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시간관리
예수님의 시간관리
4복음서 기자들은 모두 다 주님이 적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으면서 계속적인 압박을 받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을 잘 보여 주고 있다. 그 분의 모든 말은 주시의 대상이 되었고, 모든 행동은 분석 되었으며, 모든 몸짓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렷다. 사실상 예수님께는 얘기거리가 될 만한 사생활이 없었다.
나는 이 시대에 살고 계실 에수님을 상상 해 보았다. 그 분이 장거리 전화를 받으실까? 걷는 대신 비행기를 타실까? 대량 우편물로 자신을 알리시는데 관심을 두실까? 현대 기계 문명이 가능케 해준 수많은 관계들을 어떻게 처리 하실까? 오늘 한 말이 불과 몇초 사이에 전세계에 퍼져서 내일 아침 신문의 머리기사로 나오게되는 이러한 시대에 어떻게 맞추어 가실까?
그가 살던 세계는 훨씬 좁은 범위였긴 하지만, 우리에게 익숙한 억압과 요구를 많이 받으 시며 사셨던것 같다. 그렇지만 그의 생애를 주의깊게 살펴볼때 서두르거나 급히 뒤쫓아가셔야만 했다거나 불시에 기습을 당했다는 듯한 모습을 한 군데서도 찾아 볼수 없다. 예수님은 개인 비서 없이도 공적인 시간 약속들을 잘 처리하였을 뿐만 아니라 기도와 묵상을 위한 자기만의 시간과 제자 훈련을 위해 모으신 소수의 사람들과 같이 보낼 시간을 위해서도 적당량의 시간을 할애 하셨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 모든것이 가능 했던 것은 그 분이 시간을 잘 다스릴수 잇었기 때문이었다. 우리 주님께서 어떻게 시간을 관리하셨는가를 알아보기 위해 시간을 들이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다. 무엇이 주님으로 하여금 그렇듯 질서있는 사람이 되게 하였을까?
나에게 가장 감명을 주는 첫째 요소는 그 분은 자신의 사역을 분명히 이해하고 계셨다는 점이다.
그 분께는 이루셔야 할 과업이 있었고, 그래서 하셔야 할일에 맞추어 시간을 사용하셨다. 이것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는 그분의 마지막 여정에서(눅18장) 분명히 나타난다. 예수님께서 여리고에 이르셨을때 한소경이 외치는 소리를 듣고 가던 걸음을 멈추심으로써 그분의 추종자들과 반대자들을 당황하게 했다고 누가는 쓰고 있다. 그들은 아직도 예닐곱 시간을 더 가야만 예루살렘에 도착할 수 있다는 것과, 유월절 행사에 참여하려는 그들의 바램을 이루기 위해 그들이 그곳에 이르고자 한다는 사실 들을 개의치 않으시는 예수님 때문에 안달이 났다.
실로 그들은 예수님의 목적이 오로지 하나의 종교 행사에 참여코자 때맞춰 예루살렘에 도착하는데 있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의 주된 목적이 아니었다. 그 장님처럼 상처입은 사람들을 어루만져 주는것이 예수님께는 시간을 투자할 만큼 중요하고 의미 있는 일이었다 이 일이 있은지 얼마 안되어 예수님께서는 다시 한번 나무 밑에 멈춰 서셨는데 악명 높은 세리 삭개오를 내려오라고 부르시기 위해서였다. 삭개오의 집으로 함께가서 같이 대화를 나누고자 한것도 예수님의 생각이었다. 다시한번 예수님을 둘러싸고 있던 무리들은 몹시 화가 났다.
첫째로는 예루살렘으로의 여정이 또다시 방해를 받앗기 때문이고, 둘째는 삭개오의 평판 때문이었다.
군중의 관점으로는 예수님께서 시간을 잘 못 쓰고 있는 것으로 보엿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관점에서 보면 그시간은 잘 사용된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러한 일은 그의 사역의 기준에 맞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누가는 바로 이사실을 언급한 예수님의 말씀, 즉 "인자는 잃은 자를 구원하러 왔다" (눅19:10)는 것을 기록하고 잇다. 제자들로서는 이것을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앗고 예수님께서는 그분의 사역의 그러한 특질들을 제자들에게 계속해서 주지시키셨다. 그들이 그사역을 이해하기 전까지는 예수님께서 시간을 어떤 기준에서 어떻게 쓰시는가 하는것을 그들이 결코 이해할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시간 계획을 위한 원칙속에 세번째로 중요한 요소를 도입하셨다고 생각되는데 그것은 열두명의 제자를 훈련하기 위한 시간을 따로 갖고 계셨다는 점이다.
세상에 복음을 전해야 할 수백만명의 사람들이 잇었지만, 예수님은 단지 소수의 대단치 않은 사람들과 함께 있기 위해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하셨다.
가장 귀중한 시간은 성경을 풀어 가르치시고 그 분의 천상적인 예지를 함께 나누는데에 쓰여졌다. 제자들 한사람 한사람과 함께 사역하시는 가운데 당신의 모든 말씀과 행동을 그 제자들이 자세히 관찰 할수 있게끔 거기에 그분의 소중한 순간들을 쏟으셨다. 군중에게 하셨던 말씀의 깊은 의미를 그들에게 설명하시기 위해서 며칠을 따로 떼 놓기도 하셨다. 일을 마치고 돌아온 제자들의 보고를 듣기 위해, 또 잘못했을 때에 칭찬하시기 위하여 귀한 시간들을 내셨다.
우리는 에수님께서 자신의 전문적인 신학 지식의 진가를 지적으로 파악할만한 사람들을 가르치실 수도 있었을 텐데 왜 그토록 단순해 빠진 일단의 사람들과 그리도 귀중한 시간들을 보내셨는지 캐묻고 싶은 적이 한두번이 아니엇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분은 참으로 무엇이 중요하고 어디에다 우선권을 두어야 하는지 잘 알고 계셨다. 인간은 우선 순위가 있는 곳에 시간을 쓰기마련이다.
이상에 열거한 이유들로 해서, 예수님께서는 결코 시간이 부족해서 쫓기는 법이 없으셨다. 자신의 사역의 목적을 숙지하고 아버지와 단둘이 있는 순간들을 통해 영적으로 민감해져 있었으며, 또 하늘로 오르신 후에 자신의 사역을 영속시킬만한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고 계셨기에 우리가 보기에 그럴싸하고 수락할법한 어떤 초청이나 요구조차도 단호하게 거절하시는 것에
어려움을 겪지 않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