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 약 사
먼저 갈3:6 - 4:7까지 보십시다.
3:6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의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 4:7 " 그러므로 네가 이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 "
또 히브리서를 한번 보십시요
히브리서 8:1-13 " 이제하는 말의 중요한 것은 - 것이니라 "
이제 성경을 이해하는 근본 뼈대가 하나님의 언약을 이해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도 저희 교회 청년과 산수교회 청년과 잘아는 것인데 강의를 하라고 하니 또 합니다. 이것은 너무나도 중요하기 때문에 우리가 확실한 토대를 붙들고 있으면 믿음에서 흔들리지 않을 것이고 그리고 성경을 이해하는데 바른 빛을 줄 것입니다. 성경은 '내게 대하여 증거한다'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곧 그리스도에 대한 책입니다.
그러면 왜 성경은 그리스도에 대한 책인데 곧 그 효력에 영생을 주는 책인가. 그것은 "너희들이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알고 성경을 상고 하거니와 성경이 내게 대해서 증거한다."요8장에 말씀 했잖아요. 그러면 왜 성경이 그리스도의 책인데 곧 영생을 우리에게 주는 책인가. 영생은 다른 것이 아니라 나는 너희 하나님이라 너는 내 백성이 되고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 곧 그것이 생명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셨기 때문에 또 지으셨을 뿐만 아니라 인격적인 존재로 지으셔서 그와의 교제 가운데 세우셨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배하고 그와의 교제 가운데 사는 것이 참으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간의 생명의 본질이다. 그 관계가 파괴 됐을 때 하나님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대로 창세기 3:15절에서 처음 구원의 약속을 거기에 나타 내십니다.
그래서 이 성경은 구원의 약속을 어떻게 역사안에서 발전 시키시며 그리고 그 약속이 예수 안에서 성취되는가?
하나님은 친히 구원의 약속 안에서 자기 백성과 교제 하시기 때문에 어떻게 그 약속이 예수 안에서 성취하는가?
하나님께서 역사 안에서 이루신 그 구원의 일들을 모두 기록한 것이 성경이기 때문에 성경은 곧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의 책이요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그런 모든 것은 하나님이 친히 역사를 진행하시면서 그 역사 안에서 자기의 구원을 약속하심을 나타내심으로 나타내셔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다시 교제하시고 부르심은 중보자의 구속행위 안에서 우리를 다시 새롭게 하십니다. 그런데 그것이 단번에 완성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약속이 하나님이 친히 자기 구원역사를 진행시키면서 여러 방식으로 나타내셨어요. 그러기 때문에 그리스도에 대한 약속이 여러 방식으로 주어지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이고 그 약속에 대한 내용이어요.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은 곧 중보자인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고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그냥 느닷없이 오신 것이 아니라 역사의 처음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은 친히 그리스도의 영을 따라서 자기 백성과 교제하는 방식으로 계속 역사를 진행 해 오셨거든요. 그러니까 그것은 전부 언약적인 발전으로 나타나 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고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 하시는 언약적인 그 발전을 아는 것이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위 언약의 역사를 이해 하는 것이 성경의 뼈대가 된다는 말은 바로 그런 말이지요.
그래서 요즘 유행하는 말로 성경은 신론적으로 해석을 해야 하는데 신론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곧 기독론적으로 해석하는 것이고 기독론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곧 하나님의 언약 개념으로 해석하는 것이라 하는 말이 같은 말입니다. 해석에서 무슨 구속사적인 해석이니 하는 말이 같은 말이어요.
하나님은 역사 안에서 친히 자기 구원역사를 진행하셨거든요.그것이 기록된 것이 성경이고, 구원역사는 '나는 네 하나님이 되고 너는 내 백성이 되고 하나님과 교제 역사를 나타내는 것인데 그 구속의 역사를 점점 발전적으로 진행 시킴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하나님을 알 수 없고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느닷없는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아니라 역사 안에서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시는 그 언약의 역사를 앎으로 그리스도의 일 하심을 안다. 그러니까 언약의 역사를 해석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말입니다.
자 그러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처음에 나타난 언약을 보십시다. 여기 히 8장 제일끝에 "새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거기 "새언약"이란 말이 나옵니다. 그러면 "옛언약"이란 말이 있는가? 거기 옛언약이라고 명시적으로 말하고 있지는 않지마는 새언약을 말씀하셨고 이 새언약은 무엇과 대비 되는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자기와 새운 언약과 같지 아니하도다" 8:9절에 그렇게 말씀하시지요. 저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실 때 저희와 새운 언약과 같지 아니하도다 하니까 우리가 여기서 '옛언약' '새언약' 그런 말을 우리가 알 수 있지요.
자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옛언약은 무엇인가 하면 모세 언약을 두고 옛언약이라고 그럽니다. 새언약이란 그리스도로 주신 언약을 새언약이라고 히브리서 9장은 그렇게 말하지요.주로 성경에서 말하는 이 언약이 이 내용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좀더 살펴보면 이 옛언약과 새언약은 다 둘 다 합쳐서 하나님의 은혜언약입니다. 은혜언약이고 구속언약입니다. 엣언약과 새언약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다 하나님의 은혜의 언약이요 구속의 언약입니다. 이 둘 다 똑같이 그런데도 하나는 옛언약, 하나는 새언약 그렇게 말씀하심으로 그것의 나타남이 전혀 다른 차원에서 나타남을 펼쳐 보인 것 뿐이어요. 그러나 같은 언약이다.
옛언약과 새언약은 은혜언약과 구속언약으로서 동질성이 같은 것인데도 어떻게 이것이 대비되는가 문제를 우리가 설명을 해야 되겠지요.
그러면 이 언약 말고 또 다른 언약이 있는가? 그것은 처음에 나타나는 창2:16,17에 거기 보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아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는 거기에 제일 처음 언약 관계가 나타납니다. 그것은 소위 신학적으로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행위언약이라고 그렇게 말을 합니다. 창2:16,17에 행위언약 그렇게 말을 합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의 언약사에서 구별되는 것은 바로 행위언약과 은혜언약 이 둘로 대별 됩니다. 아담이 범죄하게 된 행위언약, 아담의 범죄한 후에 하나님께서 여인의 후손으로 말미암아 승리를 주시리라 약속하신 3:15을 시발점으로 하는 은혜언약 이 둘로 나뉘어져요. 그래서 하나는 행위언약 또 하나는 소위 구속의 언약 그렇게 말을 합니다. 그 둘로 나뉘어 집니다. 이 구속의 언약이 하나님이 그 언약을 진행시키는 역사 안에서 하나를 옛언약,하나는 새언약 하는 방식으로 두 경륜이 있다. 두 시기가 있다. 구속의 언약의 두 시기가 있는데 예수 이전 시기를 말하자면 옛언약시기라고 말을 하고 예수 오심으로 나타나는 시기를 새언약 시기라고 말을 한다. 그렇게 둘로 대별 되지요?
그러면 이제 좀더 앞으로 나아 가십시다. 그러면 왜 이처럼 언약을 중요하게 생각하는가 하는 것은 본래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언약적인 관계이기 때문에 그렇다. 본래가 언약적인 관계여요. 그것이 제일 처음 나타난 것은 창1,2장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그를 지으셨다는 그런 내용과 특별히 2장 처음에 표며는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구별해서 복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셨다하는 것이 제일 처음 본래 주어지고 있습니다. 단지 이제 언약적인 형태로 말하자면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는 방식으로 2:16,17절에 나타나 있어요. 근거는 앞에 나타나 있습니다. 인간의 창조 질서에 있어요. 하나님이 인간을 없는 것 중에서 '있을찌어다' 그렇게 지으시고 하나님이 지으신 그 본성을 따라서 움직이고 이런 존재로 사람을 세우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흙으로 빚으시고 생기를 불어 넣어서 생령이 되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또 그렇게 지은 방식을 하나님은 그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셨다 이렇게 말을 해요.
그 지으심에 문제를 두고도 말씀으로 있으라 하심에 있었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그런 방식이 아니라 삼위 하나님 안에 깊은 도모가 있고 계획이 있고 그리고 그 계획은 따라서 특별한 방식으로 지으신 것을 말해요. 흙으로 빚으시고 생기를 불어 넣어서 생령이 되게 하셨고 그렇게 함으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다 그러니 지으실 때도 그를 특이하게 지었고 또 지으셨을 뿐만 아니라 제 7일에 하나님이 기쁨의 그를 세움으로 하나님은 인간과 교제하는 방식으로 인간을 복주셨다. 제 7일을 복주시고 거룩하게 했다는 말은 다른 날에는 하나님의 생명의 나타나심이 온 세상에 부요했을 때까지라도 하나님은 하루를 구별하고, 하루를 구별했다는 것은 (복된날로 구별했다) 하나님을 복되심을 피조물을 향하신 하나님의 선하심을 복되심 이라고 그러거든요. 그러니까 복된날로 선별하셔서 그날을 복되심 날임과 교제의 날로 구별하셨다 그렇게 말을 해요.
그러니까 창조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기쁨이 제 칠일 안식일에 나타나고 있는데 인간을 지으셨을 뿐만 아니라 지으시고 그의 기쁨에 인간을 참여 시켜서 그를 경배하는 존재로 거기 세우셨다는 그런 말씀입니다. 다른 말로하며는 하나님이 지으셨을 때 땅에 사망이 없었고 그런 의미로 하나님의 생명이 나타나심이 참 풍성했을 때까지라도 하나님은 특별히 한 나무를 세우시고 거기서 하나님이 생명의 교제 ,생명의 풍성함을 특이한 방법으로 나타낸 것처럼 온 날에 온 땅에 하나님과의 교제가 충만했을 때까지라도 하나님께서 한 날을 복된날로 거룩하게 구별해 주심으로 (혹 그것은 하나님의 기쁨의 날이지요) 하나님의 기쁨에 인간을 참여케 하는 방식으로 인간을 복주셨다. 거기에 하나님이 인간을 자기의 교제로 세우심이 잘 나타나 있어요. 그리고 2:16,17에 처음 인간을 지으셨을 때에도 그런 언약 관계로 세우시지요. 네가 내 말을 순종하면 살고 안순종하며는 죽는다 그런 방식이지요. 왜냐하면 인간의 존재 방식 자체가 단순한 본성적인 존재로가 아니라 하나님과 교제하는 방식으로 그렇게 해서 영적이고 종교적이고 윤리적인 존재로 세우셨어요. 그러니 하나님과 교제가 파괴되며는 인간 되기를 멈추는 방식이어요. 왜냐하면 인간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더구나 하나님의 형상으로 그를 반영하는 존재로 그의 대리자로 그와의 교제 가운데로 세우셨기 때문에 그 교제가 파괴되면 그것은 사망입니다. 그런 관계로 처음 사람을 세우시고 계십니다.
그런 의미로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여요. 소위 여기 행위언약이나 구속언약이나 다 하나님의 은혜언약 입니다. 말한자며는, 그러나 신학적으로 쓰기를 정말 가치 없는 피조물 하나님의 원수된 아무 쓸모 없는 죄인에게 베푸신 무조건적인 선하심을 은혜라고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구속의 언약을 은혜언약이라고 그렇게 표현한 것 뿐이고 행위언약 자체도 인간의 행위로 무엇을 얻는다는 그러한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시고 그의 교제 가운데 세우셨기 때문에 곧 그것이 무한하신 은혜입니다. 창조자가 피조물에게 허리를 굽히셔서 그가 교제 가운데로 자기를 주셨으니 그것이 은혜중의 은혜여요. 그러나 거기에는 죄가 발동되기 전이거든요. 아직 죄가 아담안에 역사하기 전이어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어떻든 피조물을 자기 교제로 세우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혜를 말하고 있지마는 아담이 범죄한 뒤로 원수에게 베푸신 은혜와 범죄하기 전에 그가 지으신 피조하신 선한 피조물에게 베푸신 은혜와 그런 것은 차이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이 구속의 언약을 은혜언약이라고 말한 것 뿐이고 실은 다 하나님의 은혜의 교제 입니다.
그가 친히 자기를 낮추셔서 자기를 주신 것 뿐이여요. 그러면 왜 2:16,17 나타난 언약을 행위언약이라고 그러는가. 그것은 하나님과 교제가운데 사는 것은 곧 인간의 순종이고 울타리여요. 하나님이 거룩하시기 때문에 거룩하신 하나님이 이성적인 피조물인 천사와 인간에게 거룩을 요구합니다. 그 거룩은 하나님을 순종함이 거룩의 본질이기 때문이여요. 그래야만 하나님을 반영하거든요. 그래서 하나님과 바른 교제 가운데 사는 것은 참다운 순종으로 나타난 것이고 만일에 인간이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자기의 권능이 신적인 권능으로 나타났을 때 스스로를 자립하는 존재로 해석해서 자기 마음대로 하며는 그것은 창조자와 언약 안에 교제안에 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신적인 존재로 구별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영원한 사망인 것입니다.
여기서 아담 안에서 요구된 행동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하는 행동까지라도 행동이 공로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언약 안에 그 교제안에 사는 사람의 울타리는 곧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다. 그것이 곧 인간의 존재 방식이고 믿음의 존재 방식이다. 하나님이 생명이시요 하나님을 순종함이 그의 생명이고 그외에는 생명의 근원이 없습니다. 그가하는 모든 일은 만물의 생명의 근원 되신 하나님을 나타내심인 것이고 지은 모든 세계를 뜻대로 개발해서 하나님께 돌림이 곧 그의 삶의 목표요 내용이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람을 처음부터 이처럼 믿음의 존재로 세웠습니다.
인간은 피조물이요 피조물인데 하나님이 그와 교제 가운데 세우셨기 때문에 이것은 인격적인 믿음의 관계입니다. 믿음의 관계,신뢰의 관계, 순종의 관계지요. 신뢰요, 곧 순종입니다. 다른 말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처음부터 생명의 존재 방식은 믿음의 존재 방식이다. 만일에 그것을 떠나서 스스로 그것을 해석하고 스스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음으로 자기 자신으로부터 선악을 규정하는 방식으로 출발하면 그는 만물의 선악을 규정하시는 하나님을 하나님의 위치에 자기를 세우는 것이라 그것은 의존적인 존재 방식이 아니라 자존적인 존재 방식이고 그것은 믿음의 존재 방식이 아니여요. 그것은 인간을 하나님 앞에 언약의 대상으로 사는 삶이 아니라 바로 그것을 떠나서 스스로를 자존자로 해석하기 때문에 생명 되신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부터가 언약 관계이고 그 본질 자체가 언약 관계이고 곧 그것이 믿음의 관계요 곧 그것이 생명이여요. 그러나 아담이 그 위치를 떠났지요.
보통 우리들은 어째서 하나님이 선악을 알게 하는 실과를 만들어 놓고 괜히 만들어 아담이 먹게 했느냐. 뻔히 알면서 그래서 딱 잡아놓고 묶어 놓고 너 내말 잘들어. 말하자면 아기 한테 독약 놔두고 먹은 뒤로 살려놓고 하는 말이 어째서 네 아버지가 주었느냐 하는 식으로 이야기를 해요. 그래서 참 하나님이 불량하다. 말하자면 참 망령스런 말이지요. 그 단어를 안 써도 하나님이 참 잔인하고 묘하다 이제 이런 식이지요 말하자면. 하나님을 모른 모든 것은 하나님과 원수이기 때문에 직접적인 말 표현을 안해도 그런 뜻입니다. 실은, 왜 하나님이 다 알면서 그랬느냐. 그것을 소위 명쾌하게 해석하는 분이 우리나라에 있어요. 그것은 뭐 복잡할 것 없다. 하나님이 자기 영광을 위해서 지으셨고 모든 것은 하나님이 하시니까 인간은 아무 말 할 것 없다. 하나님이 빛도 지으시고 어두움도 지으셨으니 하나님이 자기 영광에 필요하니까 죄를 지으신 것이고 그래서 묶어 놓으니 아담 때부터 더 큰 완전함으로 우리를 홀리잖느냐. 그러니까 손해 될 것이 무엇이냐. 다 이익 뿐인데, 그러니까 하나님이 자기 영광을 위해서 거기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주었고 먹게 했으니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요 먹는 아담의 잘못은 아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먹고 죽게 된 아담을 살리므로 더 큰 영광을 받지 않느냐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징검다리로 필요한 것이지 악 자체는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나쁜 일이 없거든요. 악 자체가 아니다. 이렇게 설명하는 팀이 있어요. 이제 그분이 책도 내놓고 Tape도 나오니까 이름을 말을 해야 그 위험성에서 벗어 나겠지요. 소위 박용규 목사라고 계셔요. 그분이 이론을 전개하게 된 이유는 우리가 성경을 풀면서 이것해라 저것해라 그러면 하나님은 골인 지점에서 복을 주시리라. 말로는 칼빈주의라 하면서 매 인간의 행위만 가르쳤어요. 너희들도 아브라함처럼 하면 복을 줄 것 아니냐 너도 야곱처럼 해 봐라 꿈의 환상을 보고 줄 것 아니냐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가 열심히 수고하면 저기서 삐긋이 웃으며 돌아오며 너 왔냐 하고 복이나 주는 이런 하나님으로 해석해 왔어요. 그러면 그런 것이 인간을 괴롭게 했는가? 정말 거듭난 인간은 괴롭습니다. 그러나 거듭나지 못한 인간은 사람은 자기가 무엇인가 해서, 아 너는 이만큼 잘 했냐 하나님이 상줄 만한 수준에 올라온다는 것은 방금 아담이 범죄한 그 원리를 따라서는 인간이 가장 소망하는 바고 인간이 가장 좋아하는 바예요. 내가 수고해서 신과 같은 위치에 서고 그렇게 하면 특별히 하나님께서 생명으로 복주고 하는 그런 관계가 아니어요. 죽어라고 수고하면 내가 그런 자리에 올라야 맞을 것이라. 그것은 어떻게 보며는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에게나 최상의 힘을 제공하는 것처럼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대로 해석하면 자기가 가짜지요. 그래도 몰라요. 오늘의 한가지 부족점이 있다면 그가 죽었다는 것 아닙니까. 완전함에 도달하지 못하면 그것은 죽는 것이니까. 그것은 그런데도 오늘은 99하고 내일 한나절 더하자 하고 편히 자요. 그 하나가 부족한 것이 전체가 부족한 것인줄 몰라요. 그 성취 개념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더 근본적인 것도 모를 뿐만 아니라 이렇게 되버리기에 스스로 사람 양심을 화인 맞게 하는 것이고 스스로 모르고 그러고도 죽어라고 힘을 씁니다. 자기가 자기를 모르니 자기가 성취한 줄 모르고 피곤함이 없어요. 참으로 성취가 모르면 자살해서 죽게 되어야 하는데 그 성취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신의 완전함에 참여 안하면 성취가 안되는 것이거든요. 인간에게는 그런 성취가 없어요. 오늘의 선행이 어제의 죄악을 닦으질 못해요. 완전은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을 말하지 내가 죽을 때 완전해도 죽기 전에 잘못이 용서 받지는 못해요. 그런데 그 완전의 개념들이 잘못되어 있기 때문에 그저 열심히 수고하고 하지요. 그러니까 헌금제도를 고쳐서 부드럽게 하며는 소위 교인들이 많이 불고, 헌금을 많이 요구하면 아주 어느 교회라면 돈 없으면 교회도 못가겠더라. 교회를 안 올 것 같아도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많은 헌금을 요구하고 그 헌금에 상응하는 복을 그 만큼만 확실한 방식으로 보장하며는 그것은 소위 돈 놓고 돈 먹기 입니다. 좋은 일이예요. 또 확실히 보장하기 때문에 우상 심리는 그것을 더 원하는 겁니다. 왜? 많이 내는 만큼 많이 버는 보장만 있으면 조금 내면 불안한 것이어요. 왜 자기 성취가 없기 때문에. 그래서 그런 부흥사들이 하는 부흥회에 많은 사람이 가고 모아두는 이유가 그렇게 되 있습니다.
이처럼 아담이 범죄한 뒤로 인간은 말하자며는 자기 행위를 모든 판단의 근거로 삼았지요. 자, 그렇게 하고 보니까 하나님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주셨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을 위한 필수적인 단계라. 범죄해야 구원하지요. 그런 목표를 세웠기 때문에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요 인간에게는 책임이 없다. 만사는 하나님이 하신다. 우리나라 교회가 사람의 행위를 요구했기 때문에 잘 못된 것이고 만사는 하나님이 하시니 여러분들 마음을 편안히 해라 그것이 곧 믿음이다. 왜? 하나님이 하시니까. 그래야 마음이 편하든지 뭐하든지 하지. 자기 수고를 멈춰라. 그리고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이니 불안해 하지 말아라. 왜 못 이루었다고 불안해 하는가? 그것은 일하시는 하나님을 못 믿는 것이다. 아담이 범죄 했어도 그 범죄가 아담을 더 큰 영광으로 인도하는 것처럼. 오늘의 내 부족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찬양하는 방향으로 하나님이 인도하는 그 섭리중에 있으니 불안할 것 없다. 그렇지요. 그렇게 하면 인간의 죄책감은 없어집니다. 왜? 만사는 하나님이 하시고 그보다 더 두려운 일은 인간이 신 입니다. 왜? 내가 하는 일은 곧 하나님이 하는 일이기 때문에. 내가 하는 일은 하나님의 뜻이고 내 뜻이기 때문에 그렇게 범신론으로 돌아가요. 그래서 총 결론이 여기 있는가. 이제는 하나님이 사랑의 법으로 우리 안에 오셨으니 외적으로 이것하라 저것하라 우리를 옛날 일처럼 이야기 취급하지 말란 말이요. 가만이 놔두어도 다 잘 할 것이기 때문에. 왜? 성령이 오셨으니까. 그러니 우리는 외적인 요구 없어도 자원해서 선을 행하고 선을 행할 규칙이 내 안에 스스로 있다. 그러니 율법이 다시 우리에게 다시 규범으로 요구되며는 그것은 복음을 바로 알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지금 거듭난 사람들이,신자들은 믿는 신자들은 곧 이제 선을 행한다는 의미로도 신이다 그 말이예요.
그것이 복음처럼 굉장한 속도로 번지고 있지요. 거기에 일면의 진리가 있습니다. 전부 가짜면 장사가 안되지요. 일면의 진리가 있습니다. 왜 모든 이단들이 나왔는가? 그 이단들은 교리의 어두움을 공격하는 방향으로 꼭 일어나요. 교회에서 꼭 이단이 일어납니다. 꼭 교회에서 이단이 발동합니다. 그러니까 복음이 완전한 세트로 설명이 안되면 그런 방식으로 나와요. 우리는 나타난 대로 설명할 수 밖에 없지요. 그 양반이 얼마큼 선한 욕구를 가지고 있는가? 그건 우리가 판단할 조항이 아닙니다. 그건 하나님이 사람속을 아시니까. 우리는 나타난 대로 판정할 때 그것은 이단이어요. 우리는 이단하면 제가 드는 비유대로 우리가 간첩하면 선그라스를 끼고, 손톱은 길고, 배경은 거미줄이고, 국민학교때는 간첩잡을려면 꼭 엿장수만 바라 보았어요. 저것이 간첩인가. 그래서 제가 하위도 섬사람 아닙니까. 아 어떤 사람이 안경을 파란 것 썼어요. 시골에서는 그것이 봉사 아니면 형사입니다. 지금은 문화인들이 쓰는 것이지만 옛날에는 그랬어요. 그런데다 보니까 권총도 찼습디다. 안경집인데. 그래서 지서에 가서 일러 바쳐야 하느냐 상당히 고민이 됐습니다. 왜냐하면 간첩교육을 그렇게 배웠으니까. 이번에 김일성이 비디오에 나오는데 보니까 승계를 이어갈 만큼 권위가 있잖아요. 내용은 어떤지 몰라도. 그래서 우리들이 꼭 그것을 이전에 배웠던 반공 교육 방식이 그런 방식이다 그래요.
지금 우리 군부가 광주 사태 해결 안합니다. 왜 통치권을 시행했다고 믿고 있거든요, 그러니까 인간 이하의 행동을 하고도 부끄러운 줄을 몰라요. 그러면 북과 남은 민족을 통일한다는 대전제 아래 전쟁이 시작됐으면 죄책감을 못 느낍니다. 그렇지 않겠어요. 왜? 민족이 하나로 통일된다는 것은 많은 사람을 죽여 버려도 합법화 되 버려요. 그렇게 되며는. 그렇게 해서 전쟁을 했다고 보면 공산당에게 누구도 죽었는데, 그러고 우리들도 전두환 정권 아래 누구도 죽었는데 똑같은 말이 되버려요. 그런 의미로 우리는 다시 사고를 정립할 필요가 있어요. 물론 기독교인이 가지고 있는 사상 구조가 다르기 때문에 더 다른 차원으로 구조 분석을 해야 되겠지마는 지금 정치적인 방향으로는 우리가 달리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 말이어요. 그러니까 정권들도 자기 정권 강화를 위해 북방 정책을 썼어요. 그러니까 말하자면 북방 정책은 자기 정권 강화를 위한 그 방법일 뿐이지 참으로 그런 의지가 안보여요. 그러며는 민족의 대 추구하는 것이 통일이며는 말하자면 재야에서도 김일성을 안을 수 있어요. 그러면 일이 끝나거든요. 어떻든 지금 우리가 전두환을 품에 안으라고 안합니까. 용서하라고. 그래야 일의 화목이 시작 된다고. 그런 배경에 비추어 보면 야권에서 하는 행동들이 뭣인가 조금 짐작이 가요. 왜 너희 30 몇 % 신임 받고 있는 정권만 너희 정권 강화만 위해 북방 정책 강화 하고 있느냐? 더 보다 많은 대다수 국민이 본질적인 통일 원하고 있는데 뭐 너희들이 그런 의지가 있냐. 그러니까 누구든지 가서 안아버리면 될 것 아닙니까. 말하자면. 그러나 실정적인 법으로는 그렇게 공 기관 아니고는 그런 일 하면 안됩니다. 특히 북방에 있어서는 위임받는 공 기관이 아니고는 그런 일을 못해요. 그런데도 그런 기관들이 광주사태처럼 묘한 일을 한다고 평가 해버리기 때문에 그런 일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거든요. 그러면 작은 광주 사태도 국가 안정을 위해서 광주를 쓸어 버릴려고 그랬지요. 그건 우리나라 끼리입니다. 그런 대도 이만큼 뻔뻔하고 있잖아요.
그러면 우리가 하고 있는 방향이 조금 이해가 가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근본 개념들이 무엇인가 잘못 되며는 나머지 모든 것을 해석하는데 그만큼 어둡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모든 사고를 다시 정말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대로 재 조정할 필요가 있어요. 그렇게 안하면 바르게 모릅니다. 그럼 가장 나쁘게 나타난 것이 조금 전에 그런 것입니다. 만사는 하나님이 하시니 아담의 범죄는 아담을 더 영화롭게 하는 하나님의 징검다리다. 필요 악이어요. 타락이 없으면 구속을 못하니까. 그렇게 했으니 얼마나 명쾌하냐?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감사할 것 뿐 이유를 물을 필요가 없다. 지금도 감사한 것 뿐 우리의 죄책 때문에 고민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믿음이 아니니까. 이 현재의 상태도 더 큰 영광을 위해서 한 통로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렇게 이해를 하는 사람 참 안됐습니다. 그 다음에 한가지 일은 해석을 못하니까 그런 질문한 사람을 지옥 보낼려고 하나님이 준비하고 계신다. 이런 말로 대답하는 사람 여러 말들이 있지요. 그럼 무엇하실려고 하나님이 그처럼 하셨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언약을 파괴하는 시험돌로 둔 것이 아니라 은혜를 강화하는 은혜로 준 것입니다. 에덴에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은 악으로 시험지도 않고 사람의 미혹됨이 자기 욕심의 미혹됨이지 하나님은 어느 누구에게도 악으로 시험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그들의 믿음을 강화 시키는 방식으로 하나님이 거기에 주신 것이어요. 에덴에 주신 모든 것은 성 에덴적으로 주신 것이어요. 하나님과 교제 방식으로 주신 것이지 하나님과 파괴되는 방식으로 하나님과 교제를 단절하는 방식으로 주신 것은 아니어요. 우리가 죄의 근본 비밀은 성경에서 말 안하니까 모릅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인간이 하나님을 경외할 것인가를 갖고 인간을 말하고 있지 인간 스스로 자기 스스로 자기 기원과 하나님의 모든 것을 더듬도록 허락하지 않습니다. 인간 지식의 한도가 거기까지 가지 못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셨기 때문에 인간의 존재 목표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성경의 내용이고 그 이상의 것을 성경은 인간의 물음에 답하지 않습니다. 범죄한 인간이 자기를 만물을 지으신 신의 원리를 아는 것처럼 스스로 더듬는 것이고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은 대답을 않습니다. 그러니까 거기 선악과를 둔 이유는 인간이 스스로 생명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앞에 의존적인 존재요. 하나님만 선하게 규정자요. 인간은 그를 순종함이 곧 생명이다. 그럼 어떤 경우에 스스로 인간을 높여서 신적인 존재로 올리도록 유혹이 있을 때까지도 인간은 하나님앞에 피조물인 것을 알고 의존적인 존재인 것을 알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만 그의 생명이다 하는 사실을 하나님께서도 뚜렷하게 알 수 있도록 거기 선악을 알게 하는 실과와 생명나무를 함께 세우시고 이것을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저것을 먹지 못하게 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인간의 존재 방식과 믿음의 방식을 거기서 강조적으로 도와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인간을 넘어지게 하는 것이 아니지요. 그러면 왜 그런 일이 없이 했으면 좋은 일이지 그런가. 그리고 그럴 때 하나님께서 막아 버리면 될 것이고 그것을 안 먹도록 장치를 해버렸으면 될 것인데. 그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실 때 인격적인 존재로 지으시고 그와 교제로 지으셨다. 인격이라는 것은 스스로 자기 결정적인 존재여요. 자기 사고가 있고 자기 결단의 존재입니다. 그러니까 본성적으로 못 먹게 하니까 못 먹는 것. 가령 어떤 사람이 담배를 못 피워요. 한대만 피면 기침 나오니까. 그러니까 아 그 사람 착하다. 담배도 안 피우고 그렇게 말하면 이상한 것이어요. 그는 신체 기능상 못 피우니까. 그렇지 않겠어요? 그러나 그가 그전에 잘 먹는 사람인데 무엇인가 중대한 결단이 자기에게 있어 포기하고 가령 친구들과 교제할 때도 그것을 끊고 있으면 그것은 분명히 인격적인 끊음이어요. 자기 결단적인 끊음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자기 노력과 관계가 있지요. 그 사람 인격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단순히 죄 없는 존재로 지으셨을 뿐 만 아니라 세상의 온갖 유혹이 없기 때문에 온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하는 온갖 유혹의 요소가 있을 때에라도 자기 존재를 지으시고 그리고 참 생명이신 하나님을 위해서 그가 자기의 모든 전 인격을 순응 했을 때만 그는 인격적인 존재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어요. 그래서 제가 조금 지저분한 예를 들 때가 있습니다. 요즘 하도 바람피는 예가 많잖아요. 남편이 중동에 갔는데
중세에는 정
조대가 있었지요. 요즈음 그것 채우면 이혼할 것이고 요즘은 안채우고 시어머니, 시누 다 감독을 잘 했어요. 그래서 몇년 있다 돌아와서 보니 자기 마누라가 온전하거든요. 그런다고 누가 열녀 상 줍니까. 그러나 6.25때 어느 누구도 그 여자의 생명을 보존 할 수 없어요. 어느 누구도 만일 그랬을 때까지라도 생사를 걸고 남편에 대한 정조를 지키고 있으면 그건 열려 감이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그 모든 환경이 자기를 대하고 남편과의 교제를 파괴했을 때에도 그가 인격적인 존재로서 남편과의 자기 관계를 알고 분명히 자기 위치를 지켜 냈거든요. 그러면 그 여자는 그렇게 해서 상봉을 한다 생각해 봅시다. 말하자면 그러면 이산가족 찾기보다 더 멋있고 박수칠만한 클라이막스가 되겠지요. 왜냐? 그런 일을 통해서 그가 바로 그 정조를 적정 세력 가운데 있을 때까지라도 그는 완전한 인격적인 관계로 그 일을 이루었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그를 꺾을 수가 없어요. 그는 그렇게 함으로 남편의 완전한 반려자로서 자기를 세우는 것이지요. 그것 아니겠어요?
하나님이 사람은 시험에 두신 이유도 바로 그런 것입니다. 인간이 그냥 본성적인 방식으로 하나님을 순종하는 그런 개념이 아니라 인격적인 방식으로 순종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대항하는 죄가 에덴에 들어 왔을 때까지라도 인간은 스스로 자기가 어떤 신입니다. 아무도 안보여요. 자기가 보이는 것 모든 것 중에 신적인 존재로 서 있어요. 그랬을 때까지라도 자기는 자존자가 아니며 피조물이며 그가 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을 순종하며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그 일이지 자기 영광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여요. 그렇게 하도록 하나님께서 한가지 금지조항을 주시므로 그가 피조물인 사실을 알리고 계시거든요. 그러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인격적인 존재로 하나님께서 세우신 뜻이요. 그리고 그 믿음을 강화 시키신 것이지 그것이 인간을 넘어지게 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아담이 범죄 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제일 처음에 3:15에 처음 거기서 구속을 나타내십니다. "너는 여인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고 뱀의 후손은 네 발꿈치를 물 것이요 너는 뱀의 머리를 밟으리라."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거기서 하나님께서 구원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아담이 했던 것처럼 죄와 연합한 관계가 아니라 죄와 적대적인 관계가 되고 그것이 어느 때 완전하게 이루어지는가. 여인의 후손이 오셔서 그가 받은 고난으로 뱀의 머리를 그의 권세를 완전히 파괴 했을 때 그것이 완전하게 나타난다 하는 것을 거기 완전하게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인의 후손, 여자가 난 자들은 아담과 하와의 계통이기 때문에 뱀에게 승리 할 수 없습니다. 사탄은 본래 그런 권세가 없지요. 그럼 왜 온 인류를 지배하는 권세를 갖게 됐는가? 그건 하나님이 인간을 죄중에 심판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가령 아담이 범죄하지 않았으면 사탄은 에덴에 돌고 있는 동네 개 밖에 안됩니다. 아무 것도 역할을 못하지요. 유혹은 할 수 있어도 그것은 권세는 없습니다. 그러나 마치 남자가 중동에 갔을 때 여자가 잘 못 하며는 섬김을 받은 정부가 그 집 남편보다 강력합니다. 섬김을 받은 의미로는 남편이 다 돈보내 주면 섬김을 받은 의미로는 그 정부가 왕이여요. 그런 방식으로 사탄은 온 인류에 군립한다. 지금도 하나님이 해와 달을 쓰게하시고 햇빛과 비를 주시고 추수할 때를 주시고 모든 생명은 하나님께로부터 주시고 모든 은사가 하나님께로부터 와요. 그래도 인간은 마치 범죄한 여자가 마치 본 남편에 대한 두려운 판단이 있어도 그의 모든 여건은 정부를 섬기는 것처럼 신에 대한 두려움은 있어도 나타난 모든 것은 어두움을 봉사하는 방식이다. 우상을 섬기고 완전히 거꾸로 됐어요.
그런 방식으로 사탄은 인류의 그 권세를 시행하기 때문에 이 세상의 임금이다.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그렇게 성경에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만사 하나님이 하시지요, 아담이 범죄 했기 때문에 아담의 혈통을 따라 난 사람은 어느 누구도 자기를 심판에서 구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아담 안에서 온 인류를 지으셨거든요. 아담은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언약의 머리로서예요. 인류의 머리일 뿐만 아니라 언약의 머리로서 있는 거예요. 가령 우리나라 대통령이 일본에 도장을 찍으면 우리나라를 파는 도장을 찍으면 우리 하위도 사람 신문을 보지 않아도 팔려요. 또 낳지 않은 사람도 팔려요. 왜냐 총 대장이 그렇게 조약을 했기에 그렇습니다. 그래 나는 낳지도 않고 신문도 안 보았기에 무효라고. 그건 아무 소용이 없어요. 대장이 했기 때문에. 부통령이 했으면 그 사람만 감옥가면 되고 우리는 아무 상관이 없어요. 하와의 범죄가 문제가 아니라 아담이 범죄 했기 때문이라고 로마서 5장에 성경이 설명하는 이유가 그것이어요. 아담의 첫 범죄 때문에 인류가 팔렸다. 온 인류는 범죄 했다. 여러번 범죄 했다는 것이 아니라 첫 범죄 전 사망이다. 우리를 죄와 상관없이 태어나기도 전에 이 일은 끝난 것이어요. 그러니까 아담의 혈통을 따라 태어난 모든 사람은 아담이 하나님과 언약관계 있었을 때 아담의 허리에 있었고 그런 의미로 아담에게 법적으로 가입되어 있어요. 아담의 혈통으로 따라 난 사람은 다 죽음의 존재입니다. 존재까지라도 하나님과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 모르고 태어날 뿐 아니라 그 존재까지라고 이제는 죽음에 매인 존재로 살다가 죽어요. 안 죽은 사람 한명도 없잖아요?
그러니까 아담의 후손 상관없이 강력한 권세로 뱀의 머리를 밟을 수가 있어요. 그러니까 여인의 후손으로 오신 분은 하나님이 친히 여인의 후손 되심으로만 가능한 일이어요. 그것은 제일 처음 아담을 정죄하는 현장에서 하나님이 아담을 정죄함이 꼭 그의 구원인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인간이 범죄하자 말자 하나님이 여기서 구속의 역사를 나타내는가?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통해서 이루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통해서 이루신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과 약속하신 그 약속의 모든 성취는 하나님께 책임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가령 아버지가 그 자식과 약속을 했어요. 자식이 그 약속에 도달 못하면 그 약속은 무효. 그러면 그 자식은 하나도 받을 것이 없습니다. 너 공부 잘 하면, 너 돈 주마. 그것 하나도 자식이 받을 자격이 없어요. 왜 99점 정해놓고 98점 맞아도 돈 안주면 그 다음에 공부 못한 것 뻔 하잖아요. 그렇지요. 너 만약에 한 번만 잘 못해봐 너 매 맞은가 안 맞은가. 부모가 자식과 약속했을 때는 자식이 원해서 약속한 것 아닙니다. 어느 자식이 자기가 대학교가 무엇인 줄 알겠소. 나는 국민학교에 다닐 때 도덕을 배우니 웃었습니다. 아 도덕을 배우는 구나 . 내가 뭐 알아야지요. 또 제가 공대 갈려고 공고에 갈려고 했어요. 모르니까. 그래 저더러 광고가라고 그러니까 어째 공고 갈려고 하는데 광고 가라고 하는고 . 그래 제가 목포에서 만화책만 보고 광고가 무엇인줄 몰랐거든요. 어째서 광고 가는고 제가 알 수 없어요. 그러니까 좋아하는 것을 아버지가 자 이것이 가장 좋고 네가 이렇게 되면 나와 같은 존재가 된다. 그러니까 너는 이렇게 이렇게 해라. 그러면 내 모든 것을 다 너를 위해 주마. 이렇게 아버지가 먼저 원해서 자식들에게 약속합니다. 낳기도 아버지가 그냥 낳았을 뿐만 아니라 물론 하나님이 사람을 낳으신 것과는 다르지요. 하나님은 계획 중에 사람을 낳으시지마는, 인간은 살다 보면 그냥 낳기 때문에 상관 없지마는, 그래도 약속은 아버지가 원해서 하시고 그 약속을 자식이 잘 못하면 아버지가 매를 때려요. 매를 때리면서 까지라도 아버지는 그 약속에 완전하도록 인도해서 자기가 약속한 것은 자식이 받을 만큼 성장 시켜서 아버지의 모든 것을 물려받을 후사로 줍니다. 다 물려 받도록 주어요. 그렇게 하고 아버지가 죽으면 아버지의 깊은 뜻은 아들안에서 계속 진행이 되겠지요. 이것이 부자지간에 약속이어요. 이제 부부끼리의 약속하고는 다릅니다. 서로 좋아서 서로 대등적인 관계로 약속하고 서로 판단권이 있지마는 그 자식에게는 그런 것이 없어요.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시고 하나님의 깊으신 뜻이 인간을 통해서 완성되기를 원하셨을 때는 그 완성의 책임이 하나님께 있는 것이어요. 왜냐하면 인간은 범죄 불가능한 신적인 존재는 피조물에게 없는 속성입니다. 천사도 사람도 범죄 불가능한 의미로 그런 존재는 아니어요. 피조물이기 때문에. 죄와 심판 없이 있는 분은 하나님 뿐이고 단지 천사와 사람은 죄와 그 안에 죄가 없이 지어졌다는 방식으로 완전이지 범죄 불가능한 의미로 그 완전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을 자기 대리자로 세우셨을 때에는 아버지가 자식을 그런 존재로 세우셨을 때 분명히 약속이 파괴됐기 때문에 약속에 대한 책임에 대한 심판은 받아도 그 모든 것은 아버지가 이루어 낸 것이어요. 아버지가 그러니까 아담이 범죄한 처음 현장에서 하나님이 친히 여인의 후손으로 인류의 일원이 되심으로 그가 대신 고난을 받으심으로 뱀의 머리를 밟는 승리를 이루셔서 이제는 아담안에서 사탄에게 순종하는 인류가 아니라 벰의 머리를 밟는 완전한 승리로 인간을 새롭게 할 것을 거기 처음 약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하자면 창3:15은 원시복음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어요. 이제 거기까지 됐지요.
이제 그 약속 때문에 하나님은 인류중에 일부를 구별하셔서 친히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별하는 보존적인 인류를 거기 남기셨습니다. 그러면 그 약속은 어떻게 해서 그들 안에 보존되는가. 하나님이 친히 사람과 약속했을 때는 그 약속은 친히 하나님 자신이 책임져요. 약속은 보증자가 아버지가 자식에게 약속했을 때는 맹세를 안해도 아버지의 생사를 걸고 그 약속을 이루어 내서 아들을 얻게 할 것입니다. 그건 아버지 자신이 보증자예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만물을 그렇게 지으시고 사람을 통해서 그 영광이 증거 되기를 그가 계획하셨을 때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하나님 자기 자신이 보증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친히 만물을 지으셨고 하나님 밖으로 자기 계시를 아들 그렇게 말하기 때문에 아들이 만물을 지으셨고 그런 의미로 언약의 중보자도 아들이시다 그렇게 말을 해요.
하나님은 스스로 그 약속을 자기 자신이 성취하도록 거기 보증 하셨기 때문에 아담의 실패가 있자마자 여인의 후손으로 역사에 개입 할 것을 약속하셨고 어느날엔가 여인의 후손으로 영원히 혈육을 입으셔서 참 사람이 되실 하나님 자신 곧 하나님 밖으로 자시 스스로 계신 하나님 아들이 친히 보증자가 되시기 때문에 만물의 생명을 주셨던 그들이 친히 자기 백성의 영안에 친히 자기 자신을 증거 하시므로 그들이 생명되신 하나님과 교제 안에 살 수 있도록 약속의 백성을 거기 남기신 것이어요. 그것이 구약에 나타난 의인들입니다.
그래서 아담도 믿었지요. 자기 아내를 생명이라, 하와라, 자기는 죽어도 하나님께서 여인의 태를 통해서 생명을 하나님께서 완성할 것을 거기서 기대하고 있고 그리고 하와까지라도 아들을 낳고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노라. 바로 그 아들이 바로 뱀의 머리를 밟을 완성자인가 거기서 하나님의 구원 약속을 대망해요.
그것을 보면 그들도 믿음으로 살았다고 이해할 수 있지요. 그리고 셋도 있고 에녹도 있잖아요. 그런 사람들이 살고 있는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라 어느 날엔가 친히 여인의 후손으로서 참 사람이 되시고 고난 받으심을 통해서 뱀의 머리를 밟을 승리자로 오실 하나님의 아들의 영이 곧 그들의 영 안에 계셔서 그들의 구원 약속을 거기 증거 하시기 때문에 그들은 믿음을 따라 사망의 세계중에서 소망을 갖고 그처럼 그 세계를 그렸던 것이라. 그리고 이제 하나님께서 언약을 다시 나타내신 것은 노아 홍수 당시 나타내고 있습니다.
노아 홍수 창 8:21-22 에 보면 거기 처음 또 나타나지요. 거기 보면 하나님께서 노아가 드린 번제의 향기를 흠양하시고 사람이 본래 날 때부터 육체가 되기 때문에 저들을 다시는 심판하지 않겠다. 그리고 심음과 거둠이, 추위와 더위, 낮과 밤이 계속되도록 하겠다. 거기 그렇게 말씀하시고 소위 무지개로 약속을 확증하셨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진노의 구름 심판의 구름으로 온 세상을 덮을 때도 하나님께서는 친히 그 약속을 기억하시고 이제는 그렇게 전혀 햇빛이 들지 않은 방식으로 쓸어 버리지 않는다. 햇빛이 비춰야 무지개가 비취거든요. 그러니까 무지개를 통해서 밤낮이 없는 전 우주적인 질서를 그렇게 파괴하는 방식으로 그런 재앙은 안 내린다. 그런 약속을 거기에 나타내셨습니다.
그럼 왜 그 약속을 하시는가? 창세기 6장에서는 거꾸로 이야기 해요. 다시는 하나님이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사람 이 날 때부터 혈육이 됨이니라. 거기서는 그들이 육체가 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지 않겠다 해 놓고 여기 창8장에서는 그들이 육체가 되기 때문에 다시 홍수로 심판하지 않겠다. 그런 말을 해요. 그러니까 문맥을 따라서 육체라는 의미를 해석해야 합니다. 노아 홍수로 세상을 쓸을 때는 죄악이 가득 찼다는 이유로 그들이 육체가 됐다, 죄악이 가득 찼다, 그러니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직접 그 역사에 개입하지 아니하며는 하나님의 은혜의 등불은 꺼지게 되어 있어요, 여인의 후손으로 오실 분이 없도록 죄악의 물결이 온 인류를 덮게 되어 있어요. 그런 의미로 육체가 됐다, 온 죄악이 관영 했다. 하나님께서 죄악을 심판하시므로 의의 후손이 홍수로 새롭게 된 땅에 살게 했습니다. 죄악을 제거 하심으로 그가 의의 후손을 남겼어요. 그 다음에 노아 후손도 끊어지게 생겼어요. 그만큼 죄의 물결이 강력했다. 그러나 홍수 심판이 사람을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환경을 바꿈으로 죄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어요. 왜냐하면 그것은 본성적인 죄이기 때문에 아담이 범죄한 뒤로 그 죄는 본성적으로 들어와 있기 때문에 그들이 본래 육체로 되어 있으나 이제는 홍수로 심판해도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새롭게 창조하기 전에는 안되는 것이어요. 그것을 거기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이어요. 노아 홍수 끝으로 무지개로 나타나시면서 내가 이제는 세상을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 물로 심판하면 하나님의 영광은 어디에 나타납니까. 죄를 지을 때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쓸어 버리면 완전히 황무지가 될 것이다. 거기 하나님의 생명의 부요하심이 어떻게 증거 됩니까? 안 나타나요. 역사는 항상 저주로 파괴되고 황무지가 되버린 것이고 하나님의 부요하심은 역사에 나타나질 못합니다. 그러니까 이제 쓸어버리는 방식이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하시는가. 쓰는 방식이 아니라 이제는 인류를 흩으심으로 이 세계를 보존하는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자기 구원을 이루십니다 하는 것이 바벨탑 사건과 아브라함의 사건입니다. 창12장에 이제 민족을 흩으셨기 때문에 그리고 서로가 마음이 달라지도록 그처럼 서로 불화 하도록 했기 때문에 둘이 옆에 짝꿍끼리 앉아서 서로 잘할려고 하면 서로 공부를 잘한다. 월말 고사를 안보면 공부를 안한다. 무슨 평가가 있어야 되요. 누구보다 나아야 되요, 점수를 1점이라도 높아야 되요. 그런 기분이 없으면 안해요. 그 전에는 노아 때는 온 인류가 연합해서 큰 죄악이 하나님의 구원 약속을 파괴하는 방식으로 여인의 후손이 끊어질 만큼 강력했어요. 하나님이 노아를 보존하셨지요. 그리고 온 세상을 심판하심으로 죄악의 세력을 죽였어요. 그래도 인간은 날 때부터 육체이기 때문에 아담안에 날 때부터 아담 안에 부패한 본성으로 났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이 역사를 구원하지 못한다. 그 증거가 바벨탑 심판으로 나타났지요. 그렇게 심판 했는데도 인류는 연합해 가지고 다시는 홍수 심판으로 죽지 않도록 하자인데 문화가 발전하면 발전할수록 우리는 자연에 도전해서 이 큰 홍수가 무슨 소용이 있느냐, 지진이 무슨 필요가 있으며 공해가 무슨 필요가 있느냐, 이사가면 그만이지, 이제는 이런 식으로 안 죽는다. 하나님은 자연세력을 통해서 자기를 나타내시거든요. 그러면 만물은 하나님을 나타내시기 때문에 그래도 그들은 자기들의 노력으로 심판을 면하려는 방식으로 인간 권세가 집약되요. 그대로 두면 어떻게 됩니까? 노아 홍수처럼 되요. 그건 하나님은 역사를 그런 방식으로 개입 안하시고 인간을 흩으심으로 죄악을 제약시킨다. 그래서 연합한 힘으로 하나님을 대항하지 못하고 그러면서도 스스로 분리됐기 때문에 경쟁함으로 이제는 발전한다. 노아 홍수처럼 황무지가 된 것이 아니라 발전한다. 그러니까 미국하고 소련하고 전쟁하느라고 문명을 발전시켜요. 최고도의 문명을. 그렇지요? 그래서 사람을 조금이라도 편하게 살고 아무튼 사촌이 논사면 배아프니 내가 사야되지.
이런 성취욕들 그래서 교회까지라도 주일 학교에서 상줍니다. 누구는 몇점, 헌금하면 30점, 출석하면 20점, 요절 외우면 몇점,그래서 우리반 상 줍니다 하고 붙이지요.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되겠지요. 포도송이 붙여서 볼 때마다 기분이 좋아요. 우리 반이 잘 했구나. 그래야만 무엇인가 동기가 생기고 그래야만 힘이 생기지 그것 없이 하나님의 형상이 그리스도의 영이 내 안에 계시면 마땅히 형제에게 증거하거든요. 그것은 몇명을 건졌느냐 문제가 아니여요. 온 천하를 구원하기 전에 끊임이 없는 일이어요. 그렇게 설교하고 스스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되돌아 가면 행동할 방식을 몰라요. 인간은 무엇인가 나타날 그라프가 있어야 되고 비교할 대상이 있어야 되지 그러니까 연말이 되며는 구역별 대항 무엇을 하고 다 하는 것이지요. 성가대 그냥 발표회가 아니지요. 그냥 대회를 하는 것이고 상을 주어야 하고 평가를 해야 되요.
말하자면 신학교에서도 가난하면 도움을 받는 것이 아니라 공부를 잘하면 성적 우수 장학금을 준다. 교회는 가난한 자가 도움을 받아야 하는데. 왜? 하나님께서 우리를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대리자로 하나님이 그 형제를 돌보라고 주셨기 때문에 장학금 주어야 해요. 그러니까 세상 방식으로 교회가 되어 있는 방식이지요. 그렇게 하니까 교회는 연합이 안된다. 서로 경쟁해야 되요. 그 참 비참한 일이어요. 심지어는 설교를 해도 목사가 밑천이 있어야 써먹을 것이지 그러니 항상 교인들은 목사보다 한 수 낮아야 되요. 그런 것 아니어요, 그래야 새 것을 배끼지요. 그러니 참다운 연합이 없다. 하나님이 옛인류를 심판하는 방식이 그대로 교회안에 들어 왔어요. 교회도 서로 봉사적인 연합이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해서 서로 지체가 되서 서로 봉사함으로 하나님의 부유하심이 교회에 충만하게 나타나심이 교회 연합이다. 그런데 교회 연합이 안되도록 한 것이 바벨탑 사건이어요. 인간이 하나님을 모르고 연합하기 때문에 강력한 권세로 하나님을 대항해요. 흩어버렸어요. 그전처럼 황무지가 되지 않았지요. 황무지가 안됐어도 이제는 역사는 발전합니다. 왜 서로 경쟁 하니까. 서로 봉사할려고 문화의 바람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러니 서로 죽자 살자 하는 것이지요. 문명이 급속도로 발전해요. 얼마나 좋습니까. 그래도 성씨만 달라도 싸우고 강만 하나 달라도 싸우고 색깔이 달라도 싸우고 왜 싸워야 되는지 모르겠어요. 왜 우리 민족을 잘 되게 해야 하니까 이런 식으로 배타적인 원리로 서로 분리된다.
지금 인간이 서로 연합하는 것이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안 죽을려면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 그래서 연합한 것이지 서로 사랑해서 도와 줄려고 연합한 것 아니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노아 홍수처럼 그렇게 개입한 것이 아니고 바벨탑 사건에서 인류를 흩음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점점 문화 창달이 됨으로써 서로 연합해서 하나님을 대항하는 죄의 세력으로 하나님이 구원의 등불을 끄지 못하도록 역사 하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친히 아브라함을 분리시킴으로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거기서 처음 강력하게 나타내셨어요. 하나님께서 새 인류를 지으심으로 하신다 하는 것이 노아에게 주신 약속이어요. 하나님이 한사람 아브라함을 분리 시켰습니다. 그가 믿음이 좋아서 분리시킬 아무런 이유가 없고 한사람을 분리시켜서 특이한 방식으로 아브라함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습니다. 나는 네 하나님이라 내가 너와 함께 하겠고 누구든지 너를 저주하면 저주하고 너를 복주면 그에게 복주고 나는 너와 함께 하겠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으로 특이하게 자기를 나타내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하나님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을 머리로 하는 한 나라를 한 혈통을 이루셔서 아브라함과 그의 씨가 하나님의 법을 따라 사는 의미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되겠다 그렇게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지으심도 아브라함을 머리로 한 하나님을 순종하는 인류를 지으심이요 출생을 통해서, 그러나 아담이 범죄함으로 이것이 파괴 됐지요. 하나님은 아브라함 한명을 분리시킴으로 아브라함의 씨 아브라함 한명을 분리시킴으로 아브라함과 같이 순종하는 새 인류 한 혈통을 지으시겠다고 배타적으로 아브라함과 그 씨의 하나님으로 자기를 분리시켰습니다. 그때부터 하나님의 구원 약속은 아브라함의 씨에 거기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니 아담을 머리로 하는 새 인류가 아니고 옛인류가 아니라 아브라함을 머리로 하는 새인류 하나님을 아버지로 하고 나는 네 백성 하나님이 되고 너는 내 백성이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새 인류를 지으실 것을 거기 아브라함에게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이 다 늙어 죽게 되었어요.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으로 사는 인류를 지으신다고 했는데 다 죽게 됐어요. 그러면 아브라함처럼 새인류를 지으실 것을 어떻게 지으실 것인가. 그것은 단순한 출생을 통해서 지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초 자연적인 약속을 따라서 그것을 짓겠다고 하는 것이 아브라함의 씨에 대한 약속이어요. 그러므로 아브라함에게 하는 모든 약속은 씨와 땅이고 아브라함의 모든 믿음의 내용은 씨와 땅에 대한 내용이 아브라함의 내용이어요. 씨와 땅에 대한 소망, 그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한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처럼 새 믿음의 종족을 지으시겠다고 아브라함과 분리시켜서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내 후손의 하나님이라 했는데 아브라함의 후손을 생산하지 못할 다 늙은 사람이고 그 부인도 이제는 다 늙어서 생산하는 방식으로는 죽을 사람이어요. 죽은 사람이지요. 왜 아이를 못 낳으니까. 100살 먹은 사람하고 아이 난다고 하면 거짓 말이지요. 그런 의미로 죽은 사람이어요. 비유적으로 죽었지요. 아직은 안 죽었어요. 아니 낳는 의미로는 죽었다. 실제적으로 죽은 사람이냐. 아니 낳는다는 의미로는 죽었다는 의미지요. 그런 의미로 죽은 자다. 그러면 아브라함처럼 믿음의 백성, 아브라함을 아버지로 하는 믿음의 혈통들 새 인류를 지으시기로 했는데 그것은 아브라함과 사라의 결혼 관계 말하자면 아담의 혈통을 따른 그런 관계로 온 것이 아니라 그 혈통을 따라 난 사람은 누굽니까? 하갈을 통한 이스마엘 그는 제외시켰다. 나는 이 씨를 통해서 이스마엘을 통해서는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게 하지 않는다. 후사를 잇게 하지 않는다. 아브라함의 후사는 누구인가? 바로 아브라함과 사라의 태를 통해서 온다. 그러나 이 노인들은 다 죽었다. 아이 낳는 의미로는. 그러면 아브라함과 같은 새 종족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만드시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초자연적인 방식으로 역사에 개입하심으로 약속의 씨를 주심으로 결혼관계를 통한 혈통관계가 아니라 하나님이 초 자연적인 개입으로 약속을 따라서 약속의 시를 주심으로 그 씨가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번성함으로 아브라함과 같은 새 종족을 지으시겠다는 약속이 아브라함의 약속이어요.
그러니까 족장들은 아이 낳는 일에 총 시선을 집중하고 있지요. 그리고 말하자면 아브라함 아래로 쭉 보면 아이 낳는 일이어요. 물론 그것이 그런 것은 아니지요. 하와도 누굴 낳고 누굴 낳고 그런 것이지요. 아브라함의 약속의 의미를 알겠지요. 그러니까 아브라함 구원 역사는 특이하다. 하나님께서 죄악된 세상을 심판 하심으로 개입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여인의 후손으로 오시는 분의 승리 그 후손은 단순한 여자의 혈통을 따라 난 사람이 아니지요. 그 약속을 처음 창 12장에 구체적으로 나타낸다. 이제는 새인류를 하나님이 지으시겠다. 그리고 그 역사는 하나님께서 인류를 흩으심으로 보존해도 하나님께서 새 인류를 지으심으로 구원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이지 심판을 통해서 나타난 것은 아니다 하는 사실을 제일 처음 구체적으로 나타난 것이 아브라함의 때이기 때문에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 그렇게 말한다. 믿음의 조상 그리고 아브라함 때는 언약적인 언약체결적인 방식으로 자기를 나타내셨다. 고기를 놔두고 쪼갠 사이로 하나님이 지나 가셨지요. 그대 아브라함은 깊이 잠들었어요. 하나님이 친히 그 약속에 책임을 완수하실 것을 자기 자신이 고기 사이로 지나 가심으로 거기 나타나셨다. 그리고 처음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하나님이 의로 여기셨다. 거기 처음 하나님이 의존적인 존재로 아브라함을 세우셨어요. 아브라함의 모든 삶은 하나님의 약속이어요. 자기의 생사는 다 끊어지고 죽게 생겼어요. 아무런 소망이 없어요. 그래도 하나님은 약속하신 분은 미쁘시니 그가 다 이루실 것이어요. 그는 먹고 마심이 생명도 아니고 만일 먹고 마심이 생명이면 그도 다른 방법을 택하실 것이고 인간의 성백이 자기 생명의 보장책이면 그도 소돔왕과 언약 체결했을 것이어요. 그러나 세상 백성으로 계산 되기를 거절 했다. 완전히 그는 하나님만 의지하고 그도 죽고 그의 아기도 죽었지요. 그 죽음이 하나님의 약속을 파괴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원히 살아 계신 분이고 하나님은 아브라함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지 죽은 하나님이 아니다. 자기 아내가 죽었을 때까지라도 그는 그의 전 생명의 소망을 하나님께 두고 기업의 땅을 값주고 산다 그렇게 나타나고 있지요.
아브라함의 삶의 모든 목표는 씨와 땅이어요. 아브라함의 믿음의 방식으로 거기 살았어요. 그것이 아브라함의 존재한 이유입니다. 그러니까 새 인류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아담안의 인류가 아니라 아브라함 안의 새 인류의 창조를 하나님을 위해 아브라함을 분리시켰어요. 하나님은 역사를 단절시키지 않기 때문에 아브라함을 새로운 인류로 지으신 것이 아니라 범죄한 인류 중에서 아브라함을 분리시켰어도 그 출생관계를 통해서 온 인류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초자연적인 관계로 개입하심으로 혈육을 따라 난 인간이 아니라 약속으로 초자연적인 인간을 거기 생산하심으로 하늘의 별처럼 땅의 모래처럼 아브라함을 대표자로 하는 믿음의 백성을 생산하실 것을 거기 처음 계시하신 것이다. 그런 말입니다.
그 약속이 상속된 것이 이삭이어요. 그 이삭은 아브라함의 상속자라. 그러니까 그 상속은 혈육을 따라 난 것이 아니라 약속을 따라 난 자가 상속자요. 그리고 그 상속의 성취 완성은 어떻게 되어 있는가. 성취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는 것이고 그리고 그 약속의 완성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것은 야곱이 그 12아들을 낳고 12아들이 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불려지는 것이다. 그럼 야곱은 누구인가? 하나님이 친히 사닥다리 계시로 하나님의 교제를 허락하신 사람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는, 완성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개입으로 되는 것이고 그 약속의 완성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사람의 행동을 따라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택하심을 따라서 자기 백성안에서 성취된다 하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니까 낳기도 전에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리라, 야곱의 선택을 거기 말씀했고 하나님에게서 그 약속을 따라서 야곱을 변화시킴으로 자기 아버지 기업의 땅을 상속하도록 했고 자기만 받은 것이 아니라 야곱 안에서 12아들이 함께 받는다. 12아들들은 초자연적인 개입으로 난 아들들이 아니고 선택으로 난 아들도 아니라 야곱 안에서 모두가 다 함께 받는 것이다. 모두가 다. 그런 의미로 야곱이 하나님의 사닥다리 계시를 통해서 사자가 오르락 내리락 그의 교제를 나타내셨고 그의 교제가 자기 모든 후손에게 나타남이 그에게 나타나 주고 있기 때문에 그 아들들은 자기 아버지의 이름으로 불려진다. 그렇게 약속이 진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아브라함에게 약속했던 약속이 구체적으로 역사안에 성취된 것이 언제인가 그것이 모세 시대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나는 네 하나님이요 아브라함과 함께 하는 하나님으로 약속 했는데도 항상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자기를 나타내신 것이 아닙니다. 가끔 사람의 형상으로 아브라함 장막에도 오셨어요. 얼마큼 가까이 오셨습니까? 그렇기 전에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특이한 표현법은 있어도 하나님이 친히 혈육의 몸으로 장막에 찾아오신 경우는 아브라함 빼 놓고 누가 있습니까? 아담이 범죄한 뒤로도 그늘 밑에 숨었지요. 그러나 아브라함에게는 혈육의 존재 방식으로 찾아오셔서 아브라함과 함께 먹고 마시고 그렇게 하셔요. 그 씨의 약속안에서 찾아오셨지요. 그러나 아브라함 안에서 하나님은 그의 교제를 가장 강력히 나타내십니다. 그래도 그 교제가 항상 있는 교제가 아니어요. 필요할 때 항상 나타나시고 그런 교제지요. 그러나 이제 그 약속의 성취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혈통을 애굽에서 부르시고 시내산에서 친히 하나님께서 친히 불꽃가운데 나타나셔서 그들과 언약 하실 때 거기 구체적으로 이루어 지고 있습니다. 그대부터 하나님은 영원히 이스라엘 백성중에 계신다. 하나님을 항상 볼 수가 있다. 어떻게 천막을 짓고 계시거든요. 휘장을 치고 그때 아브라함 장막은 가끔 나타나시면 볼 것 뿐이요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 중에 계실 때는 항상 볼 수 있어요. 그 대표자가 항상 하나님의 면전에 있어요. 그러나 그 교제 방식으로 가장 강력히 나타난 것이 모세 시대라. 그런 의미로 아브라함의 약속이 역사안에서 구현된 것이 모세 시대입니다. 그런데도 모세 시대 때 하나님께서 함께 한 것은 아브라함 시대하고는 조금 다릅니다. 아브라함 때는 친히 혈육을 입고 오셔서 먹고 마시고 하는 교제 방식 마치 어느 날엔가 때가 되매 혈육을 입고 오셔서 자기 백성과 함께 먹고 마시고 옆구리에 함께 손을 넣어 보고 그런 방식으로 예수님이 오셨잖아요. 그분이 그때 그렇게 오신 것이지요. 그래도 모세 당시에는 그렇게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시내산에서 아주 두려운 불 가운데서 그 불은 하나님의 에덴동산을 지키는 그 화염검을 두루 도는 화염검으로 두루두루 지켰다. 거기 처음으로 거룩함을 나타내고 아담을 쫓아 냈지요. 그 불가운데서 하나님은 나타나셨어요. 그래도 하나님이 자기를 거룩한 불로 나타내셨는데도 아담안에 범죄한 시내산에서도 그 터는 흔들렸고 소멸되지 않아요. 마치 떨기 나무가 소멸되지 않은 것처럼 그건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의 임재인데도 아브라함의 장막에 찾아 오신 것처럼 사람의 형상으로 가까이 오신 것이 아니라 참 손을 만져보고 먹고 마시는 것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가까이 가지 못할 빛가운데로 거기 오셔요. 그래서 대표자만 와라. 그러면서 하나님이 영원히 그들과 영원히 함께 계신 방식으로 하나님이 휘장으로 가리우시고 천막을 치시고 지성소에 계십니다. 대표자로 1년에 한번 잠깐 한번 들어와야지 들어오면 죽어요. 그러니까 얼마큼 가리우고 계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들의 죄 때문에 그렇지요. 그러니까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하나님 나는 네 하나님이요 너는 내 백성이라 내가 너와 함께 하시겠다고 한 이 약속이 모세 시대부터 나타났어요, 이 나타남은 오히려 그들을 강력한 죄가운데 가둠으로 죄가운데 하나님이 교제하는 것이지 아브라함처럼 두려움이 없이 그와 함께 먹고 마시는 방식으로 오시는 것이 아니다. 그 대표자까지도 잠깐 들어갔다 나와야 되요. 오래 있으면 죽고 그리고 항상 들어가 있으면 죽고 1년에 딱 한번 그날에는 굶고 들어가야 되요. 대속죄일에는. 왜 죄 때문에 다 빼앗겼기 때문에 사망이니까. 굶고 온 백성이 다 굶고 그때 한번 들어가야 되요. 그러니 굶음을 통해서 완전한 저주를 나타내면서도 하나님의 심장을 그때 한번 열어보지 잠깐 지성소에 그 대표자를 부르심으로 하나님이 이 죄를 영원히 제거하시려고 너희들을 부르겠다는 약속을 거기에 나타내고 계신 것이어요. 거기 그것이 모세 시대입니다.
그러니까 모세 시대에는 느닷없이 온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의미를 더 밝혀주는 의미로 하나님이 더 해주는 것이다. 심지어 모세 시대 때 있었던 제사의식까지라도 모리아 산의 제사가 그 모형이다. 그 원본이어요.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을 위하여 존재하도록 되었거든요. 그러나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 앞에 봉헌될 수 없습니다. 죄 때문에. 그것을 제일 처음 보여준 것은 모리아산의 제사입니다. 이삭의 생명을 하나님은 요구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씨로서 이삭은 존귀한 존재여도 출생의 방식으로는 이삭도 사람이다. 하나님앞에 봉헌될 생명이 되지 못함이라. 그러니까 대신 양을 거기에 주지 않습니까. 그 제도가 밝혀진 것이 모세 시대에 여러 제도여요. 제사법의 제도들입니다. 그러니까 모세 시대가 아브라함의 시대와 다른 점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항상 계시는 방식으로 저주 가운데 가둠은 아직은 아니라 하는 두려움과 제도가 강력해요. 그래서 잠자다가 침만 흘려도 부정하게 진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고 아브라함 때는 무엇을 먹으라 먹지마라 제한이 잘 안 나타나 있지요. 그러니까 먹는 것도 딱 몇개만 주고 내가 이것 안주면 굶어 죽을 것이니 이것만 먹어라 이것이 너희 생명의 그림자다. 조금 먹어라 더 먹으면 안되어요. 그 먹는 것도 저주가 아직 제거 안되었으니 스스로 죽어 버리면 부정하니 먹지 말아라. 왜 아직 사망이 있기 때문에 사망은 저주다. 먹는 것까지라도 아직 사망에 있어요. 그러니 사망에 여전히 갇혔어요. 모든 것이 생명의 선물인데 딱 먹으면 진 밖으로 나가라 먹으면요. 딱 몇개만 주며 요것만 먹고 나에게 나와와라. 그러니 생명은 사망 가운데 갇혀 있지요. 먹는 것도 죽어버리면 부정하니 먹지 말아라 완전히 갇혀졌어요. 그래도 일부를 구별해서 생명으로 주신 하나님이 모든 것을 구별하신 약속이 거기 나타나 있어요. 일부를 주심으로 또 거기서 사망을 제거할 완전한 자로 자기를 나타내고 계시지요. 그러니까 이제는 항상 계신다는 방식으로 아브라함의 약속의 성취가 거기 있는데도 아직은 죄 때문에 아니라는 저주가 모세의 율법에 전 내용들과 같이 이루고 있어요. 그러므로 예수 앞으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의 기능을 하도록 한 것이 모세 율법이라 그렇게 말을 하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행위언약을 했고 3:15처음 구속의 언약을 했고 그 다음에 언약의 발전으로 노아의 언약 그 다음에 아브라함의 언약 모세의 언약까지 했지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나는 네 하나님이 되리라 하신 목표는 어디 있느냐. 그것은 너희들로 내 법을 따라 살게 하실려고 그것입니다. 창17장에 왜 아브라함을 부르셨는가? 그와 그 후손으로 하나님의 공의로운 법을 따라 살게 할려고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그들을 제일 처음 부르셨을 때에도 하나님이 도덕법을 말씀으로 선포했습니다. 들리는 방식으로 그 법만 특이하게 그렇게 하셨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인격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하나님이 윤리적인 방식으로 하나님의 인격성을 나타내야 되요.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반영해야 되요. 그 거룩한 의지를 십계명 두 돌판에 새기셨다. 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부르셨는가? 거룩한 백성 그 백성으로 구별 하셨는가?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이 되게 하실려고. 그러니까 그들은 그들의 제사장 의식안에 하나님과 교제 하면서 하나님의 거룩한 법을 따라 살아 주어야 합니다. 율법이 나타나 주어야 되요. 그러나 그 율법은 그들에게 이것을 행하면 살리라는 법은 되어요. 어떤 의미로 하나님이 친히 그들을 구별 하셨잖아요. 이제는 그들이 하나님과 교제가운데 거룩하게 분리 되었기 때문에 여기서 거룩은 윤리적인 거룩이 아닙니다. 관계적인 거룩입니다. 이방인은 하나님과 관계가 없어도 유대인은 하나님의 소속으로 분리 되었던 거룩이지 그들이 윤리적으로 거룩하셨단 말은 아니어요. 하나님과 관계 있는 제사장으로서 거룩이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그와 교제로 부르시고 그의 임재를 항상 계신 방법으로 천막을 치신 방식으로 나타나셨지요. 그러면 그들이 그 교제 가운데 사는 방식이 무엇인가? 여러 의식법을 통해서는 부정함을 하나님의 씻음을 덜어주지만 도덕적인 방식으로 하나님의 법을 따라 사는 것이다. 그 법안에 살며는 마치 아담이 그 법을 따라 살면 곧 그것이 생명인 것처럼 그 법을 따라 어기면 돌로 쳐서 죽여야 합니다. 십계명을 어기면 돌로 쳐서 죽여야 합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생명되신 하나님과 교제하는 방식으로 산다는 의미로 울타리가 하나님의 도덕법입니다. 마치 에덴에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아니함이 생명되신 하나님과 교제의 울타리인 것처럼 이제 범죄한 뒤로는 인간안에 죄성이 있기 때문에 여러 도덕적인 항목으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신 것이고 아담이 범죄하기 전에는 그 안에 그러한 죄에 대한 욕구가 없기 때문에 본성적으로 하나님이 사귀셨기 때문에 하나님을 순종함으로 만물을 지배하며는 그것은 완성 되어요. 그러나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의 원리를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에 하나님과 교제가 완전히 단절 되었기 때문에 완전히 거꾸로 되어 있어요. 단지 인간끼리 살도록 세상을 유치하기 때문에 5계명부터는 그래도 양심을 따라 남아 있지마는 그 앞에 4계명 하나님의 계명은 이방인은 완전히 빛이 없습니다. 완전히 거꾸로 입니다. 그렇게 됐거든요. 그래서 유대인에게 하나님의 관계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람과의 관계를 새긴 법을 두셨고 그것을 지키는 것이 그들의 생명되신 하나님과 교제안에 사는 울타리 입니다. 그 법을 어기면 돌로 쳐서 죽여야 되요. 자 그러면 그 법을 지키고 살수 있는가? 만일에 그 법을 안 지키고 거기에 거짓 선지자가 들어오면 거짓 선지자 죽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가짜를 못 가르도록 규정을 지었어요, 그래도 그 법을 따라 살수 있는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아담의 후손으로 옛본성을 따라 살고 있고 정말로 새본성이 주어지기 전이기 때문에 그들이 외적인 강제력을 따라 그 법을 지키니까 이방인 보다는 하나님과 관계로 구별 됐다는 거룩할뿐 아니라 이제는 강제적인 법을 가지고 그들을 통치하기 때문에 이방인에 대해서는 훨씬 거룩한 문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 마음안에는 법이 이루어 지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인격으로 지으셨고 인격적인 교제안에서 우리의 본질이 하나님 앞에 순종하기를 원하지 우리 마음은 따로 있는데 외적인 행동만 구별해 가지고 그런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시는 본질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옛언약 백성들 왜 옉언약인가. 아브라함에게 약속했던 것이 역사안에서 구현된 것은 모세 시대거든요. 그래서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나라로 조직 하였고 그때 하나님의 법을 주셨고 그때 하나님이 그들 중에 영원히 계시고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이 거기 그대로 나타나 있어요. 그런 의미로 예수 오시기 전에 하나님 나라는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그러니까 모세를 통해 주셨던 것은 옛언약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 나라 법으로 약속을 주셨거든요. 돌판에
새긴 법을 옛언약 이렇게 말을 해요. 그러나 그 언약은 육체의 옛 법만 됩니다. 히브리서에 보면 외적인 옛 법만 되어요. 물로 씻고 물로 씻는다고 속이 씻어 지겠습니까? 안되지요. 또 나아가는 것도 사람이 만든 장막 거기까지 나가지 그들 양심이 두려움 없이 하나님을 섬기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분명히 거기 계시기 때문에 교제는 교제인데도 아직 두려움이 제거되지 않는 교제나 예를 들면 아버지가 큰방에 계신데 아버지가 화가 나 있어요. 그때 큰소리가 들려요. 누구도 못나가요. 가끔 큰 형님이나 가보고 아무도 못나가요. 이제 공부안한 동생들 범죄 당사자가 만나면 혼날 것이어요. 글도 가끔 형님을 불로 놓고 동생들 한테 훈계해요. 네 동생들 공부 잘 하라고 해라. 그것도 아버지가 계시긴 계신데 아직 밥상에서는 못먹고 가끔 아버지 밥상에 나온 것 얻어는 먹어요. 그래도 아버지 하고 친히 앉아서 못 먹고 그런 방식이 되며는 그 집안이 의시시 하지요. 분명히 아버지가 계시니 고아는 아닙니다. 그래도 의시시 합니다. 큰 아들도 그런 분위기에 아버지 한테 함부로 들어 갔다가는 혼날 것 이어요. 그러니까 조심 조심 들어가야 될 것이고 그리고 오래 앉아 있다가는 얻어 듣기 쉬워요. 빨리 나와야지. 그런 비슷한 방 식입니다. 하나님이 휘장을 치시고 지성소에 계셔요. 대제사장이 잠깐 나가요. 그리고는 그것 때문에 1년동안 하나님 앞에 제사 할 수 있어요. 1년동안 그래도 직접 못 먹어요. 그리고 백성들은 성소 밖에 있어야 해요. 못 들어와요. 그러니 여러 첩첩 산중이라 그래도 하나님이 거기 계신다. 그런 의미로 생명되신 하나님과 교제 하므로 구원을 받는다. 그러나 누리고 있는 교제의 양은 마치 아버지가 화내서 안방에 앉아 있는 것처럼 분명히 아버지 자식으로 살고 있는 데도 그 교제의 누리는 양은 아직 두렵다. 그것이 구약의 교제 방식이다. 그러니까 옛언약 방식 즉 모세를 통해서 그들을 나라로 조직 하시고 나라의 법을 주시고 그들과 교제 하십니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뜻이 돌판에 새겨 졌습니다. 그 법을 따라 살아야지요. 그 법을 안 따라 살면 그것은 돌로 쳐서 죽여야 됩니다. 그런데 그 대표적인 예가 60만을 다 죽였지요. 광야에서 다 죽였어요. 죽여야 되는데 그러며는 말하자면 여호수아 모세 갈렙은 완전 했는가? 실은 모세까지라도 언약의 중보자로 완전하지 못했다. 그도 죽잖아요. 말하자면 그런 의미로 그러니 모세 당시의 그 법에 능력은 효력은 이스라엘 백성의 외적인 행동을 규제하는 원리로서는 강력해서 마음을 지배하는 원리로서는 권능을 발휘할 수 없다. 왜 그 법을 시행할 수 있는 능력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새 본성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니까 그들은 실패해서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므로 그의 역사가 끝나지요. 그러니까 그 역사가 끝났을 때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31장, 에스겔 36-7장에 나타나지요. 그 당시에는 이스라엘 왕국이 끝날 무렵이어요. 예레미야는 포로로 잡혀가기 전에 눈물로 권고 했던 선지자고 에스겔은 포로중에서 자기 백성을 위로하는 선지자예요. 거기서 보면 새언약에 대한 문제를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새언약이 계속 나와요. 언약 갱신 계속 나오는데 구체적으로 새언약 그 특정한 의미를 강력하게 밝힌 것은 렘 31-33,겔 36:25-26 거기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요엘에도 나타나 있지요. 그 약속은 무엇인가. 이것입니다. 내가 너희들을 포로 된 중에서 끌어다가 고토로 다시 옮길 것이고 내가 너희들을 물로 씻겨서 정결케 하겠다. 물로 씻겨서 정결케 된 것이 아니다. 너희들에게 내가 새 영을 부어 줄 것이고 이제는 다시는 큰 자가 작은 자 보고 하나님을,사람을 통해서 배울 필요가 없고 너희 모두에게 새 영을 부어 주므로 나를 알 것이고 그리고 내 법이 너희 마음판에 새겨지게 할 것이고 다시는 죄악을 거역하지 아니 할 것이다. 죄에 대한 완전한 사죄와 그의 영을 보편적으로 부어 주심과 그의 법이 우리 마음 안에서 이루어 지는 성취를 거기서 이루어 지고 있어요. 왜냐하면 아담안에 옛 본성을 따라 산 인류는 하나님의 율법 자체가 나빠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요구가 나오며는 옛 본성을 거역하게 되 있지 그 법을 따라 살지는 못합니다. 그 법이 이르면 오히려 옛본성을 큰 권능으로 죄가 왕노릇 하도록 되어 있지 그 죄를 이겨 내지를 못합니다. 그렇게 해서 탄식해서 참 구원자 하나님, 우리가 물로 씻은들 피로 씻은들 깨끗함이 없고 내가 외부를 깨끗하게 해도 깨끗함이 없고 다윗이 시편51편에 고백했던 것처럼 자원하는 마음을 주옵소서 정직한 영을 새롭게 주옵소서 주의 성신을 거두지 마옵소서 나룰 물로 씻은들 우슬초로 씻은들 그것이 깨끗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원하는 새 본성을 주시며는 그때에 하나님이 구원의 증거를 모든 사람에게 증거 하리라 거기 시51편에 다윗이 강력하게 기도하고 있어요. 그 탄식을 일으킬려고 법을 주셨던 것입니다. 그 법이 외적으로는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살게 함으로 세상의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증거할 뿐 아니라 그것은 완성적으로 나라는 아닙니다. 왜 하나님이 임재하시는데 두려운 가운데 임재 하시기 때문에 그런 의미로는 참 교제는 아니지요. 분명히 생명의 교제는 구원을 받아도 그것은 두려움이 있기 때문에 그 교제는 거기서 완성되고 있어요. 오히려 그 교제는 밖에 어려움이 더 분노를 일으킨 것이 아니라 아 우리안에 죄의 본성이 더 죄를 일으켰구나 밖에 씻고 하는 모든 것은 우리안에 죄악의 본성을 가르칠려고 그렇게 했구나 그것을 알고 참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새롭게 지어줄 것을 그렇게 함으로 생명이 하나님께 복원될 것을 대망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모세의 율례를 주신 것이고 모세의 율례의 모든 약속은 거기를 바라볼 수 있도록 된 것이어요. 그런데도 그들은 그렇게 보지를 못했습니다. 제사장이 죽습니다. 우리에게 죽지 않은 제사장을 주시면 될 것 아닙니까? 그들의 제사장은 살아 있지를 못해요 죽어요. 영원히 살아 있는 제사장 그런 제사장이 오시면 되지 않겠는가. 그렇게 그림자로 주었는데도 그들은 모르고 나는 죄지으면 큰 소 바치니까 죄끝난다 생각한다. 바울도 그랬지요. 나는 율법으로는 흠이 없도다.이렇게 양심이 화인 맞아 버렸지요.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깨서 언약 백성으로 분리 시켜서 모세 당시에 나라로 세우시고 거기 나라에 법을 주셨을 때 그 법은 그들 마음안에 성취될 수 있는 법이 아니라 그 법을 따라 살면 하나님의 교제 안에 있고 그 법을 따라 살므로 세상에 거룩을 증거하고 그 법을 따라 살면 하나님과 교제 가운데 있어도 그들 법이 마음안에 성취된 방식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결국 실패했다. 하나님께 그것을 돌이켰을 때는 그 땅 그들 옛 땅에 심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새 본성을 안주시면 안된다. 그러니까 내가 새언약을 세우시겠는데 이제는 새 영을 부어 주겠고 모든 사람이 나를 알 것이고 이제는 다시는 죄악을 기억나게 하지 않겠고 내 법을 그들 마음판에 새겨서 내 법이 그들의 생명이 되도록 하리라. 돌판에 새간 그런 강제적인 것이 아니라 마음판에 새겨서 그 법이 생명의 원리가 되도록 하리라. 그렇게 새 본성을 주실 것을 약속하고 있는 것이 하나님께서 모세의 율례를 주셔서 총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이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기 갈라디아서를 보면 성령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 그런 내용입니다.
한가지 중요한 것은 모세에게 그 약속을 하셨는데 그 다음에 다윗에게 약속하셨지요. 사무엘하 7장 거기서 보면 네 후손이 영원히 너를 견고케 하리라 사울에게 빼앗긴 것처럼 빼앗기지 아니하고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 다윗의 왕권을 영원히 견고케 한다고 그렇게 말하고 있지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본래가 왕이셔요.하나님은 만왕의 왕이시지요.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도 왕국의 형태로 발전할 수 밖에 없지요. 그렇게 했을 때 이스라엘 백성이 추구하는 왕국이 세상 왕국이 되지 않고 하나님의 왕권을 구현하는 왕권이 되게 해 달라고 사무엘서를 통해서 선지자를 세우셨습니다. 그래서 그 왕국이 하나님에 의해서 율법의 통치를 받도록 그리고 첫 왕이 사울인데 하나님에 의해서 사울은 이스라엘 백성이 추구하는 인간 왕국입니다. 그 왕국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실패 했지요. 하나님의 뜻에 맞는 것은 다윗이요 다윗에게 기름 부으시고 그 나라의 영원한 왕국을 다윗 왕권을 통해서 나타나기를 기뻐하셨습니다. 그래서 사사 당시처럼 일시적인 왕이 아니라 세습적인 왕으로 영원히 살아 있는 왕권 그 왕권을 세습적인 왕으로 거기 나타내십니다. 그 왕국의 법은 선지가가 증거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선지자가 말하자면 그 왕국의 교사로서 거기 서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이 이처럼 왕권을 거기 나타내고 이제는 다윗의 후손을 통해서 영원히 살아 계신 하나님 영원한 그 왕권을 구현을 기뻐했을 때까지라도 인간은 참으로 믿음가운데 살지 못해서 권력이 자기에게 돌아오면 극대화 시키므로 반드시 타락합니다. 그것이 솔로몬이 말을 많이 두므로 하나님을 의뢰하지 않고 인간의 권세를 의뢰했고 하나님을 의뢰하지 않고 앗수르와 이집트의 권세를 의지하므로 망했습니다.
교회는 솟아오른 성곽처럼 하나님을 의뢰해야 하는데 그들의 요새를 의뢰하고 그런 방식으로 이스라엘 백성 맞는 것이 아니라 그래서 다윗은 말의 힘줄을 끊고 그는 그가 행했던 모든 것은 하나님을 봉헌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성소를 짓는 방식으로 유인되어 있지 솔로몬처럼 자기 왕국을 강화 시키는 방식으로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씨로 오신 분 그분은 누구입니까. 그분은 다윗의 왕통을 이으실 분이다. 그런 방식으로 계속되고 이제 그 왕국이 잘못해서 하나님이 율법아래 바르게 살지를 못했지요. 왜 그들에게 새 본성을 주시기 전이었기에 그들은 적어도 실패로 끝나고 이제 하나님께서 때가 되매 자기 혈육으로 잇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관계에 있어서는 아담과 같은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제 2의 아담 둘째 아담이라고 말을 합니다. 마지막 아담이지요. 만일 아담이 범죄하지 않았다면 인류는 순종으로서 순종으로 그렇게 발전할 것입니다. 아담이 범죄함으로 하나님이 역사의 구속의 방식으로 개입하시는 것이지요. 그러기 때문에 역사에 개입하신 하나님은 아담의 자리를 취하기 전에는 인류를 구원하실 수 없습니다. 첫사람이 범죄 했기 때문에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도 첫사람의 자리를 취하기 전에는 인류를 구원하실 수 없습니다. 그 첫 사람의 자리를 취하셔서 조약을 갱신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친히 오셔서 그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아담이 범죄 했던 저주를 다 그가 담당하시고 그만 그 죽음을 담당할 인격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값으로 죽지 때문에 죄값을 담당하지 못합니다. 천사들도 인간의 대리자로서 그 무한한 공로를 담당할 대리자가 아닙니다. 하나님만 그 죄를 제거 하십니다. 그리고 사람만 그 죄의 형벌을 받을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중보자는 하나님이시고 사람이셔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이 혈육이 되셔서 친히 아담의 자리에서 저주를 받으셨고 그리고 아담의 자리에서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참다운 순종이 인간의 생명입니다.
온전한 순종도 참 생명이여서 하나님은 아들을 성령의 권능으로 살리셔서 보좌우편 곧 하나님의 자기 혈육을 입은 그분이 하나님의 자리에 설 수 있도록 새 인류의 조상을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아담이 범죄 안했으면 인류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그리스도의 영을 따라서 발전할 것이어요. 이제는 예수님께서 친히 개입 하셔서 친히 아담을 따르는 인류의 종족을 따르는 그런 개입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씨 안에서 개입한 것처럼 초 자연적인 출생으로 혈육을 입으셨기 때문에 그는 죄 하고는 무관하고 그렇기 때문에 죄인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이고 그래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혈육을 취하신 것이어요. 아담의 혈통이 아니어요. 그도 아담의 종자면 아담의 후손이라 여전히 인류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초자연적인 개입으로 하나님께서 새인류를 지으신 것이어요. 그러니 우리는 아담의 코에 생기를 불어 넣어 주셔서 사는 그런 방식으로 인류가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이 혈육을 입으신 방식으로 새 인류요 혈육안에 하나님이 계신 방식으로 새 인류의 조상으로 예수님이 오셨고 그는 죽음의 권세를 벗는 방식으로 보좌 우편에 계십니다. 그리고 그의 영을 부으셔서 이제 교회가 새 인류인 것은 흙으로 지으셔서 생기를 불어 넣어서 생령이 된 그런 존재 방식이 아니라 친히 하나님이 혈육을 입고 우리와 함께 계신 방식으로 하나님이 함께 한 방식으로 새 인류의 존재 방식이요 이제는 성령으로 산다. 그의 영을 부으셔서 예수님게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참 생명으로 계신 것처럼 예수님의 존재 방식이 우리 존재 방식이 될 수 있도록 그의 영을 부으셨다. 그러니 흙으로 지으셔서 생기를 불어 넣은 그런 방식이 아니다. 우리같은 죄인을 새롭게 창조하신 분으로 그가 그의 성령을 부으셔서 아버지는 내안에 나는 아버지 안에 있는 것처럼 너희들은 내안에 나는 너희들 안에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는 교제 방식으로 그의 영을 부으셨다. 그러니까 우리는 아담안에 옛본성을 따라 사는 인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을 따라사는 새 인류다. 새로운 인류를 지으셨다. 아브라함의 혈통으로 새 종족을 지으셨다. 누구든 아브라함의 씨로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그 분이 아브라함의 신령한 후손으로 오셨고 그리고 다윗의 왕권 하나님을 순종하는 교회, 하나님을 순종하면 하나님의 나라이거든요. 그렇게 할려고 그의 영을 부으셨다. 그의 영을 부으셨기 때문에 다시는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을 배우지 않는다. 구약때는 제사장이나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을 배우고 백성에게는 그 말씀이 없습니다. 제사할 때는 제사장을 통해서 하지 그들 스스로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아들의 영을 친히 부으셨기 때문에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을 따라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고 어느 목사를 통해서만 독점적으로 하나님을 뵈오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책이고 누구든지 진실된 마음으로 읽으면 예수님의 주 되심을 알고 목사를 세우심은 교회가 그 동안에 장성한 분량으로 성숙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은혜를 더 밝히 가르칠 수 있도록 가르쳤지 목사를 통해서만 꼭 구원을 받은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영을 보편적으로 부으셔서 다 하나님의 나라요 새 본성을 주셨다. 그렇기 때문에 다시는 죄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휘장을 가리우고 멀리 계신 것이 아니라 대표자가 들어가면 죽는 방식으로 계신 것이 아니라 대표자가 영원히 살아 계시고 대표자가 사람이 만든 그림자가 아니다. 친히 하늘 보좌에 사람이 하나님 자리에 앉게 하심으로 그 대표자의 자리가 아니라 우리의 자리다. 그러니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때 양심의 아무런 가책이 없도록 완전한 자유자로 세우셨다. 그럴 뿐만 아니라 아들의 영을 부으셔서 하나님의 법이 우리안에 생명이 될 수 있도록 능력으로 역사하셔서 이제는 하나님의 법을 이룸이 탄식이고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이 이루며는 그 율법이 우리안에 죄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고 깨끗함을 일으킨다. 율법은 우리를 괴롭게 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죄에서부터 자유케 하는 주범이 되는 것이다. 왜 성령이 오셨기 때문에 성령이 오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의 임하심 곧 그것이 구속의 종말이다. 하나님이 친히 그의 영으로 우리에게 함께 하심 그렇게 해서 예수님을 새언약의 중보자 그리고 예수님께서 친히 새언약의 중보자로서 그 언약을 우리에게 허락 하셨을 때 이것은 새언약의 피요 그리고 이것은 그가 떡을 떼시면서 이것은 내 몸이요 그의 몸과 피를 주셨다. 이스라엘 백성은 어느 누구도 피를 먹지 않았다. 왜 피는 참 생명이기에 어는 누구도 하나님이 교제해서 제단에서 먹게 하셨어도
피를 안 주셨다.
왜 참생명은 안 주셨으니까. 그러면서도 그 생명이 하나님께서 봉헌 될 것을 제단에 뿌림으로 약속하셨어요. 아직은 너희들에게 없다 안주셨습니다. 대제사장도 못 먹었어요. 그러나 예수님은 어느 누구도 먹지 못할 인자의 살과 피를 주셨다. 짐승의 피가 아니라 내 살과 피를 먹고 마셔라 아들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산 것처럼 나를 먹는 자는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나님 아버지가 아들되신 예수님의 생명인 것처럼 곧 예수님께서 우리의 생명이니 그의 살과 피를 우리에게 주심으로 새언약을 제정 하셨다. 그래서 우리가 성찬식을 그렇게 시행하고 있는 것이어요. 그것이 새언약이지요. 그러니까 예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 그가 친히 혈육을 입으시고 그의 영을 부으심으로 하나님이 영원히 함께 하신 그런 구원이 우리에게 이루어지기 때문에 다시는 우리안에 진리를 가르치기 때문에 가름부음이 각자 안에 있으니 사람에게 가르침을 받을 필요가 없다. 그런 의미로 성경을 배울 필요가 없다가 아니라 하나님을 아버지로 경외함에 있어서 기름 부음이 우리안에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완전한 통치로 부르시기 때문에 예수님이 오시면 예수님처럼 순종한 인류가 역사를 채울 것이어요. 바로 그 능력으로 성령은 우리안에 오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법을 따라 사는 것이 은혜 받은 확실한 증거라. 그것도 외적인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사랑 하는 것이 참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그러면 이 새 계명은 무슨 계명인가? 분명히 율법에 말하기를 마음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 그것이 율법의 강령이라고 되어 있는데 왜 그것을 새 계명이라고 그러는가. 그것은 분명히 옛계명인데 왜 새 계명을 주노니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들도 사랑해라 그렇게 말하는가.
그것을 요한1서 2장에서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제 어둠이 지나고 빛이 이르렀다. 예수님께서 친히 참 빛으로 오셔서 그 사랑의 계명을 다 성취하셨어요. 그가 그 영을 부으셨기 때문에 이제는 옛 계명이 아니라 새 계명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나님의 형상의 반영으로 우리가 서로 사랑할 수 있다. 왜 그의 영이 우리안에 계시기 때문에 그가 나를 사랑하신 사랑은 형제에게 반영 할 수 있다. 그전에는 조금 전에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법이 분명히 주어졌어도 완전한 인격적인 교제 방식으로 우리안에 성취될 수 없다. 왜 성령을 부으시기 전이었기 때문에. 그러나 예수께서 이제는 그의 영을 따라 사는 백성들을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그가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으로 형제를 사랑하는 참다운 계명이 우리안에 이루어질 수 있다. 마음이 이루어 질 수 있다. 그런 의미로 이것이 새 계명이다라고 요1서 2장에서 설명을 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다시 옉언약처럼 소나 양을 잡아서 하나님앞에 나아가면 안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림자적인 방식으로 그 교제를 나타낸 것 뿐이고 그는 영으로 우리안에 계시고 다시는 그런 의식으로 돌아가면 안됩니다. 그러며는 왜 도덕법으로 다 완성했는데 그러는가. 완성했으므로 우리에게 완성되도록 하신다. 의식법도 완성했으므로 우리가 예수 이름으로 하나님앞에 직접 나가게 하시고 또 도덕법도 완성했기 때문에 그 도덕법이 우리안에 그 능력으로 실제적으로 능력으로 이루어지게 하셨다. 실제로 이루어 지도록 그러니까 하나님의 법을 따라 살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는 것은 아니다 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지요.
그 법은 우리를 자유케 하는 법이지 괴롭게 하는 법은 아니다. 만일 하나님의 법이 우리를 괴롭히면 옛 관성의 발동이고 하나님을 대항하고 저주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우리들이 그런 경험을 바르게 할 수 있는가? 여러분들은 솔직하기 때문에 하나님 저만큼 계십시요 내가 지금 반사고,전도사고,다 깨끗하다고 알고 있는데 내가 지금 진짜인가 가짜인가 봄철도 되니 싱숭생숭 한 것도 같고 조금 검토 좀 해 볼렵니다. 하나님. 그러고 눈을 지긋이 감고 있으며는 옛날에 죄들이 활동 사진처럼 지나가요. 하나님 조금 계십시요. 내가 얼만큼 변했는가 볼까요. 진짜인가 가짜인가 괜히 남은 구원하고 나는 지옥가면 안되니까. 보니 하나도 깨끗한 것이 없어요. 눈물 흘리므로 깨끗해진 것으로 알고 있어요. 주여 ! 내가 이렇습니다. 주여! 그 눈물이 속여요.
믿음만 인간의 생명 존재 방식이어요. 믿음만 우리를 거룩케 하는 것이고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안에 살 때만 그것이 우리안에 생명의 깨끗함이지 하나님 저만큼 계십시오. 내가 이만큼 그어서 나는 자존하는 존재로 검토 좀 해 보렵니다. 하나님을 따라서 인간의 깨끗함이 없다. 그런 율법주의 회의에 속지 말아라 그 말입니다. 내가 청년인데 딱 끊어야지. 내가 이렇게 살수 없어서 조용히 검토 좀 해 볼렵니다. 며칠 굶고 죄를 깊이 복습한다. 그것이 율법이 우리를 속이는 것이다. 죄는 꼭 더러움을 일으켜 내는 것만 죄를 일으켜 내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 죄의 비밀이다. 인간을 자존적인 존재로 생각하는 것이 죄의 비밀이어요. 우리의 생명의 비밀은 하나님 앞에 의존적인 존재 그가 내 안에 나면 그 안에 그의 기쁘심은 내 생명이고 그를 떠나서 나는 설명할 수 없도록 그를 바라보고 있어야 해요. 그러면 그 모든 것은 깨끗케 하는 것이고 거룩해요. 감사하게 하고 우리가 정말 무한한 자의 힘을 느끼고 살아요. 그러나 우리가 그 믿음 가운데 산지를 못하고 인제 이만큼 컸으니까 하고 하다보면 그냥 그 일을 파괴하는 형식으로 들어 옵니다. 그러니까 종교 의식을 집행해서 우리를 깨끗케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외도 이스라엘 백성이 그 방식으로 커 왔기 때문에 어떻든 하나님의 섭리가 어렸을 때에는 소꿉장난 한 것처럼 그런 방식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훈련 시키셨으니까 지금도 조금 필요한 것 아니냐. 왜 역사안에서 율법시기가 있고 복음 시대가 있으니까. 아브라함의 약속하신 예수님이 오시도록 하나님의 오심이 무엇이고 함께 하심이 무엇인가를 모세 시대 때 강력하게 나타냈거든요. 이방인에게 없는 강력함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의 보존책으로 주신 것이지요. 강력하지요. 그랬으니까 그 역사가 지금도 반복되서 이제 새로운 사람에게는 그렇게 가르쳐야 하느냐. 십일조도 하는 법도 가르치고 주기도도 외워야 되고 그리고 목사가 심방가면 방석을 이렇게 놓고 생일감사 하면 저렇게 하고 이를 죽 가르쳐야 신앙이 들지 이런 의식이 없이 그저 단순한 복음만 선포하고 또 그 사람이 소속감을 같도록 어느 구역에 묶어주고 또 무엇인가 심방도 하도록 하고 여러분 아기들도 떠들면 학교가면 분단장도 시켜주어요. 아기들을 학교같이 그렇게 하면 까불은 아이들도 조용해요. 왜 남을 지배하는 개념으로 조용히 해 이 녀석들아 하고 나는 조용 하거든요. 아 그렇게 하니까 신앙이 성숙하지를 않느냐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그 사람 우리교회 나오지 않을 사람인데 그렇게 몇년 하다보니 지금은 그렇게 훌륭한 신자가 되었으니 그전 방법이 좋았던 것 아니냐. 그래서 죄도 그냥 회개 하라 하면 모르니까 글로 써봐요. 그리고 성경이 깊은 바다에 던지니 물에 태워보고 하나님이 내 죄를 이겼으니 그 표를 보면 우리 마음이 깨끗하지 않느냐 또 범사에 감사하라 했으니 헌금 종목을 많이 만들어야 하겠지요. 그리고 감사한 것도 일기책에 한번 써보고 그러니 좋은 것만 감사하고 나쁜 것은 감사한 것 아니라 그 묘한 방식으로 들어와요.
범사에 감사하라 한 것은 우리 존재 방식에 대해 감사하라 한 것이어요. 하나님이 창조자요. 그가 내 안에 구속자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몰라도 가장 자비로우시고 가장 선하신 분이시라.범사에 감사해라.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예수께서 죽으셨을 때에도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 하나이다. 그것이 우리 존재 방식이다. 단순히 그것이 1년중에 좋은 일이 생겨서 감사한 것을 써보라 한 것이 아니라 그런 율법 의식을 도입함으로 인간 신앙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말하기를 어린아이들과 새로 믿는 신자에게 그림 같은 것을 가르치면 좋지 않겠는가. 그 답에 말하기를 하나님도 이스라엘 백성을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다.
왜 너희들이 하나님 보다 지혜로울려고 그러는가. 하여튼 율법의식이 많으면 많을 수록 하나님의 복음은 멀어지고 파괴된다. 하나님의 복음이 증거되면 성령은 참 신으로서 우리안에 새 창조를 일으키신다. 하나님의 새 창조 질서를 못 믿기 때문에 사람만 바라보고 교육적인 방법으로 설득할려고 하지 때문에 그런 교육 방법이 시청각 교육을 도입한다고 그렇게 설명들을 해요. 하나님이 친히 예수그리스도를 증거 하며는 성령은 예수를 영화롭게 한 분이라 친히 하나님이신 성령께서 우리안에 하나님의 일을 증거함으로 우리 본성적으로 아멘 하도록 가르치신다. 설득이 되고 믿어지고 하는 것이 아니라 본성적으로 믿어지도록 우리를 그와 교제로 믿음의 존재로 변화시킨다. 그러니까 바울이 복음외에 증거 안했다. 그 말입니다. 단지 설명하는 방식은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겠지마는 복음의 내용을 변질 시키거나 복음의 내용책으로 다른 것을 도입하면 안된다. 죄를 끊은 것은 도덕적인 훈련이 아니라 새 창조의 능력이고 하나님 앞에 인격적인 결단이지 훈련이 아닙니다.
문화적인 세례는 훈련이지만은 물론 문화적인 문제도 죄가 끼어 들어 있어요. 죄인가 아닌가 하는 것은 그 윤리적인 영역에 있어서 죄 아니면 의여요. 중립은 없어요. 항상 끼여들지 만은 그러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인격적인 결단에 있는 것이고 단순히 이것을 훈련으로만 생각하면 안되는 것이다라는 것을 우리는 이해를 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율법이 지금도 반복되고 은혜에 도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친히 구원역사 안에서 이스라엘 안에 자기 역사를 나타내셨고 그 약속에 성취 되어서 오셨기 때문에 다시는 옛 방식으로 우리중에 오시지 않고 계시지도 않는다. 개인에게서도 반복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 말입니다. 죄를 한참 깨닫고 구원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음을 증거하면 복음안에서 하나님은 친히 새 창조의 역사로 우리 마음을 바꾸시고 우리안에 그의 거처를 함께 하시는 교제를 이루신다. 여러분이 다 죄를 깨닫고 구원 받아요. 여러분이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도록 다 죄를 깨닫지 못합니다. 그때까지라도 모른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그렇잖아요. 무슨 죄를 깨달아요. 죄는 하나님과 관계에서 죄여요.
그전에 내가 도적질하고 닭을 훔치고 무엇을 훔치고 죄를 외움으로 죄를 깨닫는 것이 아니라 죄를 하나님의 영광을 파괴하는 것이 죄의 본질이다. 그것을 어느 피조물이 할 수 있어요.
그런 거짓말에 속으면 안됩니다. 하나님이 복음을 증거하면 그 복음이 우리를 회개케 하고 복음안에서 우리안에 친히 임재하시고 우리를 날마다 주님의 거룩을 사모해서 바울처럼 탄식하면 전진하도록 하십니다. 날마다 달음질 하도록 그것이 우리의 거룩이고 우리의자유여요. 하나님이 우리를 영원히 새로운 피조물로 지으시고 완성하셔요. 자 그렇게 하면 이역사가 끝납니다. 예수님께서 새언약의 중보자로 오셨을 때도 그것을 나타내는 것이 4복음서 이지요. 오셨을 때도 자기 자신이 누구로 오셨는가를 여러면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은 유대인에게 약속하신 왕이다. 그러니까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그리스도의 세계라. 그 다윗의 왕국이 끊어져서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가고 다시는 왕국을 이루지 못할 만큼 이방의 권세가 온 이스라엘을 짓밟았어도 하나님은 그 약속에 진실하셔서 다윗의 왕통을 끊어버린 적이 없고 그 왕통으로 참 왕이 오셨다. 그렇게 해서 구약의 성취자로 예수님 오셨다 하는 것이 마태복음의 내용이어요. 그래서 구약 인용이 가장 많습니다. 그리고 마가복음은 말하자면 로마 사람들을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그는 능력 있는 왕이신대 세상 왕처럼 다른 사람을 지배하는 왕이 아니라 자기 백성을 섬기고 목숨을 주는 왕으로 오셨다. 그러나 그는 능력있는 왕이어서 그가 말씀하심은 즉시 이루시더라. 첫 창조도 그가 말씀으로 이루셨는데 오셔서 그가 병자를 고치실때 말씀하시매 곧 이루시더라. 그가 창조 회복 자로서 참 하나님으로 오셨다. 그렇게 마가복음은 이야기 하고 있지요. 참 권능은 죄에서 해방의 권능자지 사람을 지배하는 권능은 아니고 그는 그 권능을 시행하실 때 불수레를 타고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의 형상을 입고 고난받아 죽으심은 왕으로 오심으로 자기 백성을 죄에서 해방 시키는 왕이시다.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 마가복음의 내용이어요. 누가복음은 헬라인을 대상으로 기록한 것인데 인간의 기원이 무엇인가 예수님은 참으로 둘째 아담으로 오셨다. 그렇게 예수님으로부터 아담까지 기록 누가복음의 족보가 그렇지요. 그는 참으로 사람으로 오셨다. 참 사람으로 그는 둘째 아담으로 오셨다. 참 사람이기 때문에 인생의 고난을 동경하려는 분이시다. 그래서 제사장 가문의 역사를 먼저 말하지요. 세례요한도 제사장 가문이지요. 그 역사를 이야기 함으로 3장에서 예수님, 아담, 하나님 이렇게 함으로 그가 인생의 고난을 동정 하려는 참 사람으로 오셨다. 그가 참으로 고난 받으심을 통하여 인간은 모든 고난에서 구원하시는 분이시다. 이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에 가장 동경하는 기사가 많아요.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도 그렇고 연명 문둥병자 고치는 기록도 그렇고 또 아들 찾는 비유 양을 찾는 비유도 그렇고 또 심지어 베드로에게까지라도 베드로야 내가 너를 위해 기도했으니 돌이키는 형제를 굳게 해라. 베드로의 약함에 동경하는 기사도 거기 있고 그러나 마태복음은 그런 기사가 아니어요. 왕적인 기사여요. 그러니까 동경의 문제가 되는 것은 누가 복음을 보아야 하지요. 그는 참으로 혈육을 입으셨기 때문에 우리 인생을 동경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는 참으로 사람이 되셔서 몸으로 친히 우리 고난을 체휼 하셨고 그는 그 몸으로 부활하셔서 우리죽을 육체까지라도 그의 영원한 몸으로 새롭게 하시는 참 구원자 이시지요. 예수 그리스도가 혈육을 입으심으로만 인간은 참으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새롭게 될 것입니다. 둘째 아담인 예수안에서 하나님을 순종하는 참 인류가 거기 출생되고 회복되는 것이어요. 그리고 요한복음은 그의 신성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표적이지요. 그가 하는 모든 일을 하늘의 실제를 땅에 구현하는 표적입니다. 그래서 하늘 하는 것을 장소적으로 저기 하는 것이 아니라 모세가 보았던 궁전이 있는데 그 궁전을 만들려고 하니까 모형으로 조금하게 지었다. 하늘 식양대로 지었다 하는 말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하늘 하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 영역을 말하기 때문에 하나님과 교제를 말해요. 참다운 하나님과의 교제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아들과의 교제여요. 독생하신 하나님, 하나님 품속에 계신 하나님 하나님의 참다운 교제는 하나님의 아들안에 있어요. 그 완전한 교제의 실제를 교회에 주셨다. 왜 하나님이 친히 언약의 중보자로 오셨는가. 자기 자신이 보증자이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 혈육을 입고 오심으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산것처럼 너희들은 나로 말미암아 산다.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너희들도 나와 하나다. 그렇게 하므로 하나님의 심장의 교제를 우리교회에 허락 하심이어요. 그런 의미로 하늘의 모양대로 그렷다 그 말이지요. 그러니까 나타난 모든 형상들은 예수그리스도를 증거한 것이다. 거기 하늘에 그런 집이 있는데 여기 모형으로 그린 것이 아니라 하늘의 식양대로란 말은 그런 말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자기 심장을 열어 보셨어요. 하나님의 자기 교제를 자기 아들 하나님이 친히 혈육을 입고 오셔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그렇게 하나님은 우리중에 자기를 주셨지요.그러니까 하늘의 실제를 땅에 가져 오신 분이다. 그는 태초에 말씀이시요 그는 세상에 빛이셨던 그분이 혈육을 입고 오셨으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아들을 믿으면 참 생명을 얻는 것이다. 왜 하나님이 혈육을 입고 오셨으니 완전한 교제 가운데 서는 것이다. 그렇게 요한복음과 요한서신에 그렇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어요. 그래서 거기 보며는 처음부터 나왔을 때도 내가 성전이다.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만에 세우리라 자기 육체적인 죽음 안에서 참다운 교제가 이루어질 것을 거기 그렇게 말씀 하시고 그리고 요한은 그 사닥다리를 보았는데 하나님의 인자위에 하나님의 사자들이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았다. 하늘의 교제를 땅에 가져오신 분으로 거기 그렇게 설명하고 야곱의 샘보다 더 큰 분으로 내가 생수를 주리니 너희 배에서 다시는 목마르지 않은 강이 흐르니라. 그렇게 참 생명을 주신 분으로 자기 자신을 계시하시고 그것이 요한복음의 내용이어요. 언약의 중보자로서 오셔서 실천하신 그분의 성취가 복음서에 나타나 있는데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런 말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일은 단순히 옛 세계를 심판할 심판으로 개입한 것이 아니다. 새 인류를 창조하심으로 오신 것이다. 그러니 여인의 후손으로 오신 분은 바로 이분이다. 아브라함의 씨로 오신 분이다.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새 인류를 지으실만한 이루실만한 분이다. 그분이 친히 영육을 입고 마리아 태를 통해 오셨지요. 그러므로 하나님이 인간과 함께 하는 구원하는 일이 여기에 이루어 졌다. 여기 점점 밝아져요. 이제까지 역사가 발전하는 것처럼 이 구원 역사도 점점 발전적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지으신 이 자연 세계가 최고의 기능을 발휘할 때 말하자면 예수님도 재림하셔서 그의 세계를 완성하시는 방식으로 그래야 참생명의 눈으로 우리가 보지요. 그런 의미로서 말하자면 하나님의 일을 말하고 있는 것이어요. 계획을 바꾸었다 그런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의 일을 거기에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 정리 ===
창조에서 아담 그리고 아브라함으로 넘어가서 아브라함의 약속이 모세에게 이루어지고 그런데도 이루어지는 것은 그림자적인 성취다. 오히려 하나님의 저주가 강력하게 나타나 있다. 그것은 완전한 성취가 없다. 왜 새 본성을 받기 전이기 때문에 이제 예수님 오심으로 새 본성을 가지신 인류가 오셨다. 그리고 그의 본성을 그에게 부으심으로 이젠 아담을 닮은 인류가 아니라 예수님을 닮은 새 인류가 교회다. 예수님과 같은 완전한 순종이 교회안에서 이루어 진다. 그 교제가 더구나 우리들은 지금 종교 생활 안에서까지라도 옛언약의 방식을 교회안에 끌어 들어오면 안된다. 그 의식법들은 의식적인 활동들을 친히 그의 영으로 우리에게 역사하시니 복음들을 증거하고 우리가 성경을 해석하며는 우리는 완전한 인격적인 존재로 하나님을 반영하는 존재로 서 있다. 하나님의 언약이 우리의 생명이지요. 그런 흐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