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최근에 주목되는 팔레스틴 성서고고학의 기록물들에 관하여

nokobo 2009. 12. 16. 15:21

최근에 주목되는 팔레스틴 성서고고학의 기록물들에 관하여 


김 중 은 (장로회신학대학교 교수 / 구약학)

 


1. 성서 고고학과 기록물들의 발굴


1930년대 초반 성서 고고학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미국의 고고학자, 셈어학자, 구약학자인 올브라이트(W. F. Albright, 1891-1971)가 "성서 고고학"이란 명칭을 최초로 사용한 이래, 성서 고고학은 성경의 역사적 무대인 시리아(아람)-팔레스틴은 물론이고, 성경의 주변 세계, 곧 고대 중동지역인 소위 초승달 옥토지역에서 괄목할만한 탐사와 발굴활동을 전개하였고, 그 성과를 알리는 출판활동을 계속해왔다. 특히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애굽)에서는 주전 4천기(千紀) 후반부터 시작되는 고대의 기록자료들이 다량으로 발견되어 성경의 본문과 연관하여 그 시대의 역사와 문화를 조명하고 그 배경을 이해하는데 커다란 공헌을 했다. 이집트의 고대 상형문자가 판독되었고,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어와 아카드어가 쐐기문자로 해독되었으며, 고대 우가리트어와 페니키아 문자는 물론이고, 소아시아에서 고대 히타이트(헷)문자와 고대 페르샤 문자, 엘람 문자들이 오랜 침묵의 세계에서 깨어나 그 목소리를 들려주게 되었다(Cyrus H. Gordon, Forgotten Scripts: Their ongoing Discovery and Decipherment, Revised and Enlarged Edition, Basic Books, 1982 참조).


메소포타미아의 마리와 누지에서 출토된 토판문서들은 구약의 족장시대의 역사적 배경을 조명하는 데 도움을 주었으며, 우르-남무 법전과 함무라비 법전의 발견은 모세의 율법과 비교할 수 있는 흥미 있는 자료를 제공하였고, 소위 바벨론 창조설화나 홍수설화 그리고 역사와 연대기, 종교, 경제, 행정, 철학, 문학, 교육 등 다방면에 걸친 기록물들의 구체적인 내용이 알려지게 됨으로써, 성경 특히 구약본문과 구약세계에 대한 연구와 이해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이집트와의 관계에서는 메소포타미아만큼 기록자료들의 양적인 비교가 뒷받침되지는 못하고 있으나 테베에서 발견된 주전 1220년경의 것으로 추정되는 애굽 제19왕조의 바로 메르네프타의 승전비문에서 애굽상형문자로 확인된 "이스라엘"이란 명칭은 당시 팔레스틴에서 이스라엘의 존재를 확인하게 해주는 지금까지 발견된 최초의 성경외 기록자료의 증거이다. 그밖에 텔 엘 아마르나 문서에서 애굽 바로들과 가나안 지역 봉건군주들과의 서신교환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착시기에 대한 역사적 정황을 참고할 수 있으며, 애굽의 지혜문학 특히 아멘엠오페트의 교훈이 솔로몬 시대 구약의 잠언에 끼친 영향 등이 주목되고 있다. 애굽의 기록물은 아니지만, 나일강 상류의 엘레판틴 섬에서 발굴된 주전 5세기경 유대인 군사 식민지의 아람어 파피루스에 기록된 엘레판틴 문서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또한 소아시아의 히타이트 제국이 남긴 주전 2천기 후반의 정치적 조약(계약)문서들의 발굴은 오경의 계약사상과 특히 신명기의 언약사상의 역사적 배경과 그 문학적 양식 이해에 도움을 주고 있다(The Ancient Near East, Vol. I, An Anthology of Texts and Pictures, 1973; Vol. II, A New Anthology of Texts and Pictures, 1975, ed. by James B. Pritchard, Princeton; 장일선,『구약성서시대의 역사기록』, 한국신학연구소, 1984 참조).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 특히 구약과 그 주변세계의 역사를 되돌아 볼 때, 적어도 주전 3,000년경부터는 본격적인 문자생활이 시작되어, 주전 2,000년경 전후에 이르러서는 활발한 문전활동이 보편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지난 1968년이래 계속된 발굴과 공개로 다시 한번 학계를 놀라게 한 16,000여점에 달하는 에블라(텔 엘 마르디크) 토판 문서의 출현도 이러한 사실을 다시 한번 뒷받침하는 것이다(박준서, "구약과 에블라의 재발견",『신학논단』제16집, 1983, 9-38쪽 참조).

 


2.팔레스틴 고고학은 침묵하는 고고학인가?


위에서 살펴본 대로 구약의 주변세계에서 다양하고 다량의 기록물들이 발굴되는 것과 대조적으로, 구약의 이스라엘이 차지한 가나안 땅에서는 기록물의 발견이나 발굴이 희소한 형편이다.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그리고 요단강 서쪽의 옛 가나안땅인 협의의 팔레스틴에서 성서 고고학은 아직까지 이렇다 할 만한 기록자료들을 발굴하지 못했다. 그래서 팔레스틴 고고학은 "침묵하는 고고학"(mute Archaeology)이라는 말까지 생겨났다. 물론 1947년부터 1956년까지 쿰란지역에서 전 세계를 놀라게 한 사해사본과 쿰란종파문서들의 발견이 있었고, 그 이후 근처의 유다광야에서 나온 성경사본들이나 기록물들이 있으나, 그 연대가 주전 2세기 이상을 넘지 않는 비교적 후대의 기록자료들이며, 그 종류와 수량에 있어서도 고대 중동세계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것이었다.
팔레스틴에서 일반적으로 발견되는 기록물은 조그만 토기편에 기록된 인명이나 내용물 표시, 청동 저울추에 새겨진 무게단위, 인장에 새겨진 인명, 페르샤 시대 이후 주조된 동전에 새겨진 유다의 존재를 알리는 명문정도가 고작이었다. 기록자료가 없다보니 구약학계에서 비평적 학자들 사이에서는 바벨론 포로기 이전까지 이스라엘 역사의 정확도는 언제나 의심의 대상으로 남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아직까지 획기적으로 변화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팔레스틴에서 이스라엘 역사와 관련하여 문자생활과 활발한 문전활동에 대한 증거는 비록 미약하지만 점차 그 목소리가 뚜렷해질 전망이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전망아래 근래에 주목을 끌고있는 팔레스틴의 기록물 자료 네 가지를 소개하려고 한다. 그 소개에 앞서 팔레스틴에서의 문자생활과 구약에서 보는 문전활동의 내용을 잠깐 살펴보는 것이 전체 맥락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구약에는 언제부터 문자생활이 시작되었는지 언급이 없으나, 구약에는 이스라엘 역사와 관련하여 기록활동이나 기록된 문서에 관한 언급이 42회 정도 나타나며, 글을 쓴다는 히브리어 동사 "카타브"가 약 220회 사용되었는데, 그 동사의 첫 용례는 아말렉 전쟁에 관한 모세의 기록활동과 관련된 것이다(출17:14). 구약에 나타나는 문자생활과 문전활동에 대한 다양한 증언은 앞서 기술한 대로 이스라엘만의 독특한 현상이 아니라 고대중동 전체의 문자문화생활의 파라다임과 상응하는 보편적인 현상으로 파악된다.
올브라이트는 주전 13세기에 가나안어를 기록하기 위해서 적어도 네 종류이상의 문자가 사용되고 있었으며, 역사적 인물 모세는 이집트어, 아카드어, 가나안어와 가나안방언의 일종인 히브리어(창31:47; 사19:18참조)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W.F.Albright, The Biblical Period from Abraham to Ezra, Harper, 1963, 14쪽). 어쨌든 구약의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서 히브리어를 발전시켰으며, 가나안에서 주전 1,700년경부터 발생되었다고 여겨지는 원가나안 알파벳 27개 글자를 함께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주전 13세기에 이르러 히브리어 알파벳 22글자가 고정되었다고 본다(J.Naveh, Early History of the Alphabet, Magness Press, 1987참조).
이스라엘은 가나안에서 가나안 알파벳을 공유했기 때문에 주전 10세기 이전의 간단한 기록물의 서체만 가지고는 이것이 고대 페니키아어인지, 고대 가나안어인지, 고대 아람어인지 구분이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1976년 이스라엘의 이즈베트차르타에서 출토된 22개의 가나안 알파벳 글자를 담고있는 주전 12세기경의 알파벳 토기편이 그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그러나 주전 10세기 이후부터는 점차 히브리어 고대 서체가 이웃의 아람어나 페니키아어보다 흘림체의 형태를 나타내는 차별화를 보여줌으로써 어느 정도 고대 히브리어 서체의 구분이 가능해 지고 있다. 또 이 시기부터 어휘와 어형변화의 차이도 함께 주목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수량이나 내용 면에서는 여전히 열세이지만, 고대 히브리어 기록물뿐만 아니라, 페니키아, 아람, 암몬, 모압, 에돔 등지에서도 구약의 이스라엘의 이웃들로서 당시의 알파벳 문자생활을 공유했던 증거를 보여주는 기록물들이 발굴되어 공개되고 있다.

 


3. 고대 히브리어 기록물들


이미 19세기 후반기부터 알려진 모압(메사)비문은 주전 9세기 후반의 것으로서 신명사문자 (神名四文字)와 함께 이스라엘의 오므리왕에 대한 언급으로 유명하며(왕하3:4참조), 그 연대가 주전 9세기 초반의 것으로 추정되는 아람의 멜카르트 비문은 그 후대의 몇몇 아람어 비문들과 함께 당시 아람왕국과 북왕국 이스라엘의 역사적 상황을 조명해 볼 수 있는 자료들로 평가되어왔다. 그러나 요단강 서쪽 팔레스틴내에서 고대 히브리어로 된 기록물의 발굴은 1908년에 발견된 게제르의 농사 월력이 현존하는 최고의 것으로 알려져있다. 이것은 작은 연질 석회석판에 고대 히브리어 글자로 종사에 관련된 20단어를 새긴 것인데, 그 연대는 주전 10세기말경으로 추정된다.
그보다 앞서 1880년에 발견된 유다왕 히스기야 시대 실로암 수로공사비문(주전701년경, 왕하20:20; 대하32:30 참조)도 연대는 주전 8세기 말로 떨어지지만 6행으로 되어있는 당시 수로공사 완공에 대한 보고 내용은 역사적으로나 고대 히브리어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20세기 전반기의 고대 히브리어 기록물 발굴은 역시 미약하였다. 1910년 이래 북왕국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의 발굴에서는 주전 8세기 전반의 것으로 추정되는 소위 사마리아 토기편 명문들(작은 토기편에 먹물로 관리자의 인명이나 기름, 포도주 등 토기단지에 담은 내용물을 표시한 것)이 다수 발견되는 정도였다. 1935년 이후에는 라기스에서 주전 590년경의 것으로, 토기편 서신들이 발굴, 공개되었는데 이것은 유다왕국 말기 바벨론 침공당시의 역사적 정황을 뒷받침하는 (렘34:7참조) 귀중한 고대 히브리어 자료로 평가된다. 그 외에는 이스라엘과 유다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진 (그 중에는 구약본문에서도 나타나는 이름들이 있음) 몇 개의 인장들과, 그 인장으로 압인되어 문서 봉인에 사용된 점토 불라들이 있고, 대개 주전 88년에서 남왕국 유다가 멸망한 주전 586년경까지 토기 항아리의 손잡이나 몸체, 또는 작은 토기 그릇의 가장 자리나 뒷면에 그 내용물과 그 소유자의 이름을 표시한 기록물들이 발견되는 정도이다(이것과 관련된 최근의 정보는 다음을 참조하라: R. Deutsch & M. Heltzer, Forty New Ancient West Semitic Inscriptions, Israel, 1994; 동일 저자들, New Epigraphic Evidence from the Biblical Period, Israel, 1995).


20세기 후반에 들어서도 팔레스틴에서 고대 히브리어 기록물의 발굴 상황은 획기적인 변화가 없었으나, 1960년대 이후 여러 지역의 석실묘에서 발견된 묘비명(실반 석실묘의 왕의 신하 묘비명, 키르베트엘콤의 "우리야" 묘비명 등)과 농부의 법적 청원 내용을 담은 야브네 얌 토기편 문서가 있고, 역시 1960년대에 주전 8-6세기의 인장들과 불라와 토기편 문서등 모두 100여점이 발굴된 아랏의 기록 자료들과 무엇보다 1970년대 발굴된 주전 9세기 말에서 8세기 초의 것으로 추정되는 쿤틸레트 아즈룻의 기록 자료들이 있다. 특히 쿤틸레트 아즈룻의 기록물은 야훼 이름과 연관된 축복문과 "야훼와 아세라"와 같은 명문이 토기편이나 항아리 몸체에 그림들과 함께 나타나 있는데, 당시 이스라엘과 유다의 종교 생활을 조명하는 자료로서 학계의 주목을 끌고 있다. 이렇게 보면, 팔레스틴에서 발굴된 고대 히브리어 기록물은 아직까지 20여점 정도에도 미치지 못하며(불라나 인장이나 토기편의 숫자를 제외하고), 그 연대의 상한도 주전 10세기 말에 고착되어 있는 형편이다. 구약이나 이스라엘 역사에서 다윗과 솔로몬 시대가 가장 황금시대였고, 그 70여년간을 태평성대와 문예부흥기로 묘사하는 것이 어느 정도 과장된 것이라 하더라도, 그 당시의 역사를 조명하고 뒷받침할 만한 구약외의 당시 기록물이 아직까지는 하나도 발견되고 있지 않다는 것은 아쉬운 점이다. 그러나 최근에 주로 예루살렘의 이스라엘 박물관을 통해 공개되어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는 팔레스틴의 기록물 4가지를 아래에 소개하면서 앞으로 구약 시대 고대 이스라엘의 문자생활과 문전활동의 증거는 팔레스틴 고고학에서 계속 증가될 것이라는 전망을 가지게 된다.


첫째는, "텔 단 석비"(Tel Dan Stela)이다(사진 그림 1 참조). 단은 구약전통에서 이스라엘에게 약속된 땅의 북쪽 경계 성읍으로 언급된다(삿 20:1 등). 1966년부터 예루살렘의 히브리 유니온 대학 발굴팀이 아브라함 비란(A. Biran) 교수의 지도 아래 단의 유적층을 발굴해왔는데, 1993년 7월21일부터 그 이듬해 6월까지 텔 단의 주전 9세기 유적층인 무너진 성벽돌틈 사이에서 깨어진 아람어 비문 조각 셋이 연달아 발견되었다. 단 석비의 중요성은 비록 그것이 고대 히브리어가 아니지만 팔레스틴에서 발굴된 기록물로서 최초로 "다윗 가문"(즉, "다윗 왕조" dwdtyb , 제9행)을 언급하고 있으며, 세 조각들의 보완 읽기를 통해 이스라엘 왕 여호람과 다윗 가문의 왕 아하시야의 이름이 등장하고 있는 점이다. 현재까지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이 석비는 구약에도 등장하는 주전 9세기 후반기에 아람왕 하사엘(왕하 8:15 참조)이 건립한 것으로 보이며, 이스라엘 왕 예후 왕조의 3대 임금인 여호아스(주전 801-786년)가 하사엘의 아들 벤하닷 2세로부터 빼앗겼던 성읍들을 되찾을 때, 단 성읍도 포함되었으며, 이 때 단 석비가 파괴되어 이스라엘이 아합왕 시대에 축조했던 단 성벽을 재건할 때 석재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왕하 13:22-25 참조).


이미 공개된 메사(모압) 비문에서도 "다윗 가문"에 대한 읽기를 복원할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으나(A. Lemaire, "House of David - Restored in Moabite Inscription", BAR, Vol. 20, 1994, 30-37쪽), 텔 단 석비는 구약외에 "다윗 왕조"의 역사성을 입증하는 현재까지 가장 오래된 유일한(?) 자료라는 점에서 중요시된다. 물론 "다윗왕조"라는 읽기의 아람어가 단 석비에서 두 단어의 띄어쓰기를 하지 않았고 두 단어 사이에 구분점을 찍지 않았기 때문에 이것이 다른 의미의 단어이거나 지명이라는 논란을 남겨놓고 있기는 하다. 실물은 현재 예루살렘의 이스라엘 박물관에서 전시중에 있다(자세한 내용 소개는 다음 문헌을 참고하라: 김영진, "텔 단(Tel Dan)에서 출토된 아람어 석비 조각과 이스라엘 역사"; 동일 필자, "단 석비와 하사엘", 『예루살렘 5호』(1995년 여름), 예루살렘 학회, 96-126쪽).

 


둘째는, "캐태프 힌놈 은판 소두루마리"(Ketef Hinnom Silver Scroll)이다(사진 그림 2 참조). 이것은 1980년 예루살렘 구시가지 맞은편 서남쪽에 위치하여 힌놈 골짜기를 동쪽으로 굽어보는 작은 암벽 석실 무덤 지역에서, 유다 왕국 말기에서 바벨론 포로기 초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석실묘를 발굴하는 중에 인골 및 부장품과 함께 발견된 것이다. 이곳 발굴 장소의 이름을 그 지형의 위치에 따라서 "힌놈 골짜기의 어깨 등성이"란 뜻으로 히브리어 "캐태프 힌놈"이라고 부른다.


소형의 은판 두루마리 2개가 발견되었는데, 그것을 각각 펴보니, 길이와 너비가 9.5×2.5cm와 3.8×1cm 정도 되는 표면에 주전 6세기 초의 고대 히브리어 서체의 특징을 보여주는 글자로 대제사장의 축도문(민 6:24-26)의 내용이 요약되어 새겨져 있었다. 이것은 주전 2세기의 내쉬 파피루스나, 사해 사본보다 그 연대가 상당히 높이 올라가는 것으로서, 구약 본문에 대한 지금까지 발견된 가장 오랜 증거 자료로 평가되고 있으며(E. Tov, Textual Criticism of the Hebrew Bible, Fortress, 1992, 379쪽 참조), 현재 이스라엘 박물관이 소장하여 전시하고 있다.


셋째는, "상아 석류 명문"(Ivory Pomegranate Inscription)이다(사진 그림 3 참조). 이것은 높이가 5cm 정도의 상아로 만든 석류 모양의 장식품으로서, 석류 장식 밑바닥에는 사각형의 구멍이 있어서 여기에 자루를 끼워 예식 때에 제사장들의 홀(scepter)로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석류 장식의 목아래 어깨 둘레에는 주전 8세기의 서체로 감정되는 고대 히브리어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다음과 같이 읽을 수 있다: "(야훼의 전)에 속함. 제사장들의 성물." 괄호안의 내용은 파손된 부분으로서 추정된 읽기이다. 이 상아 석류 명문은 1979년 골동품상에 나왔던 것이 프랑스의 고문자학 학자인 앙드레 르메르의 주목을 받았으며, 지금은 이스라엘 박물관이 소장하여 전시하고 있다. 학자들은 이 석류 장식품이 제1성전시대 제사장들이 사용한 물품으로서 현재까지 남아있는 유일한 것으로 평가한다.
넷째는, 예레미야 시대의 서기관 바룩과 왕의 아들 여라므엘의 인장이 압인된 불라(bulla) 2점이다(사진 그림 4-1, 4-2 참조). 팔레스틴 성서 고고학에서 그 수는 많지 않지만, 히브리 인장들과 그 인장이 압인된 불라(문서 봉인용의 작은 진흙덩이에 인장을 압인하여 생겨난 물건)의 존재는 알려져 있었다.


히브리 대학교 고고학과 은퇴교수인 아비가드(N. Avigad)는 1986년에 250여점의 불라를 조사, 연구하여 출판하였는데(Nahman Avigad, Hebrew Bulla from the Time of Jeremiah, Remnants of a Burnt Archive, Israel Exploration Society, 1986) 특히 여기서 아비가드가 공개한 불라들 중에 "베레크 야후(바룩)에게 속함 / 네리야후의 아들 / 서기관"(4-1)과 "여라므엘에게 속함 / 왕의 아들"(4-2)이라는 명문이 뚜렷이 나타나는 불라는 예레미야 32장과 36장의 내용에 나타나는 대로 구약의 예언자 예레미야 시대에 활동했던 그 두 인물들의 유물이 거의 틀림없다는 것이다(렘 32:9-15; 36:26 참조). 불라의 크기는 1cm에서 2cm 이내로서 대부분 둥그런 타원형의 형태를 가지고 있으며, 그 인장의 소유자와 그의 아버지의 이름을 담고 있으며, 직함이 함께 나타나기도 한다.


1970년대 페르샤 시대 아람어 서체로 된 유대인들의 인장과 불라가 70여점 발견된 이후, 1982년 여름 다윗성 발굴에서도 50여점의 불라가 출토되었으며, 아비가드가 공개한 250여점의 불라와 함께, 예기치 못한 히브리어 불라의 증가는 구약 시대 히브리어 기록물의 역사를 연구하는데 새로운 빛을 던져주고 있으며, 특히 역사, 행정, 법률, 사회적 측면에서 히브리 인명이나 고서체(고문자학) 연구에 값진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금년에 하이파 대학 교수 로버트 도이취는 유다왕 아하스(주전 735-715년)의 인장이 압인된 불라를 처음 공개하였는데(이미숙, "유다왕 아하스의 인장이 발견되다", 『예루살렘 통신』, 장신대 성지 연구원 발행, 1998년 6월23일 여름호, 2-3쪽 참조), 앞으로는 솔로몬이나 다윗 시대의 인장이나 불라가 발견될 가능성도 기대가 된다. 팔레스틴에서 다수의 히브리 불라의 발견은 구약 시대 예루살렘은 물론이고 이스라엘과 유다의 여러 지역에 활발한 문전 활동과 공식 문서 보관소(또는 도서관)의 존재를 추정케 한다. 불라는 파피루스 문서를 봉인하는데 사용되었고, 파피루스 문서는 불에 타거나 훼손되어 없어졌으나 그 불라는 남게 되었다. 메소포타미아의 토판 문서나 이집트의 석재 비문들과 비교해 볼 때, 팔레스틴의 이스라엘은 주로 파피루스에 기록활동을 했다고 여겨진다. 팔레스틴에서 이스라엘의 기록물들의 발굴이 희소했던 점도 불라의 증거로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상에서 살펴본 대로, 구약과 그 주변세계에는 구전 활동도 있었겠으나, 우리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활발한 기록문화와 문전활동이 있었음을 알게 해준다(이 글과 관계된 보다 자세한 정보와 성경의 세계의 기록 문화에 대한 최근의 정리는 다음 문헌을 참고하라: P. Kyle McCarter, Jr., Ancient Inscriptions - Voices from the Biblical World, Biblical Archaeological Society, 1996). 구약 세계의 문전활동과 관련하여 구약 외경 마카비 2서에는 느헤미야 시대와 그 이후 마카비 시대에 이르는 문전 활동의 흥미있는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는데, 그 내용을 인용하면서 이 글을 맺고자 한다: "위에 말한 기록문서와 느헤미야의 회고록에는 이런 이야기 외에 느헤미야가 책을 수집하여 도서관을 세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거기에는 여러 왕들에 관한 책과 이스라엘의 예언자들과 다윗의 찬송시를 담은 책들과 외국의 여러 왕들이 성전에 예물을 보낼 때 함께 써보낸 편지들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유다(마카비)도 전쟁 때문에 흩어졌던 책들을 모아서 전해주었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그 책들을 보존하고 있습니다. 그 책들이 필요하셔서 사람을 보내시면 보내드리겠습니다"(공동 번역, 마카베오 하 2:13-15 참조). 

 

협성대 김성교수 방송강연

1. 성서의 역사적, 고고학적, 지리적 배경에 관한 50여개의 칼럼으로서 1998년부터 3년에 걸쳐 국민일보에 소개되었으며 2002년 1월 '성서고고학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동방미디어에서 단행본으로 출판되었습니다.
성서의 향기 28칼럼 주소창: http://news.naver.com/search/search.naver?query=%5B%E3%E6%BC%BA%BC%AD%C0%C7+%C7%E2%B1%E2%5D++&srchm=qd&cat=all&pd=1&page=2

성서고고학 이야기 3개 주소창: http://www.aspire7.org/belief-1-4-a.html

성지를 찾아서 주소창: http://veryhsw.com.ne.kr/sungi/bible.html

 

2. 기독교TV에서 '밀레니엄 특강'이라는 프로그램으로 녹화 제작한 성서지리학, 성서고고학 관한 20강좌입니다.
성서고고학 10강 주소창: http://www.cgntv.net/seminar/program.asp?pid=1236&pintro=&intro=5&gotopage=2

성서지리학 10강 주소창: http://www.cgntv.net/seminar/program.asp?pid=1255&vid=&vno=&vday=&intro=

 

3. 기독교TV의 '사랑과 구원의 발자취' 프로그램으로서 지난 1995년 창사 기념 특집 다큐물 제작 당시 촬영한 성지(이스라엘, 요르단, 이집트)에 관한 자료와 2000년 시리아, 이라크 등지에서 촬영한 자료 별도로 편집 제작한 70여개의 단편물입니다.
사랑과 구원의 발자취 주소창: http://kr.blog.yahoo.com/a99968559/folder/255.html


                   
  


  
    
 

첨부파일 이스라~1.HW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