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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와 성도의 생각 차이

nokobo 2010. 4. 3. 16:39

목사와 성도의 생각의 차이

 

2. 목사는 스스로 자신을 성도의 은인이라고 생각하지만 성도들은 그게 생각하지 않는다.

 

목사들은 자기에게 도움을 받은 성도들은 그들이 받은 은혜를 영원히 기억하며 목사를 고맙게 생각하리라는 착각을 가진다. 그리고 받은 은혜를 간직하고 목사를 평생 잘 대해 주리라고 생각한다.

목사들이 생각하는 은혜의 종류는 많다. 예를 들면 말씀을 전하는 가운데 끼쳐 준 은혜, 기도를 해서 병을 고쳐 준 은혜, 가정의 아주 중대한 문제를 해결해 준 경우, 심각한 가정의 파탄을 막아 준 사건들, 자녀들을 위한 목사의 전적인 헌신, 결혼 중매와 주례, 조상의 장례식, 아이들의 세례식, 집사와 권사와 장로의 안수식, 사업의 조언으로 인한 성도의 경제적 번영 등등이다. 이와 같은 수많은 목사의 신령한 일들과 그 이외 일상 생활이나 인생살이의 아주 중대한 문제들을 목사가 개입하여 해결을 해 주고 잘 살아 갈 수 있도록 해 주는 경우가 있다. 그런 일을 해주어 성도가 어려운 난관을 극복하고 잘 사는 것을 보면 목사는 정말 일한 보람을 느끼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그러면서 그런 도움을 받은 그들이 자기를 평생 잊지 아니하는 은인으로 생각할 것이라고 지레 짐작을 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므로 인해 목사가 그들에게 마음을 풀어놓고 목사와 성도간의 긴장을 스스로 포기함으로써 생각지도 못한 배신감을 가지는 경우가 생긴다.

이와 같은 목사의 심리에는 마땅히 할 일을 해 놓고서도 그 이상의 어떤 것을 바라는 보상 시비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평생 나를 따라 다니던 이 천박한 보상 심리를 떨어버리지 못한 속물 목사였다.

 

1). 영원히 비밀로 간직할 이 집사 아버지의 죽음.

우리 교회에 나오는 부부 집사가 있었다. 남편은 운전 기사였고 남편의 동생들은 교회를 나오지 않을 뿐 아니라 좀 껄렁껄렁한 불량배 비슷한 사람들이 였다. 그 동생들은 무슨 범죄에 연루가 되어 몇 번인가를 감옥을 살고 나온 까닭에 경찰 대학을 다니던 남자 집사는 강제로 퇴교를 당하고 운전 기사가 된 좀 불행한 가족들이 였다. 그런 동생들은 가끔 형수를 많이 괴롭혔는데 어떤 때는 자기들이 공부도 못하고 불량하게 된 모든 원인이 형수에게 있다고 하면서 칼을 들고 죽인다고 협박하는 일도 불사했다. 그래서 여집사는 늘 동생들에 대해 공포심을 가졌다.

그런 동생들에게 시달리면서도 여집사는 시아버지를 모시고 단간 지하실 셋방에서 살았다. 그런데 그 시아버지는 건강이 무척 좋지 않았다. 처음에는 잘 몰랐었지만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시아버지의 병이 치로 불가능한 위암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병든 본인도 그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내가 그들을 만난 것을 지리산에서 장기 간 기도를 하고 다른 목사가 개척하던 교회를 인수받아 새롭게 교회를 개척한 때였는데, 그 교회의 남아 있던 성도 가운데 한 가정이 였다. 그들은 처음에 내게 무척 의지가 되고 힘이 되어 주었다. 늘 새벽 기도회도 빠지지 않을 뿐 아니라 비록 가난해도 목사를 사랑해서 명절이나 특별한 날이면 우리 부부를 초청해서 정성어린 식사를 대접해 주곤 했다. 특별히 그들에게는 어린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불행하게도 그 아이가 뇌성마비 환자였다. 그러나 그 아이는 매우 총명하고 똑똑 했을 뿐 아니라 믿음이 좋았다. 그 아이는 나를 보면 너무 나 좋아했고 식사시간에는 나를 위해 기도를 해 주었다. 그 아이의 기도는 언제나

「우리 목사님 용감한 목사가 되게 해 주세요」였다.

나는 그 아이의 기도가 매우 좋았다. 그 아니는 커서 서강 대학에 진학했다는 말을 들었다.

그 시아버지는 불신자였다. 그러나 내가 자주 시방을 가서 대화를 하고 친절을 베풀며 전도를 하자 복음을 잘 받아 들였다. 그래서 나는 한 영혼을 구원하는 심정으로 얼마 살지 못할 분을 위해 일주일에도 몇 번씩 시간을 내서 그 지하실 셋방을 심방 했고 그 노인에게 성경을 가르쳐 주었다. 아무도 없는 빈방에 하루 종일 누워만 있던 노인은 언제나 나를 반겨 주었다. 그렇게 몇 달을 수고한 보람이 있어서 그 노인은 드디어 교회를 나오기 시작을 했다. 온 성도들이 그 분을 지극히 환대를 했고, 예배를 마친 후에는 칼국수를 끓여 함께 먹었는데 그 음식을 그렇게 맛있게 많이 드셨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위암 환자임에도 불구하고 교회에 와 드신 음식은 소화도 잘되고 해서 힘이 나고 기력이 회복된다고 하셨다. 우리는 그렇게 점심을 먹은 후에는 이미 돌처럼 굳어져 버린 노인의 배 위에 손을 얹고 진심으로 간절히 병났기를 위해 합심하여 기도를 하고 간구했다. 어떤 때는 기도 후에 굳은 배가 물렁거리기도 했고 환자가 시원함을 느끼기도 했다고 말했다. 우리는 그런 상태로 라면 틀림없이 하나님의 고쳐 주심의 축복이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늘 그 노인을 위해 기도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정말 아찔해 지는 전화 한 통을 받았다. 그 여집사로부터 온 전화였다.

「목사님! 빨리 우리 집에 좀 오세요. 빨리, 빨리요」

「아니 무슨 일인데 그러세요」

「좌우간 빨리 좀 오세요. 큰 일이 났어요」

하도 급하게 울면서 부르는 여집사의 말에 하던 모든 일을 그만두고 구르다 싶이 그 집에 갔다. 가보고 나도 정말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은 사태가 발생한 것을 알았다.

그 노인이 방에 연탄불을 피워 놓고 자살을 해 버린 것이다. 남자 집사는 차를 몰고 시골에 가고 없었고 아이들은 학교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일을 나갔다가 다른 때와 달리 좀 일찍 돌아 온 여집사는 그렇게 시아버지가 죽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나에게 전화를 한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살 수 있으리라 그렇게 확실히 믿고 기도를 하고 있었는데 자살을 하다니----- 몇 번씩이나 천국을 이야기해 주고 구원을 확신시키고 주님을 믿는다는 신앙 고백을 말하게 하고 했는데 결국 그 노인은 자살을 해 버렸다. 자살이 죄라는 것을 말해 주지 않아서 어떻게 죽던 죽으면 천국에 갈 줄 알고 그런 짓을 했는지----- 거라나 그것도 아니 였다. 그 노인은 어두운 방에 심한 통증을 참아 가면서 한 장의 유서를 남겼다. 그 유서에는 살아 온 일들에 대한 회한과 자식들의 불효에 대한 원망이 가득했다. 그리고 자식들에게 더 이상 짐이 될 수 없어 죽노라고 했다. 한마디도 내가 그토록 정성을 들여 가르쳐 준 하나님의 말씀도 믿음의 고백도 없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고 답답했다. 나는 한 영혼을 구원하지 못했다는 자책감을 털어 버릴 수가 없었다.

그건 그렇다 치고 우선 이 일을 잘 수습해야만 했다. 그렇게 형수를 미워하며 저주하는 동생들이 이 사실을 알면 그 여집사는 무슨 행패를 동생들에게 당할지 상상이 안되었다. 그래서 나는 여집사에게

「절대 아버지가 이렇게 자살했다는 것을 소문 내면 안됩니다. 남편에게도 말하지 말고 자식들에게도 말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과 나와 집사님만 아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 유서는 내가 챙기겠으니 그리 아십시오. 대단히 죄송한 이야기지만 일하고 와 보니 이렇게 평안히 가셨더라고 말해야 합니다」라고 약속하고 연탄 화로와 유서를 없애고 시신을 수습하기 시작을 했다.

어떻게 했는지 나도 모르게 시신을 대강 대강 수습하고 나서 여기 저기 전화를 해서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을 아들과 형제들에게 알리기 시작을 했다. 배우지 못하고 세상을 원망하며 아무렇게나 산 흔적들이 온 몸에 배여 있는 3형제 아들들이 여기 저기서 찾아 왔다. 그들은 아버지가 돌아 가셨는데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그리고 형수를 죽일 년 보듯이 보면서 마치 형수가 아버지를 잘 모시지 못해서 죽은 것처럼 살기를 들어냈다. 그런 동생들 앞에서 여집사는 반죽음이 되어 설설 기었다.

문상객도 없는 쓸쓸한 장례에 우리 성도들은 힘을 합해 장례비용도 마련하고 밤을 세우며 상주들을 위로했다.

이제 염을 해야 했다. 나는 이미 학교에 다닐 때에 충현 교회 김창인 목사님에게 시신을 수습하는 방법을 배운 바가 있었고 군대에서 많은 시신을 보았으며 몇 번 시신의 염을 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 였다.

나는 돌아가신 분의 온 몸을 스킨으로 정갈하게 씻어 드리고 깨끗한 옷으로 갈 입힌 후에 방에 모셨다. 그런데 노인이 워낙 키가 큰 장신이 여서(약 190Cm) 정말 혼자 그 일을 하기에는 너무 벅찼다. 혼자서 온갖 힘을 써 가며 시신을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며 온 몸에 땀이 흠뻑 젖어 염을 하는데, 힘이 장수 같은 아들들은 근처에 오지도 않을 뿐 아니라, 여집사도 어디를 가 버렸는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참으로 답답하고 괘씸한 인간들이 아닐 수 없었다.

죽을 힘을 다해 염을 하고 나니 깜깜한 밤이 되어 버렸고 날을 잔 듯 흐려 금방이라도 소나기가 퍼 부를 것 같았다. 그래도 격식이 있는지라 3일 장을 치루어야 했다. 염은 그런 데로 했지만 이제 입관할 일을 생각하니 끔찍했다. 누가 조그만 도와주면 되겠는데 어떻게 그 무거운 시신을 들어 관에 넣어 입관을 한단 말인가?

이런 저런 염려를 하며 잠이 들었다. 날이 밝았을 때 나는 더욱 절망했다. 억수 같은 비가 쏟아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래도 오늘 입관을 해야 내일 발인 예배를 드릴 수 있고 장지에 가 하관식을 해서 장례를 잘 마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장의사를 부를 형편이 안되어 가까이 있는 장의사에 가서 관을 가장 큰 것으로 사 오게 했다. 유족들은 내가 하는 양만 쳐다보고 있을 뿐이 였다. 비를 맞으며 가져온 관에 창호지 등을 깔고 시신을 몇몇 집사들과 함께 힘겹게 들어 간신히 관에 모셨다. 그런데 여기서 전혀 예상치 않은 사태가 발생했다. 나는 정말 암담했다. 시신의 키가 너무 커서 관에 들어가지를 않는 것이 아닌가? 더 이상 큰 관을 가져오라고 가져온 관을 돌려보냈다. 네 시간이 족히 넘어서야 다른 관을 가져 왔다. 처음에 관을 사 온 장의사에는 없어 서울 시내를 다 뒤져 가져 왔다고 했다. 비는 여전히 억수로 쏟아졌다. 나는 머리가 윙윙거리고 힘이 빠졌다.

그런데 다시 가져온 가장 큰 관도 마찬가지여서 시신을 넣고 보니 발목이 들어가지 않는 것이 아닌가? 이제 와서 관을 세로 맞출 수도 없고, 그렇게 할 수 있는 돈도 없다.

나는 하나님께 기도를 했다. 어떻게 해야 이 장례를 무사히 은혜롭게 잘 마칠 수가 있다는 말인가?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셨다. 우선 시신을 관에 높이고서 그것에 잇는 모든 사람들을 내 보냈다. 그리고 머리와 발을 함께 관에 넣고 나니 무릎이 세워졌다. 나는 세워진 그 무릎을 힘껏 짓눌렀다. 관이 아래쪽과 위쪽이 터질 것처럼 부풀었다. 그러나 다행이 깨지지는 않았다. 관의 뚜껑을 닿아 보니 조금 들떴다. 그렇게 몇 번을 거듭하고 나니 간신히 관의 뚜껑을 닫칠 수가 있었다. 급하게 사람을 불러 준비된 관 끈으로 관을 묶었다. 만일 관이 터져 나가면 이제는 정말 살수가 없을 것 같았다. 비는 여전히 왔다.

그렇게 해서 간신히 그 장례는 마쳤다. 그 어려운 장례를 마친 후에 큰 보람이 생겼다. 이 모든 것을 본 둘째가 마음을 바꾼 것이다. 그리고 나에게 접근해 왔다.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그 후에 그는 신앙 생활을 시작했고 자기들을 거두기 위해 그렇게 고생을 많이 한 형수를 이해하게 되었다. 나는 아내와 함께 그 둘째를 중매해서 장가를 보내 주었다. 그들 부부 사이에 아들이 태여 났다. 나는 그 아들의 이름을 하나님의 축복을 많고 큰 인물이 되라고 ‘우람’이라고 지어 주었다. 그는 그 후에 직장도 잘 다니며 가끔 우리들에게 전화를 해서 안부를 물으며 부부가 아이와 함께 행복하게 살게 되었다.

 

그런데 내가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께 이 글을 쓰는 것은 이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위에 기록한 일들은 한가지도 거짓이나 과장이 없는 사실 그 자체다. 이런 일을 겪고 나면 세상 사람들도 더 이상 가까워질 수 없는 좋은 관계가 이루어질 것이다. 그런데 성도들과 목사 사이에는 그렇지 않았다.

그렇게 어려운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나서 그 집사 부부는 우리들을 형제처럼 사랑해 주었다. 그 남자 집사는 나와 동갑이 였지만 나를 존경하고 아껴 주었으며 주님 다음으로 나를 사랑하고 존경한다고 고백을 했다. 전에도 그러했지만 장례 이후에 그들 부부의 우리를 대하는 태도는 정말 교회를 개척하는 우리들에게 큰 보람과 기쁨을 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우리를 배신하기 시작을 했다. 교회가 성장을 하자면 새로운 성도들이 등록을 해야 한다. 새로운 성도들이 등록을 하면 목사는 그 새 신자를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우리 교회에서 신앙의 부리를 내리고 하나님께 충성하도록 각별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래서 이미 기존의 우리 성도들 보다 심방을 해도 한 번 더 심방을 하게 되고 친절을 베풀어도 더 친절하게 대하는 것이 당연하고 다른 기존 성도들도 이 점을 충분히 이해해 주어야 한다. 나는 이미 이런 점들을 경험하고 알고 있어서 누누이 새 신자와 기존 신자들의 관계를 설명하고 새 식구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사랑을 베풀어야 함을 주지시킨 바가 있었다.

그런데 그 집사 부부는 그것이 도저히 잘 안되는 모양이 였다. 새 성도에 대한 목사의 각별한 관심은 자기들을 무시하고 무관심한 것으로 생각하기 시작을 했다. 명절이 되면 가끔 성도들 가정에서 초청이 왔다. 추모 예배를 드려 달라던지 아니면 식사를 하려 오라든지 하는 초청이다. 우리는 그 집사 집에서 언제나 추석 아침을 먹어야 했다. 그런데 성도들이 많아지면서 명절 초청이 많아지자 순서를 짜야 했다. 가장 적절한 시간대에 새 성도의 가정을 방문해 예배를 드리고 기존의 성도 가정은 좀 시간이 마지않아도 양해를 하도록 구했다. 그러기를 몇 번 거듭했을 때 그들 집사 부부는 우리들을 초청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 입에서 목사에게 치명적인 비방과 욕설이 터져 나왔다.

「우리 목사님은 전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부자 교인만 찾아 다녀----변했어.」

「우리 목사님은 사랑이 식어져 버렸어」

「우리 목사님은 돈 있는 사람만 좋아하고 용돈 많이 주는 사라만 찾아 다녀. 삯꾼이 되어 버렸단 말이야」 등등

그 소문을 듣고 그들을 찾아 가 해명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그 집사 가정에서 그래도 목사를 위해 기도를 하는 사람은 그 어린 아들의 「용감한 목사 되기 위한 기도‘밖에 없었다.

그와 함께 개척의 멤버가 되었던 성도들이 힘을 합해 나를 공격하기 시작을 했다. 정말 괴로운 일이 였다. 그들은 새로 들어 온 성도들의 이름을 불러 가며 목사를 핍박하고 압박을 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새 성도들은 몹시 기분 이상해 했다. 그리고 교회는 양대 세력으로 갈라져 치열한 공방전을 하기 시작을 했다.

이런 현상은 우리 교회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개척 교회가 성장하면서 언제나 있을 수 있는 사태인 것이다. 그래서 어떤 성장학 교수는 그의 책에서 교회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터줏대감 노릇을 하는 기존 성도들을 몰아 내야 한다는 극한 말을 하고 있는 것을 본바 가 있다.

나는 이 일로 고통을 많이 겪었다. 그리고 아주 값비싼 교훈을 얻었다. 아무리 성도들을 감동시킬 수 있는 수고를 해 주어도 성도는 결코 한 식구가 될 수 없으며, 성도는 모든 것을 이해해 주고 알아주는 영원한 친구는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성도는 언제나 목사의 사랑을 독차지하기 좋아하는 주님의 양들이요, 목사는 주어도 주어도 더 줄 수 있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하나님의 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할 수 있었는지는 목회 잘하기에서 말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목사의 모든 일들을 아주 투명하게 했다. 목사의 모든 일을 유리 창 보듯 하도록 했다는 말이다. 그리고 서로 앙숙이 된 그들이 이해할 수 있으며 도움이 되도록 각별히 신경을 써 교회를 봉사하게 하고 기도회에 참여하도록 배려를 했다. 정말 어려운 일이 였다.

목사는 성도들의 모든 일을 도와주되 하나님의 종으로써 심부름을 하는 것이며, 그 이상의 것을 기대해서는 안된다. 그 이상의 것을 기대하면 배신감 때문에 목회를 잘 할 수 없는 수많은 일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성도의 잘못이 아니라 목사 스스로 만들어 낸 목회의 함정들이다.

 

“(롬12:3)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롬15:1)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요일3: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2). 집사의 급사한 남편의 장례식과 속물 목사가 병을 얻은 이야기.

또 우리 교회에서 일어났던 슬픈 이야기를 사례로 해야겠다. 목회를 하다 보면 별별 일을 다 만나지만 정말 이런 일은 안 만났으면 좋겠고 일을 하면서도 괴롭고 슬픈 고통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

오전 10시쯤 심방을 가기 위해 준비하고 있을 때 전화가 왔다. 전화에서는 화급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목사님. 큰 일 났어요」

「먼데요」

「이 집사 남편이 갑자기 죽었대요」

「아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나도 잘 몰라요. 하여튼 태릉 입구에 있는 성심 병원으로 오세요」

전화는 그렇게 끝이 났지만 우리 앞에는 정말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 기다리고 있었다.

죽은 사람은 우리 교회 이 집사의 남편인데 주일인 어제도 교회를 나와 함께 예배를 드리고 인사를 나눈 평신도였다. 인사를 하면서 요세 사업이 어떻느냐 는 물음에 거저 그렇다고 대답하며 씩 웃던 모습이 내 생각에 역력했다. 그는 이제 겨우 36살이 된 사람이지만 동대문 시장에서는 그런 데로 자리를 잡고 꾀 잘 나가는 상인이 였다. 아내인 이 집사 사이에는 남매가 있었으며 집도 40여평이 되는 아파트에서 살아 우리 교회 수준으로 보아서는 잘 사는 측에 드는 사람이 였다. 그러니까 그의 나이로 보나, 그의 사는 형편으로 보나, 다른 사람들의 부러움을 살 만한 조건을 고루 고루 갖추고 사는 성공한 사람 중의 한 사람이 였다.

그런 그가 갑자기 죽어 버린 것이다. 사연을 그렇다. 아침을 먹고 출근을 하다가 갑자기 가슴이 몹시 아파 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영양제 주사를 맞을 요량으로 인근에 있는 병원에 들려 간단한 진찰을 받고 링게를 맞고 있었는데 갑자기 버르적거리며 손 쓸 틈도 없이 그대로가 버렸다고 한다.

병원에서는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유족들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주사를 맞다가 죽었으니 주사 쏘크 사라는 것이다. 여기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문제로 발전했다. 유족의 모든 식구들이 총 동원 되었다. 수 십명이 되었다. 유족들은 병원 로비에 자리를 잡고 죽은 남편 살려 내라고 고함을 지르기 시작을 했다. 동생을 살려 내라고 했다. 자식을 살려 내라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을 했다. 사태가 아주 험악해졌다. 병원 사람들은 극소수의 사람만 놔두고 어디로 모두 피신을 해 버렸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일일이 만나 위로하고 그들의 식사를 수발 드는 성도들을 지휘하며 뒤 바라지를 하기 시작을 했다. 그 때도 비가 많이 왔다. 8월초였으니 덥기는 얼마나 더운지 날마다 후덥지근한 날씨에 일 주일 동안 병원 농성을 거들려야 했다. 병원도 병원이지만 그런 의료 사고에 대한 투쟁을 하는 유족들의 몰골이 말이 아니 였다. 큰 병원 영안실로 옴겨 놓은 시신을 장례 할 염두도 낼 수 없었다.

병원에서는 의료 사고가 아니라고 했다. 그리고 그들은 경찰에 신고를 해서 불법으로 대모를 하고 병원의 영업을 방해하는 우리들을 처리해 달라고 공권력에 호소를 했다. 경찰이 밀어 닫쳤다. 소위 데모하는 사람을 싫어 나르는 닭장차를 가지고 그들은 수십 명이 몰려 와 우리 모두를 강제로 차에 태웠다. 우리들은 그 힘이 넘쳐 나는 젊은 정경들에게 붙들리고 끌려 종암 경찰서로 실려 갔다. 그런데 그런 와중에 남자들 보다 여자들이 더 힘이 있었다. 죽은 사람의 누나가 웃옷을 벗어 던졌다. 경찰들은 발가벗은 여자를 어떻게 해 보지를 못했다. 아무도 손을 댈 수 없는 것이다. 지옥이 따로 없었다.

경찰들은 우리들을 끌고 가 병원에서 영업 방해죄로 고발을 하면 손해 배상을 물어주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다른 몇 가지 죄가 더 성립될 수도 있다고 했다. 그들은 병원 측에 보상을 요구하려면 정당한 법 절차를 밟아야 한다고 하면서 유족들을 진정시키도록 내게 요구를 했다. 나는 이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너무 잘 알았다. 우선 내가 병원 측의 일방적인 시침떼기를 용납할 수가 없는 것이며, 법적인 절차를 밟는 사이에 무슨 짓을 해서 오리발을 내 밀지 예측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한편 마냥 이런 식으로 사태를 방관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무엇보다도 미망인과 가족들, 그리고 60이 넘은 아버지가 견딜 수가 없이 보였다. 장례식을 하지 못하고 병원 영안실에 있는 시신 처리도 급했다.

경찰에서는 의료 사고인지를 가려 달라는 우리들의 고소장을 신속히 처리하기 위해 부득이 사망한 사람의 부검을 실시해야 한다고 하면서 미망인의 동의서를 요구했다. 우리들은 모두 의료 사고라는 확신이 너무 강했기 때문에 또 다른 아픔이지만 부검을 하자고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나는 이 문제에만은 끼여들지 않았다. 너무나 중대한 사안이기 때문이다. 경찰은 부검을 하는데 공정성을 가진 두 사람의 입회인을 요구했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은 죽은 사라의 아버지와 내가 추천되었다. 나는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만 유족들의 부탁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졸지에 평생 처음으로 시체 부검의 증인이 되어 버렸다.

부검을 위해 시신이 병원에서 신월동에 있는 국립 과학 수사 연구소로 옮겨졌다. 시신을 실은 엠브랜스는 엥엥 소리를 내며 기세 좋게 막 달렸다. 부검 실에 들어가니 역겹고 비릿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죽은 사람들의 냄새겠거니 하니 정말 기분이 나빳다. 마치 푸줏간의 고기 분해하는 탁자 모양의 커다란 스텐레스 판에 우리의 시신이 놓였다. 그리고 그 옆에 또 다른 남자의 시신이 모로 누워 있었다. 식당의 주방에서 흔히 쓰는 귀밑까지 덥힌 하얀 모자를 눌러 쓴 부검 실의 평범한 사람들은 아주 익숙한 솜씨로 죽은 사람을 이리 저리 돌려 가며 난도질을 하기 시작을 했다. 날카로운 여러 가지 칼을 가지고 순식간에 두 개골을 까뒤집고 이어 가슴을 절개하여 심장 부위를 벌려 놓고 나와 죽은 자의 아버지를 가까이 오도록 불렀다. 그들은 망자의 가슴에 고인 까맣게 변질된 피를 조심스럽게 그릇에 담고 난 후 우리가 보는 앞에서 심장을 도려 내 꺼냈다. 나는 도저히 그 광경을 볼 수 없었으나 유족들을 생각해서 구역질이 나는 것을 억지로 차마 가며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내 옆에 있는 아버지는 도저히 그 광경을 볼 수 없었는지 얼굴을 돌리고 말았다. 그들은 도려 낸 심장을 우리 코앞에 들어 보이면서 설명을 하기 시작을 했다.

「이 분은 주사 쏘크로 죽은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심장으로 들어가는 가장 큰 핏줄인 관상 동맥이라는 것인데 이 동맹이 이렇게 막혀서 사망한 것입니다」

그들이 보여준 심장은 색깔이 까맣게 되어 있었고 그들이 가르친 관상 동맥은 다른 혈관과 달리 심장 근처에서 까맣게 변질된 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들은 그 딱딱하게 굳은 혈관을 날카로운 칼로 잘라 보여 주었다. 그곳에는 누렇게 기름이 끼여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콜레스테롤이라고 했다. 그럴 뿐만 아니라 그 누런 기름으로 좁아진 혈관에서 까만 진액이 고여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담배의 니코찐이라고 했다. 그렇게 혈관이 이중 삼중의 이유로 좁아져 있는데 주사를 놓았기 때문에 혈압의 압력이 견디지 못하고 심장의 박동이 멈춰져 버린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그들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진단은 주사에 의한 쇼크사가 아니라 관상 동맥 경화증으로 혈관이 막혀 죽은 것이며 주사를 맞지 아니해도 급사를 면치 못할 것이라고 했다. 그들은 이런 급 사자들이 사울에서만 하루에 6-7건이나 된다고도 했다.

 

병원에서는 자기들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이 증명이 된 만큼 그 동안 병원에 입힌 손해와 병원의 이미지를 나쁘게 한 정당한 피해 보상을 요구하기로 했다는 연락이 왔다. 유족들은 사망의 원인이 확실해진 만큼 병원의 민 형사상의 요구에 대해 당황하기 시작을 했다. 그러나 나는 그들과 의견을 달리했다.

「아무리 그런 가능성이 있다고 해도 일단 병원에 들어가 가슴의 통증을 호소하며 영양제 주사를 맞게 해 달라고 했으니 주사를 주기 전에 주사를 주어도 좋은지 미리 살펴 볼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의무를 소홀히 한 체 환자가 요구한 주사를 주었다는 것은 의사들의 업무 소홀히 라고 할 수 있으니 그들에게 굴복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우리도 변호사를 선임해서 이 일에 대한 정당한 요구를 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했다.

그러나 우족들의 생각은 달랐다. 그 동안 이 문제로 너무 시달렸고 더 이상 이 문제가 확대되거나 법정 싸움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러는 중에 병원 측에서 유족의 대표 중에 한 사람, 유독 아버지를 면담하고자 했다. 그들의 요구에 따라 병원을 다녀 온 아버지는 여기서 모든 문제를 끝내기로 했다고 했다. 병원에서 손해 배상을 요구하지 않는 대신에 유족 측에서도 민 형사상의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각서를 쓰고 돌아 온 것이다. 나는 이에 더 할 말이 없었다.

이제 장례식을 해야 했다. 일주일이 넘는 시비로 늦어진 장례식은 대학 병원 영안실에서 시작이 되었다. 장례식을 진행할 지음 어떤 사람이 사망자의 보상을 병원에 요구해야 한다면서 도와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유족들은 거절을 했다. 좀 아쉬운 느낌이 들었으나 유족들의 확고한 의지는 변하지 않았다.

드디어 발인을 하고 영구차는 시신과 가족들과 성도들을 태우고 충청도 어딘가에 있는 선산으로 출발을 했다. 장지가 멀어 아침 일찍 출발을 했다.

나는 우리 교회 장로와 전도사와 몇 사람의 성도들과 함께 그들을 따라 장지로 갔다. 아침 일찍 출발을 했음에도 점심때가 넘어 장지에 올라가는 산기슭에 도착을 했는데 거기서 또 문제가 발생했다. 장지까지 가는 길목에 무슨 공사를 하고 있었는데 길이 없어 차가 올라 갈 수가 없을 뿐 아니라 많이 온 비로 인해 난관에 난관이 겹쳤다. 그렇다고 여기서부터 관을 운구할 수도 없었다. 차에서 내려 차를 밀기도 하고 길을 만들어 가면서 4시간에나 걸려 겨우 장지에 도착을 했다. 예상보다 훨씬 더 늦은 시간에 관을 하관 했다. 그리고 하관식 예배를 들이려는데 또 문제가 생겼다. 죽은 사라의 삼촌이 되는 시골 노인네가 술을 먹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하관식 예배를 못하게 했다. 재래식으로 장례를 해야지 듣도 보도 못한 괴상한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럴 만하기도 했다. 그 집안에서는 한 사람도 주님을 믿지 않았고 오로지 시집을 온 며느리만 주님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 였다. 주변의 사라들이 간신히 말려 하관식 예배를 드리긴 했다. 점심도 먹지 못하고 지칠 대로 지친 우리들은 오후 5시가 되어 대기하고 있는 차에 올라 쉬고 있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유족들이 내려오지 않았다. 전도사를 시켜 알아보니 재래식의 제사를 지내고 있다고 했다.

나는 정말 힘들었다. 마침 서울로 가는 차편이 있어 그 차를 이용하고 싶었으나 전도사가 급히 볼일이 있다면서 내 의사도 묻지 않고 그 차를 붙들었다. 나는 그냥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부아가 치밀었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해서 서울에 도착을 했을 때는 밤 12시가 넘어 있었고 나는 지칠 대로 지친 몸을 다음날 2시에야 자리에 눞일 수 있었다.

그렇게 그 해 여름은 한 가정의 장례에 온통 교회가 매달려 몸부림을 치며 지나가고 말았다. 교회에서는 사망한 사람도 그렇지만 유족들을 생각해서 이중 삼중으로 조의금을 거두어 힘에 겹도록 그들을 위로했다.

그런데 그 일이 내게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장례를 치르고 난 며칠 후부터 나는 몹시 견딜 수 없는 갈증에 시달려야 했다. 처음에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다. 강단에서 물을 홀짝거리며 계속 먹어대는 나를 본 권사가

「목사님 아무래도 이상해요. 병원을 가 보세요」했다. 나도 병원을 가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여의도 성모 병원에 근무하는 집사를 통해 진찰을 받았다. 검사를 마치고 기다리는 중에 그 집사는 근심스러운 얼굴로 내게 왔다.

「목사님 당뇨가 온 것 같은데요------」

그랬다. 나는 당뇨 환자가 되어 버린 것이다. 혈당의 수치가 최악이었다. 500-600이 넘어 있었던 것이다. 나는 즉시 입원을 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이 병에서 놓여나지를 못하고 있다. 당뇨는 발병하기 5년 전부터 서서히 진행된다고 하니 꼭 그 장례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한 여름의 과로가 발병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집사는 그런 난리를 치르고 난 6개월 후에 종암동에 아파트를 세로 분양을 받았다면서 교회를 떠나 버렸다. 그렇게 교회 일이 열심이던 여자 조카는 교회에 놔 둔 지갑에서 10,000원을 잃어 버렸다는 핑계를 대고 조금 후에 교회를 떠났다. 그리고 1년쯤 지냈을 때 어떤 일인지 모르나 종암동의 그 아파트에서 우리 교회 근처로 다시 이사를 왔다. 그들이 이사를 왔다는 소식을 듣고 심방을 하려고 전화를 했다. 그러나 우리는 깨끗이 거절을 당했다. 성도들은 그들을 교회로 대려 오지 못하는 목사의 무능력을 암암리에 질책했다.

 

여기서 이 일을 이렇게 자세히 장황하게 늘여 놓는 이유가 있다. 그렇게 당할 수 없는 고초를 당하고 고생을 한 나와 우리 성도들에게 유족들은 정말 냉정하기 그지없었다. 남편이 없어 아이들과 함께 살 길이 막막해서일까? 아니면 교회가 으레 그런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고 생각해서일까? 그들은 감사 헌금도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내 개인에게 고맙다는 말로만의 인사뿐이 였다.

 

나는 정말 서운했다. 그럴 수 있는 것인가? 그러나 목사의 그 서운한 감정이 정말 더 큰 문제라는 것을 이제는 잘 알고 있다. 내가 성도들을 위해 죽을 고통을 당하고 설혹 죽었다고 해도 그것은 하나님의 종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해 마땅히 할 일을 한 것뿐이 아닌가? 내가 그들에게 서운한 감정을 가진 것은 아직도 속물 근성을 버리지 못한 욕심 많고 대접받기를 좋아하는 미련한 종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때문이라는 것을 안다. 그래도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 집사가 왜 우리 교회를 오지 않는 것일까?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을까? 나는 그 이유를 아무에게도 듣지 못했다. 아무리 성도들에게 사랑을 베풀어도 성도들은 목사 진심을 다 이해하지 못한다. 목사의 성도들을 위한 고생은 아주 당연한 것이며 그런 일을 하기 위해 목사가 된 것이 아닌가? 그 말은 정말 지당한 말이다. 그러나 그런 성도들의 생각이 서운하고 그 서운함을 쉽게 털어 버리지 못하는 나의 하나님의 종답지 못한 인간적인 감정을 스스로 무마하기에 나는 너무 세속적인 죄인이 였다. 어떻게 하면 무익한 종이 마땅히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하고 주님과 성도들을 위해 고통 당하는 것만을 즐거움으로 알고 목회를 하는 성자다운 목사가 될 수 있을까?

 

정말 나를 지금도 부끄럽게 하시는 주님의 말씀이 있다.

“(롬8: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골1:24)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딤후1:12) 이를 인하여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딤후4:5)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