으로 ’병을 고치기‘도하며 이 성령의 흐름이 입으로 나오는 말이나 손이나 몸을 통하여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을 주시기도 하며 인간이 스스로 주장하는 믿음이 아니라 성령께서 주시는 ’믿음‘(하나님께서 주시는 확고 부동한 믿음)으로서 기적을 일으키기도 한다.
이러한 성령의 기름부음이 입술을 통하여 나타나면 방언이 되거나 통변이나 예언이 되어 흘러나오고 성령의 기름부음이 사역자의 손을 통하여 나타나면 환자에게나 다른 사람에게 전이(안수)되어 치유나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거나 능력이 임하여 넘어지게도 되는 것이다. 또한 성령의 기름부음이 영을 통하여 혼에 부어지면 우리의 이성은 성령의 가르침(영감)을 받고 성경의 뜻을 원래의 의미대로 이해 하게 되거나 하나님이 주시는 개인에 대한 뜻이나 응답이나 하늘의 비밀이나 진리를 알게 된다.
(요일2:27)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요16:13)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러므로 우리들이 흔히 ‘은사’라고 말하는 고전 12;7의 ‘성령의 나타남’은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성령의 흐름이 차단되어 우리들이 지각하지 못하거나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우리들 자신에게 여러 가지 성령께서 나타나기에 부적합한 장애가 있기 때문이다. 성령의 나타남이 없으면 인간의 육성이 나타나게 되는데 이러한 육성을 “죄”(롬7:20)라 하며 이 죄가 영적인 능력으로 나타나는 현상을 “악”(마5:37)이라하고 이 죄와 악의 열매는 성경에서는 “육체의 일”(갈5:18-19)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은사란 한편으로는 개발 (성령 사역에대한 이해와 연구) 되고 몸을 쳐서 복종시키는 훈련( 기도와 십자가에 육을 죽임)으로 우리들의 혼과 육신이 영성화 되어져야 한다.
(롬 7:20)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마 5:37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갈 5:19)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갈 5:20)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갈 5:21)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갈 5:22)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 5:23)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갈 5:24)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갈 5:25)
문제는 다만 성령의 역사가 “어느 때” “어떤 조건”과 “어떤 상태”에서 나타나는가? 하는 문제와 이 은사가 “어떻게” 구체적인 현상으로 나타나며 “누구에게” 어떻게 인식되어지는가? 그리고 “왜”? 나타나느냐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이 나타나는 상태와 조건”이 되도록 어떻게 기도하고 어떻게 훈련하는가 하는 문제만 남았습니다.
이 말을 성경 적으로 표현하면
우리가 어떻게 성령을 쫓아 살며 어떻게 인도함을 받으며 어떻게 성령께서 우리를 도우시는가를 깨달으며 우리들이 어떻게 인식되어지고 느껴지며 알게 되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가 성령과 어떻게 교통하는 하여야 하는가를 알아서 성령의 사역과 도우심을 통하여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며 성령 사역과 기름부음을 통하여 인간적인 육신적인 신앙생활이 아니라 영적인 신앙생활을 하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 몸을 성전 삼고 내주 하시는 성령을 어떻게 대접하여야(마7:12) 슬퍼하시지 않고 근심하지 않으시는가 하는 것이며 성령께서 어떻게 기름 부으시며 우리들이 인식 할 수 있도록 나타나시는가 하는 것이며 어떻게 하는 것이 계명을 지키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인가(요14:21)를 아는 것이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마 7:11)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마 7:12)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요 14:21)
기도는 은사(성령의 나타남)의 개발과 훈련의 과정이며 방편입니다 은사는 크게 사모하여 부르짖고 구하며 찾고 두드리는 자에게는 주시고 나타난다.
(마7:7)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마7:8)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마7:9)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마7:10)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마7: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마7: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성령)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성령)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역자 주: “그러므로”라는 단어는 두 문장을 연결하는 접속사로서 윗 문장의 결론을 내리는 말로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마태복음 7장 7절에서 12절 까지는 하나의 문맥으로 보아야하며 7-11을 기도하면 무엇이든지 좋은 것을 주신다는 뜻으로 해석하고 12절의 말씀을 기독교의 윤리 강령으로 보면 영적인 눈이 열리지 않은 육신적인 차원의 해석입니다
그러므로 두가지 뜻이나 문장으로 해석함은 성경 해석법상 잘못된 것이요 상식에서 벗어난 해석입니다
성경적인 정확한 해석은 위의 7-11절의 “구하고 찾고 두드리면 주시는 ”좋은 것”은 성령을 의미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마가나 누가의 다른 공관 복음에는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라는 표현을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라는 말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령은 가장 좋은 것이요 마음 밭에 감추어진 보화인 것이며 하나님의 비밀과 영광을 아는 빛이며 천국의 모든 축복을 누릴 수 있는 천국을 여는 열쇠이요 우리가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열쇠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받았지만 성령이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자기 자신의 장애와 성령을 대접하지 않고 임재하신 성령을 방치하고 내주 하시는 성령님께 관심을 갖지도 않고 그를 슬프게 하고 근심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마7: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성령)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성령)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그러므로 은사의 개념이 특별한 사람에게 특별한 사명을 위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은사로 생각해서는 특별한 사명을 받지 않았다는 자기 변명만 하면 되는 것이니 성령이 자신의 내부에서 역사하지 않는 것도 별로 부끄럽게 생각할 필요가 없게 되고 성령의 역사 하시는 여러 가지 현상에 대하여 느끼지도 지각하지 않아도 하등의 거리낌이 없는 성령에 대하여 무감각한자가(업4:19) 되고 지각이 둔 한자가(히5:14) 되어 은사가 나타나지 않거나 은사가 소멸하게 되어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는 자가 된다.
갈 3:3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엡 4:14)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엡 4:15)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엡 4:16)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엡 4:17)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엡 4:18)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엡 4:19)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엡 4:20)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같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엡 4:21)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엡 4:22)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엡 4:23)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엡 4:24)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 (엡 4:25)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엡 4:26)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엡 4:27)
제 4절. 그러므로 은사는 성령님이 주시는 것이지만 받는 인간 편에서는 개발되고 훈련 되어져야한다.
성경 해석이 문자 적인 해석과 역사적 그리고 성경적 해석이 일치해야 온전한 해석이라고 할 것입니다 문자 적이거나 문맥적인 관점에서 보아도 ‘큰 은사’란 의미가 성경이 원래 지적하고자 하는 뜻이 아니다. 성경이 원래 말하는 바는 고린도 교인들이 서로 자기의 은사를 자랑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면서 사도 바울은 이 서신을 기록 하였기 때문입니다.
‘큰 은사’ ‘적은 은사’가 없고 은사는 사람마다 직임이나 직책이 다를 뿐 역사는 다 같은 하나의 성령의 나타남으로 되어진다는 요지이요 사람에 따라서 나타남(이 용어는 양면성을 가진 용어임으로 주는 입장에서 보면 나누어주는 것임)이 다른 형태로 나타난다는 말이 정확한 의미이다.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시느니라” 라는 고전12;11의 말씀이 다만 가만히 하나님의 처분만 기다리라는 뜻으로 쓰여지지 않았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 하다.
그러므로 교회사적으로 보아도 기도와 영성훈련을 많이 쌓아온 수도원에서 많은 은사들이 나타났고 오늘날에도 기도 많이 하는 자에게서 은사들이 나타나고 예수님도 기도 외에는 이런 류가 없다고 말씀하시고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마7;7)하셨습니다.
만약에 이러한 성경 적인 근거가 분명한데도 선입관이나 자기가 아는 영적인 분별이 모자라서 은사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라는 편견적인 신학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훈련(기도)해서 안된다면 일선 목회자들은 어떻게 교인들을 가르치겠으며 어떻게 은사를 받을 수 있겠는가?
또 하나 만약에 자신이 스스로 기도 훈련과 개발로 되어질 수 있다면 먼저 훈련받은 선 경험자들로부터 배운다는 것이 무엇이 이상하겠는가? “은사를 가르치고 훈련시키는 것을 비방하거나 거부하는 입장에 있는 분들에게 저는 분명히 성경 적인 근거와 이유를 명확히 제시하는 것입니다.
결론은 은사는 주어지는 것이지만 한편으로 인간 편에서 개발되고 훈련되어져야 한다는 것이 하나남의 뜻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연습(훈련)(딤전4;7)을 해야 한다고 명령하고 있으며 심령에 은사가 불일듯 일어나야 하며(딤후1;6) 예수의 생명이 육체에 나타나기 위하여 날마다 죽어야 할 것(고후4:10)을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뿐만 아니라 성령의 인도함을 받기 위하여는 몸을 쳐서 복종시키라고 까지 말하고 있으며 “힘써”라고 하고 있습니다.
(고후1:11)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를 인하여 많은 사람도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
(딤전4:7)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딤후1:6)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붙일듯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
(고후4:10)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이러한 기도훈련과 경건의 연습에는 성령의 역사와 나타남이 어떻게 나타나고 어느 때에 나타나는가? 즉 어떤 조건과 상태 하에서 성령의 나타남이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한 지식은 우리들의 은사 개발과 활용에 중요한 것이요 치유사역에 절대적인 것이다. 치유의 근원이 되시는 “성령의 나타남”이 없고서는 치유의 신학적인 이론이나 치유의 방법만 터득해서는 결코 치유의 큰 성과는 기대하기가 어렵다.
일선 목회자나 부흥사는 이러한 이론적인 바탕 위에 사역에 임하면 보다 더 놀라운 능력의 역사가 나타날 것이요 이를 알지 못했던 분들에게는 분명한 확신 위에서 사역할 것이요 이를 모르고 무턱대고 기도만 하던 분들에게는 확신을 가지고 요령 있는 기도훈련을 하며 성도들의 영성훈련과 치유사역에 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영성훈련과 치유사역의 방법론에 있어서도 체험자들이 자기의 체험에만 의존하여 기록한 것일 뿐 어떤 원칙이나 원리에서 나온 것들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막연히 모방만 할 뿐이요 치유가 인간 내부에서 일어나는 이유나 메카니즘(성령의 기름부음)을 이해함이 없이는 영성훈련과 수많은 질병의 치유사역에 응용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영성 훈련의 핵심적인 영적 원리를 모르면 영혼과 육신의 치유사역에 확신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치유 사역에는 확신입니다. 이 확신은 이러한 이론적인 바탕 위에 경험을 쌓아 가야하며 확신 있게 나아가면서 “성령의 나타남”이 있어야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영적인 원리를 아는 것이 능력이요 성령의 사역을 이해함이 능력이요 진리를 아는 것이 생명이요 능력입니다.
영생은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성령을 통하지 않고서는 알 수가 없다 성령을 아는 것은 성령의 사역을 이해하고 성령과의 끊임없는 교통과 교류가 내적으로 이루어지는 과정과 훈련을 통하여 성령을 이해하게 되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영생의 생명이 나타날 수가 있는 것이다. 이 성령의 사역을 이해하지 못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사역을 보고 귀신의 사역이라고 오해하기도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오늘날에도 구원을 받았지만 ‘보수’라는 미명하에 이 성령 사역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영적인 분별이 없는 많은 육신에 속한 사람들이 은사를 배척하고 치유사역을 거부하거나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부정하게 되어 결과적으로 오늘날의 예수님의 사역인 성령을 훼방하고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대적하는 사람이 영에 속한 자를 핍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열심은 있어나 지식을 쫓은 것이 아니라 자기의 의를 들어내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대적하는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하루아침에 영적인 분별이 되고 능력이 강하게 나타나고 통변이 되고 말씀을 들을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원리를 성경적으로 그리고 이론적으로 체계를 세워야 되고 훈련을 해야 하며 그 훈련의 요령은 성경에서 배우고 선배에게서 배우고 하나님의 법칙[생명과 성령의 법(롬8:2)]에서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