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란 하나님의 구속사업에 대한 인간의 자발적인 응답이라고만 이해하기보다는 하나님이 먼저 인간에게 예배할 수밖에 없도록 하셨다는 점이 더 강하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자기 자신이 구주이신 것을 인간들이 알아주기를 촉구했고, 또 그것을 자백하고 인정하도록 하는 타의적이고 강압적인 의미가 인간의 자발적인 행위보다 강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역사를 강조하고 드러냄으로 해서 우리의 예배가 우상숭배가 아니라는 것을 역설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예배는 복음을 다시 듣게하고 그 복음이 재 활성화됨으로써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이 재현하시고 다시 역사하셔서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곧 우리와 우리세대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복음으로 재현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란 한때 역사 속에서 외쳐졌던 복음의 메아리가 아니고 지금 바로 외치는 기쁜 소식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배에서 역사적인 사실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직접 재현 하셔서 다시 말씀하시는 것을 듣는 것입니다.
예배에서 인간이 할 근본적인 응답은 하나님의 존귀와 영광의 찬양이요 감사의 찬송인 것이다. 즉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과 그의 영광에 합당한 찬양, 그의 사랑과 인간 구속의 역사에 대한 우리의 감사의 찬양이 예배의 어느 것 보다도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어야 하며 이것이 곧 음악이 예배에서 차지하는 가장 중요한 위치입니다. 그러므로 "영이신 하나님에게 영적인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다른 무엇보다도 신령한 음악으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요4:24).
음악은 세상적이고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예배는 성령의 역사가 충만한 곳에서 있을 수 있습니다. 예배에서 성령의 역사가 충만해 지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나 또는 기계적이거나 물리적인 힘으로 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주시는 은사로만 가능한 것입니다.(요14:15-26, 롬8:26, 히브리7:25)
1. 음악은 영감적인 것입니다
고대 철학자들은 음악이 인간의 심성 즉 성격형성과 인간의 영혼에 크게 영향을 주는 것으로써 인간을 도덕적으로 타락하게도 하고 또는 정신적으로 성격적으로 건강한 사람으로도 만들 수 있는 대단한 위력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Plato는 "한 나라의 음악을 제정할 수 있는 모든 권리를 나에게 준다면 나는 누가 그 나라의 법률을 만들든지 상관하지 않겠다"고 했으며 동양의 순자는 "한 나라의 정치가 잘되어 가는지를 알려면 그 나라 사람의 음악을 들어 보면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들은 모두 음악이 인간의 품성 형성에 지대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고대 희랍에서는 학교에서 가르칠 가장 중요한 두개의 교과목으로 음악과 체육을 국민 기본 교육에 넣었습니다. 심지어는 음악을 통하여 사람의 병도 고침을 받을 수가 있다고 생각하여 당시에는 희랍에서 음악요법(musictherapy)도 성행하였습니다. 이들의 이와 같은 사상은 지금까지도 변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요즘에는 음악 치료법을 전문으로 가르치는 학교도 있습니다. 또 음악은 우주적인 언어라고 우리는 바꾸어 말할 수 있습니다. 영적인 하나님에게 영적인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영적인 언어인 음악으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고 봅니다.
Martin Luther의 가치관에서 음악은 신학 다음이었습니다. 그는 종교개혁과 함께 평신도 전체가 함께 찬송가 부르는 것을 시작하였고 음악을 학교 교육의 필수로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음악을 충분히 공부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목사의 안수를 주지 않았습니다. Luther는 예언자에게 하나님의 성령이 충만케 되는 것도 음악을 통해서이고, 또 이스라엘 왕 사울의 경우처럼 음악을 통해서 그의 마음 속에 있는 악신을 내쫓을 수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음악은 어떤 무엇보다도 가장 밀접한 관계에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실상 Luther가 종교 개혁 후 그가 가서 설교하는데는 어디서나 많은 군중들이 몰려 들었는데 그것이 그분의 훌륭한 설교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그의 찬송의 힘이 더 컸다고 하는 기록을 읽을 수 있습니다. 교인들이 찬송가를 부르지 못했던 그 당시의 천주교회와 찬송가가 큰 역할을 하는 지금의 부흥회를 비교해 볼 때 그러한 기록이 과장이 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Luther가 가진 교회음악에 대한 이와 같은 철학으로 인해 그가 종교개혁을 통해서 세계문화사 흐름의 방향을 바꾸어 놓은 것과 같은 큰 영향을 음악사에 남겼다고 볼 수 있습니다.
2. 교회음악에 대한 Calvin의 사상
16세기에 John Calvin(1509-1564)이 새로운 교회를 시작할 때에 그는 교회에서 악기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찬송가도 못 부르게 하였고, 오직 시편가만을 부르도록 제한하였을 뿐 아니라 교회의 오르간도 부수었습니다.
Calvin은 찬양의 노래란 사람의 가슴속에서 울어 나오는 신실한 노래로써 단순하고 순수한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구약에서 악기를 쓴 이유는 그들이 아직도 유치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는 가장 단순한 형식으로 예배드려야 하고 구약시대를 지금 와서 흉내낸다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Calvin은 Bourgeois라는 사람에게 단순한 멜로디로 부를 수 있도록 시편가를 만들도록 했습니다. 후에 Bourgeois가 자신이 작곡한 시편가의 곡을 보다 좋은 멜로디로 고쳤을 때 그는 체포되어 허락 없이 마음대로 곡을 고쳤다는 죄명으로 형무소에 들어가 16년의 감옥 생활을 하고 직업도 잃어버리고 Calvin에게 거역했다는 것으로 Geneva를 떠나고 말았습니다.
현재 장로교회에서 예배 중에 악기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이러한 Calvin사상의 영향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 개신교 아무 교회도 Calvin이 만든 시편가만 부르는 교회는 없고, Calvin이 예배에서 부르지 못하게 한 찬송가를 부르지 않는 교회가 없습니다. 심지어는 Calvin이 다니던 Geneva교회의 헐어버린 오르간도 다시 신축하여 예배에서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보아 Calvin의 그와 같은 사상은 현대의 개신교회에서 받아 드려지지 않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오히려 교회에 성가대가 있고 악기와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은 지극히 성서적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다만 악기를 사용할 때 주의해야 할 것은 준비 안된 합주단이 음악을 제대로 연주하지 못하면서 예배시간에 연주를 한다는 것은 오히려 은혜스러운 예배를 방해하게 되므로 그런 이유로 악기를 사용하지 못하게 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악기를 사용하지 못하게 한 Calvin의 본 뜻이 여기에 있다고 봅니다.
3. 찬양은 교회력에 따라서
음악 지도자의 가장 큰 고심은 설교의 주제와 그 날 성가의 주제를 일치시키는 일입니다. 설교 제목과 내용이 "고난의 그리스도"인데 "위대하시고 영원하신 주"란 찬양을 부른다면 예배의 전체에 통일성이 있다고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음악 지도자가 이런 어려움을 겪게 되는 이유는 목사님의 설교 제목이 대체로 토요일 밤에야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설교의 주제와 음악의 주제를 맞추려고 한다면 한 달 전에는 설교 계획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 일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이 일을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방법은 교회력에 따르는 일입니다.
그러나 개신교에서는 언제부터인지 크리스마스와 부활절을 제외하고는 교회력을 따르지 않은지 오래 되었습니다. 구주가 오시는 크리스마스가 더 중요한 날이 되기 위해서는 그를 기다리는 준비의 날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대강절(The Advent) 또는 강림주간이라고 합니다. 강림주간을 통하여 기다리는 마음이 컸을 때 그리스도의 탄생이 더 큰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고난주간을 통하여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고 그 고난을 함께 받아야만 그리스도의 부활이 우리에게 승리적인 실감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중요한 것처럼 그의 승천도 중요하고 오순절 성령의 강림도 중요합니다.
이와 같은 절기의 교회력에 따라 설교와 예배가 진행된다면 음악 지도는 아주 용이해 질수 있고, 또 통일된 예배를 가지므로 인해 보다 은혜스러운 예배를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부모님의 생신이나 결혼기념일을 기억하여 잔치를 갖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에 중요한 날들을 기념한다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특히 교회력에 의한 음악의 선택은 음악지도자가 신중을 기해야 할 부분입니다. 즉 고난주간에 John Stainer의 The Crucifixion을 연주하는 것은 적절하나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슬퍼해야 할 고난주간에 기쁨과 승리의 음악인 Hallelujah라든지 부활절에나 부를 수 있는 부활의 찬양을 부른 다면 이는 대단히 잘못 된 선택입니다.
부활절 날에 노래한다고 해서 무조건 부활절 칸타타라고 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부활절 칸타타가 아니고 고난의 칸타타이고 부활절 아침 이후에는 고난의 음악을 불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특별히 부활절 주일에는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4. 찬송가의 올바른 이해
(1) 찬송가(HYMNS) : 삼위일체이신 성부, 성자, 성령을 찬양하는 노래입니다.
(2) 복음 찬송가(GOSPEL HYMNS) : 삼위일체에 대한 찬양으로 속성, 섭리, 사역 등을 찬양하는 내용의 노래입니다.
즉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찬송가이고, 하나님의 사랑, 은혜 등을 감사하며 찬양하는 것이 복음 찬송가입니다. 역시 대상 은 성부, 성자, 성령 입니다.
(3) 복음성가(GOSPEL SONG) : 인간이 인간에게 신앙의 권면, 전도, 인간의 교재 등을 위한 내용으로 대상은 인간입니다. 그래서 복음성가에는 “아멘”이 올 수 없습니다.
그러나 현대는 “찬송가학”이 무색할 정도로 복음성가가 다변화, 다양화 되었습니다. 가만히 살펴볼 때 가사는 분명히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용인데 분위기는 흔히 우리가 느끼고 있는 복음성가 스타일인 것입니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찬송가책에도 말이 “찬송가 책”이지 복음성가 적인 가사가 상당히 많이 있음을 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찬양할 때 가사를 생각하면서 불러야 하는 것입니다. 결국에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지만 최소한 올바른 찬양으로 “찬양의 오류”를 범하지는 말아야 하겠습니다.
5. 모범적인 예배는 음악예배
음악에는 두 가지 지배적인 철학 사상이 있습니다. 그 하나는 Isolationism이라고 하는데 여기서는 "음악이란 감정이나 느낌이 표현되지 않은 연속적인 음들의 외부적인 표현이어서 음악의 의미를 음악적인 용어 이외의 다른 말로 설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즉 음악은 음 그것이지 다른 아무 것도 아니며 따라서 음악적인 용어 이외에 다른 말로 바꾸어서 설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철학인 Contextualism은 이와는 반대로 "음악은 단순한 음의 움직임 이상의 무엇이다"라고 말하는데, 이 주장에 의하면 음악은 아이디어가 있고, 감정이 있고, 이야기가 있고 심지어는 생의 철학까지도 음악 속에 포함되어 있다고 보는 견해입니다. 그래서 음악의 진가는 인간의 경험을 표현할 수 있을 때 나타난다고 하고 그러기 때문에 음악은 인간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고, 영적인 움직임과 감동이 있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교회음악은 Contextualism의 음악철학을 따르고 있습니다. 내가 음악을 통해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을 돌릴 수 있고, 또한 내가 영적인 찬양을 부름으로 인해 나의 영과 듣는 자의 영이 은혜 가운데 서로 교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회에서의 성가, 특히 성가대원들의 찬양은 사회에서 노래 부르는 것과는 분명히 달라야 합니다.
비록 목소리가 좋지 않더라도 영적으로 불러야 합니다. 자기 기분을 위한 것이거나, 또는 남에게 뽐내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아이디어를 가지고 노래할 때 하나님의 영과 교통이 되어 그에게 영광을 드릴 수 있고, 영으로 예배하는 자들과 영적인 은혜를 나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모범적인 예배, 가장 아름다운 예배, 가장 은혜스러운 예배는 음악예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음악예배라고 해서 요즘 흔히 하는 것처럼 1부에서 간단히 예배를 드리고 난 다음 2부에서 몇 개의 음악순서를 가지고 연주하는 것과 같은 발표회 성격의 음악예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배의 순서와 음악이 혼연일체가 되어 명실공히 음악으로 구성된 예배를 말합니다.
우리가 예배와 음악에 있어서 분명히 알아둘 것은 예배에서 연주되는 음악이 절대로 음악회에서의 연주처럼 발표회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교회 예배에서의 독창자들도 자기의 발성의 테크닉이나 목소리를 자랑하기 위하거나 그런 의도가 보이는 연주를 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성가대와 독창자 모두 오직 진실 된 마음과 믿음에서 울어 나오는 영적인 노래를 할 때 그것만이 예배에 합당한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우리의 신앙을 기르는 일 즉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은혜를 갈급 해 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유태교와 구교에서는 지금도 성경낭독과 시편낭독을 노래로 합니다. 기도도 노래로 합니다. 특별히 천주교회의 예배의식은 설교를 제외하고 모든 순서를 음악으로 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배의 이상은 예배 전체가 음악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신령한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모범적인 예배는 음악예배가 되어야합니다.
6. 예배에서의 음악 진행
(1) 첫송영
한국교회의 예배는 흔히 성가대의 송영(또는 입례송)으로 시작합니다. 오르간이나 피아노가 첫 화음을 울리고 성가대는 노래하는데, 이를 성가대원들은 `첫송영'이라고 부릅니다. 그 가사내용은 `영광송'이나 `예배의 시작'과 관련된 곳이 대부분이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첫 송영이 시작되기 전의 교회 안 분위기는 회중 간의 인사나 기도 소리로 인해 대체적으로 시끄러워서 `예배의 부름'으로 곧바로 이어질 수 없습니다. 심지어는 성가대가 `첫 송영'을 시작하기 전에 목회자는 종을 치고 회중을 잠잠하게 한 후 "다같이 마음을 모아 예배드립시다."와 같은 말을 해야할 경우들이 많습니다. `첫 송영' 대신에 오르간 전주를 할 경우에는 회중이 잠잠해지는 일이 드뭅니다. 성가대의 첫송영이 시작된 이후에야 회중들은 잠잠해지는데, 첫 송영이 불리우는 동안에는 많은 사람들은 작은 소리로 기도를 드립니다. `예배의 부름'이 있은 후에야 회중들은 잠잠해집니다. 그래서 성가대는 맨 먼저 긴장하고 있어야 합니다.
(2) 찬양과 경배의 찬송가
목회자가 `예배의 부름'과 기도를 드리고 나면 최초의 회중 찬송을 부릅니다. 보통 찬송가책에 `찬양과 경배'로 분류된 것을 부릅니다. 그러나 `주일찬양'("즐겁게 안식할 날"등)을 부르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때에 `하나님께 찬양 드리자', `하나님께 경배 드리자'와 같은 내용이 찬양이 불리웁니다. 이러한 찬송가들을 부르면서 회중들은 예배의 의미를 되새깁니다.
이 찬양을 부를 때에 성가대가 입장하는 것이 서양의 교회에서는 통례화 되어 있고, 많은 한국의 예배학자들도 그렇게 하자는 주장을 펴고, 또한 어떤 음악가들은 시범예배를 통해 그러한 방식을 도입하려고 노력하고 있으나, 한국 교회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성가대의 입당행진은 한국에서 낯선 것이기도 하려니와 건축적 조건도 잘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이유보다 더 두드러지는 것은 성가대가 미리 좌석에 착석하여 `첫송영'을 함으로써 예배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마련하는 `한국적 전통'이 이제 체질화 된 때문으로 여겨집니다. 기악적 전주곡으로는 회중을 잠잠하게 못합니다.
특히 통성기도 등에서 오르간이나 피아노 반주를 하는 것에 익숙한 회중은 기도소리를 낮추지 않습니다. 성악만이 이들을 어느 정도 잠잠하게 합니다. 물론 성가대의 입당행렬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간다는 상징성을 살릴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이러한 마음가짐은 일반 회중도 마찬가지로 가져야 하는 것이기에, 일동기립으로 대신하는 현행의 방식이 적절하다고 판단됩니다.
(3) 송영 찬송가
교독문 낭독 뒤에는 1장 찬송이나("만복의 근원") 삼위일체 영광송("성부 성자 성령께")을 부르는 것이 보통입니다. 대체적으로 이 찬양순서까지 회중 모두가 기립하여 부르는데, 이는 예배의 의미를 몸으로 표현하는 방식입니다.
(4) 성가대 찬양
성가대의 찬양 내용을 `하나님 찬양과 경배'로 국한시켜 해야 한다는 주장을 자주 듣습니다. 또한 회중을 대표해서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생각에서 성가대가 찬양할 때에 목회자도 같이 서있는 경우도 있고, 심지어는 전 교인이 서있는 경우도 목격할 수 있습니다. 물론 성가곡의 내용에 따라 그러한 뜻이 드러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가대 찬양을 앞에서 행한 두 종류의 회중 찬송가처럼 생각하는 것은 옳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성가대 찬양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성경낭독 이후에 불리워 말씀선포 순서로 가는 가교역할을 합니다. 따라서 성가대 찬양은 말씀선포를 돕기에 적합합니다. 음악사적으로 보아도 성가대 찬양의 기능은 말씀선포의 역할을 담당해왔습니다. 교회력을 철저하게 지키는 교회에서는 합창음악 역시 교회력에 맞춰 작곡. 정리되어 있습니다. 성가대의 말씀선포 역할은 설교의 내용과 성가대 합창곡의 내용이 서로 일치될 때에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 교회의 실정은 그렇지 못합니다. 그렇게 된 가장 큰 원인은 설교자가 미리미리 내용을 알려줄 수 없도록 촉박한 시간에 설교를 준비하기 때문이고, 절기에 맞춰 설교하는 일은 성탄절, 부활절, 수난절 등 큰 절기 이외에는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절기에 꼬박꼬박 맞추어 설교한다는 것은 한국 교회에서 아직 기대할 수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어떤 설교자는 그때그때 시사적 문제에 적당한 설교를 하기도 하고, 또 어떤 분은 본인이 준비 가능한 순서에 따라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한 책을 성경공부 식으로 연속하여 설교하기도 합니다. 설교에 맞추어 찬양을 할 수 있으려면 한달 전에 이미 예고가 나올 수 있어야 가능한데, 그런 경우가 아주 드뭅니다. 또한 설교에 맞는 합창곡을 찾을 수 없어서 할 수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러한 어려움이 겹치면서 설교내용과 성가내용을 맞추는 일이 아예 포기된 것처럼 여겨집니다.
회중은 성가대의 음악에 대단히 민감한 반응을 보입니다. 큰소리로 끝나는 음악에서는 "아멘"하고 화답하는데, 경우에 따라 큰소리로 또는 작은 소리로 차이 나게 반응합니다. 조용한 소리의 음악에서는 그렇게 반응하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따라서 성가대의 합창곡들 중에서 큰소리로 끝나는 것들이 선호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교인들이 "은혜 받았다"고 반응하는 합창곡들 역시 이런 종류의 것들입니다. 이로 보아 한국 교회의 회중들은 성가대로부터 감정적으로 격앙 받기를 원하는 경향이 많다고 생각됩니다. 감정을 차분하게 가라앉히는 것은 기대되는 것이 아니라고 판단됩니다. 설교에 대한 회중의 기대도 거의 같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이런 점은 그 자체로 좋다 나쁘다로 판단될 성격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찬양대의 음악만이 조용하게 가라앉은 것이어서는 예배의 전체적 분위기와 잘 맞지 않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목회자들은 대체로 그 날 성가대가 무슨 곡을 하는지 모릅니다. 이 사항은 성가 지휘자에게 맡겨져 있습니다. 따라서 가장 예측불허의 순서가 성가대의 찬양 부분입니다. 다행이 예배에 잘 맞을 경우는 괜찮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도 발생합니다. 가사가 교회적이지 못한 것을 할 경우가 있고, 음악회에 온 듯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길고 거창한 곡을 할 때도 있고, 성가대가 회중 모두에게 너무 낯선 방식의 곡을 선택하여 예배분위기를 낯설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다행히 이런 경우는 아주 많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성가대 지휘자는 각별히 노력해야 합니다. 성가대가 예배를 돕는 가장 좋은 방법은 성가대나 지휘자의 취향에 빠져 음악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교인들이 바라는 것을 많이 고려하는 일입니다. 성가대는 자신들의 찬양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회중을 감화시키는 것도 그 일 중의 하나입니다. 회중 위에 음악적으로 군림하거나 그들을 교육시키려고 하지말고 회중과 함께 노래하는 태도를 지켜야 합니다.
(5) 설교 후 찬송가
설교 후 부르는 찬송가는 대개 설교의 내용과 맞추어집니다. 이는 성가대의 찬양 기능과 중복될 수도 있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성가대의 찬양이 설교내용과 맞추지 못하는 일이 더 많은 현실에서는 이 회중 찬송가가 그러한 기능을 홀로 담당합니다. 그러나 모든 성경주제에 맞게 찬송가들이 준비되어 있지 못하는데, 이는 우리의 찬송가책이, 성경내용을 많이 갖추고 있지 못한 때문입니다. 따라서 찬송가 개편 때에는 성경 내용을 직접적으로 노래하는 것들을 많이 수록할 필요가 있습니다.
(6) 헌금순서와 봉헌 찬송가
헌금순서와 관련된 음악의 형태는 다양합니다.
①기악만을 연주한다.
②성가대가 노래한다.
③독창자가 노래한다.
따라서 헌금순서가 가장 다채로운 방식으로 되어 있으며 여기에 관한 통일된 의견도 없습니다. 전통적으로 성가대가 노래하는 방식이 가장 많았습니다. 하지만 근래에는 독창자가 노래하는 경우도 많은데, 이는 좋은 독창자가 있는 큰 교회일수록 그러한 일을 많이 합니다.
헌금시간에 성가대가 노래할 경우에는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치네"와 같은 봉헌노래들을 부르지만, 독창자가 할 경우는 봉헌과 무관한 아무 노래나 부릅니다. 따라서 독창자의 노래는 진행되는 순서와 무관한 것이 되고, 독창자는 부스럭되는 소리가 많이 나는 순서에서 노래를 불러 예배나 독창자 모두에게 좋지 못합니다. 독창자들은 성가대 찬양시간에 성가대와 함께 노래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독창이 드러나는 성가합창곡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헌금시간이 끝나면 회중들의 봉헌찬송이 따릅니다.
(7) 마감 찬송가
회중들에 의해 불리우는 폐회찬송은 "성전을 떠나기전"(59장)과 같은 전형적인 것들이 있으나 근래에는 이런 종류의 것들이 덜 불리웁니다. 그 대신에 임의로 선정된 찬송가를 부르는 경우가 많고, 리듬이 강하지 않은 새로운 복음성가를 부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8) 끝 송영
성가대에 의해 불리우는 마지막 송영은 축도 뒤에 곧바로 나오는데, 이 순서 역시 첫 송영과 마찬가지로 어떤 이유에서 송영이라고 불리우는지 알 수 없습니다. 가사는 대체로 `축복',`평안'을 기원하는, 즉 축도를 다시 한번 강조하는 성격이 많습니다. 어떤 찬송가의 한 부분을 잘라내어 부르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 순서에서 회중들은 상당히 큰 소리로 자신들의 마지막 기도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