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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와 성도의 생각 차이들

nokobo 2010. 4. 3. 16:40

목사와 성도의 생각의 차이들(5)

 

7. 성도들은 목사와 목사 가정에 대한 생각이 목사와 다르다.

 

목사들의 교회를 사랑하고 성도를 사랑하는 마음은 아주 각별 한데가 있다. 기도를 해도 성도들을 위해 먼저 기도를 하고 목회 계획을 세울 때도 성도들을 생각하며 일년을 시작할 때도 성도들을 생각하여 설교를 준비하고 기도를 한다. 목사에게 있어서 성도는 왕이기도 하고 부모이기도 하며 형제 자매이기도 하다. 모든 관심과 열정이 성도들에게 가 있다. 성도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잘 되는가 못되는 가에 삶의 모든 것을 걸고 사활을 걸어 정열과 열정을 쏟아 붓는다. 그것도 모자라 어떻게 하면 교회를 위해 죽을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하는 사람도 없지 않아 있다. 나도 한 동안 교회를 위해 순교를 하게 해 달라고 했다. 그러다 기도를 중단했는데 이유는 요즘 세상이 목사들의 순교를 요구하는 것도 아니고 순교를 할 만한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좌우간 목사에게 있어서 교회는 목사의 생명과 같고 삶의 모든 것이며 생활 전체라고 할 수 있다. 교회를 염두에 두지 않고 무엇을 생각할 수 있으며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가정 일에는 소홀해 지고 가정을 위한 어떤 계획을 세운다든지 아이들을 위해 무엇을 한다는 것은 여간 어색하고 아내와 함께 어디에 가서 모든 것을 다 벗어버리고 편하게 마음놓고 쉴 만한 여유도 생각도 하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목사들은 대개의 경우 자기 이름으로 등기된 집 한 칸도 없고 아이들의 장래를 위한 적금이나 교육 보험 같은 것도 들지 아니하며 건강을 위한 대책도 세우지 않는다. 이런 자신과 가정에 대한 어떤 조치도 하지 않는 이유는 목사 개인과 가정의 모든 일들을 교회가 다 책임을 져 주리라는 기대와 믿음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실질적인 원인은 교회 일로 인해 자기와 가정 사에 대한 미래를 계획하고 대비할 만한 마음의 여유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성도들은 목사가 교회에서 지불한 사례비를 어디에 쓰는지 모른다고 말한다. 나는 그렇게 말하는 사람을 많이 만났다. 그들은 적지 아니한 사례비 이외에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교회가 책임지기 때문에 사례로 받은 돈은 차곡차곡 저축을 하는 줄로 착각을 한다. 그러나 목사는 그렇게 살지 않는다. 교회에서 받은 사례는 고사하고 건축이나 다른 특별한 일이 벌어지면 빗을 내서 교회에 헌금을 한다.

요즈음 목사들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우리 시대의 내 친구 목사들은 교회가 필요로 하는 돈이 있는데 사례를 받아 차곡차곡 저축을 하며 쌓아 두기를 하기에는 목사의 신앙적 양심이 도저히 허락하지 않아 받는 즉시 헌금을 했다. 그러다가 교회에서 건축이나 다른 특별한 일을 벌리면 헌금을 작정하게 되고 그 작정된 헌금을 드리기에 수년씩 내지 십년도 더 넘게 사례비 전액을 드리고 그것도 모자라 돈을 빌려 바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래서 친구 목사들을 만나 물어 보면 교회에 빗을 지지 않고 사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을 정도였다.

이렇게 살다가 이제 우리 시대의 막이 서서히 내려지고 있어서 친구 목사들은 은퇴를 생각하게 되고 은퇴를 한 목사들도 생겼다. 그런데 이제 와서 가정과 자식들의 문제가 매우 심각하게 대두되어 목사들을 괴롭히는 것이다. 우선 자식들을 마음대로 공부시킬 수가 없다. 미리 미리 준비한 것이 없으니 교회에서 목사의 자식들 공부하는 일을 책임져 주어야 하는데 전혀 그러치를 못한다. 대학까지는 등록금에 한하여 그런 대로 책임을 져 주지만 대학원이나 유학 가는 일에 대하서는 말도 꺼낼 수가 없다. 물른 그렇지 않는 교회도 있겠지만 목사 자식들의 유학 비를 책임지는 교회가 몇이나 될 것인가? 그래서 아주 우수한 목사의 자녀들이 꿈도 있고 충분한 가능성도 있으되 공부를 계속할 수가 없다. 내 친구 목사의 딸도 정말 우수한 인재다. 서울의 일류 대학을 나왔고 영어와 독일어에 능통하며 잘 생기고 모든 면에서 기대할 만한 미래가 보이는 아이다. 이 아이는 미국의 하버드나 예일의 로 스쿨을 가고 싶어했는데 아직 출발을 못하고 있다. 문제는 돈이 없는 것이다. 아마 어느 누구의 도움이라도 받아 로 스쿨을 나오면 틀림없이 교회나 나라를 위해 좋은 일을 많이 할 수 있는 훌륭한 인물이 될 것이다. 아이의 자라 온 과정이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나 인품이나 성실성으로 보아 그럴 가능성이 200%가 된다. 그러나 돈이 없어 보내지 못하고 있다.

집도 없다. 모아 놓은 돈도 없다. 그렇게 살지를 않았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대책 없는 무능한 아버지가 되고 대책 없는 남편이 되어 버렸다. 처음에는 아이들도 부인도 목사를 동정하고 한 평생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산 것만으로도 잘 살아 왔다고 말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가면서 생활은 점점 어려워지고 궁핍해졌으며 할 수 없이 아이들이 벌어 오는 것을 얻어먹고 사는 처지가 되어 버렸을 때에 목사의 체면이고 아버지의 위신이 모두 없어져 버리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사에게 그렇게 많은 사랑을 받고 믿음을 키움 받았던 성도들은 목사를 돌아보지 않았다. 목사는 하나님의 영광을 욕되게 할 까 하여 다른 사람처럼 이리 저리 배회하지도 못한 체 하루 빨리 하나님의 나라로 가기만을 기도했다.

성도들은 이런 목사의 장래에 대하여서는 전혀 알려고 하지 않으며 알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자기들이 하는 것처럼 교회에서 받은 사례를 모아 노후 대책을 하고 있으리라고 생각하든지 아니면 그렇게 하나님을 위해 충성했으니 하나님께서 목사의 모든 것을 책임지리라고 생각을 하는 것같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주님의 이 말씀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하겠다.

“(눅22:36) 이르시되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주머니도 그리하고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

“(눅16:8)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8. 성도들이 목사가 받은 축복과 은혜를 같은 심정으로 기뻐한다고 생각한다.

목사는 성도들이 받는 축복을 정말 내가 받은 것처럼 기뻐하고 감사한다. 그러나 성도들은 그렇지 않다. 진심으로 목사와 그 가족을 사랑하는 사람도 없지 않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성도들은 정말 냉정하고 냉엄하다. 목사와 그들이 관계가 인간적인 관계로 맺어진 것이 아니 여서 그런지는 몰라도 목사의 기가 질리게 냉정한 일들을 성도들에게 당하는 경우가 있다.

 

내가 그런 일을 당했다.

우리 딸 결혼을 할 때다. 우리는 아이의 결혼 자금이 없었다. 어디에서 누구에게 최소의 결혼 자금이라도 마련해야 했다. 아내는 결혼 날을 받아 놓고 발을 동동 굴렸다. 그러나 나는 기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사람들은 우리 성도들이 였다. 내가 우리 성도들에게 기대하는 것은 몇 단계가 있었다.

그 첫 단계는

성도들이 우리 아이 결혼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모든 비용을 책임져 주는 것이 였다. 그 비용이라는 게 2,500만원이나 3,000만원 정도면 되었고 성도들의 생활 수준으로 보아서 별로 어려운 것이 아니라고 생각을 했다.

두 번째 단계는

성도들이 비용을 모두 책임지지는 않고 결혼 비용을 꿔 주는 것이 였다. 물른 이자 없이 말이다. 그리고 목사의 형편이 닫는 데로 갚아 달라고 하는 것이다.

세 번째 단계는

교회의 각 부서에서 결혼에 필요한 돈만큼 나누어 선물을 해 주는 것이다. 농이던 냉장고든 한가지씩 맡아 주면 달리 돈이 들어 갈 이유가 없으니 그것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묵시적으로 결혼 축의금을 좀 넉넉히 해서 다른 결혼을 충당하게 해 주는 것이다.

네 번째 단계는

교회에서 건축을 하기 위해 사 놓은 집들이 있으니 그 집을 담보로 은행의 대출을 받아쓰고 이자는 교회에서 감당하되 원금 상환은 우리들의 형편에 따라 갚으면 된다고 말해 주는 것이다.

다섯 번째는

원금이나 이자 모두 목사가 책임을 지되 집을 담보로 은행의 대출을 받도록 허락하는 것이 였다.

마지막 단계는 목사 가정의 복된 일에 개입하지 않는 것이다.

 

아마 이 이야기를 듣는 목사들은 최하로 결정을 해도 다섯 번째는 되리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나의 경우에는 그러치 않았다. 마지막 최악의 반응을 보였다. 내가 덕이 없고 그 동안 성도들을 사랑해 주지 않아서 그런지 모를 일이지만 우리 가정 사에 대한 성도들의 반응은 그야말로 싸늘 그것이 였다. 함께 15년 이상을 언니 동생하며 살던 권사도 그런 반응을 나타냈고 전도해서 안수 집사되게한 사람도 그 모양이 였다. 자기 집안의 어려움이 동참해서 밤잠을 자지 못하고 경상도 어디까지 쫓아다니면서 일을 수습해 주었던 집사 내외도 묵묵 무답이 였다. 나는 놀랐다. 내 자신이 그 동안 무엇을 하고 살아 왔는지를 돌아보고 그 허무함에 놀랐고 그토록 정을 주고받았던 성도들의 반응에 너무 놀랐다.

그러나 한 남자 집사가 집을 담보하여 융자를 받아쓰도록 허락을 해 주어서 미적거리는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아 가며 돈을 빌려 딸아이를 출가시켰다. 결혼을 할 때 나는 우리 교회 성가대를 지휘하는 여 집사에게 축창을 부탁했다. 그러나 그 여집사는 자기 집에 동생이 왔다는 핑계로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성악을 전공한 친구 목사의 딸에게 부탁을 해서 축가를 부르게 하고 수고 비를 주어야 했다. 참으로 부끄럽기 작이 없는 이야기다. 내 부끄러운 허물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솔직히 말해 목사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가당치 않는 일일지 모르지만 그 일이 있고 나서 나는 성도들에게 정이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목사의 생일이 되면 성도들은 제직회를 해서 목사 생일 잔치를 마련해 준다고 법석을 떤다. 그렇게 요란하게 의논을 해서 음식을 마련하고 선물을 준비하여 생일 잔치를 해 준다. 물른 그 기름지고 맛이 있는 음식들은 모두 와 먹고 나머지는 싸가지고 간다. 아내는 100명도 넘는 그들이 간 후에 죽도록 일을 했다. 그들이 설거지를 다 하고 갔지만 그래도 남은 일들이 있는 것이다. 우리들에게 남는 것은 목사를 위해 큰사랑을 베풀었다는 성도들의 자긍심과 몇 가지 보잘 것 없은 선물들과 밤늦도록 해야 하는 일뿐이다. 나는 이런 것들이 몹시 싫어 내 생일 잔치를 하지 말라고 해도 성도들은 안하면 무슨 큰 죄나 짓는 것처럼 기를 쓰고 그 짓을 한다. 그 일을 하고 의기 양양한 그들의 모습을 보기 싫었다.

 

9. 목사는 한 번 좋은 성도는 영원히 좋은 성도가 되었다고 과신한다.

목사는 사람을 잘 믿는 편이다. 그리고 한 번 믿는 사람을 영원히 믿으려고 한다. 그렇게 믿고 살아야 편하고 안심이 되며 사는 보람이 있기 때문이다.

결혼 주례를 해 준 사람, 전도를 해서 믿도록 한 사람, 특별한 어려움에 동참해서 고난을 함께 격은 성도, 기도를 해서 살게 해준 성도, 어려운 경제 문제를 해결해 주어 살 수 있게 해준 사람, 직장을 알선하여 생활 문제를 해결해 준 사람등 목사와 연관되어 은혜를 받고 사랑을 받은 사람들을 잊지 못하고 믿고 살려고 한다. 그들이 그 때에 받은 그 사랑과 은혜를 영원히 기억하고 감사하리라는 기대를 하면서 믿고 살려고 한다.

 

그러나 사실은 전혀 그러치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다윗처럼 평생 받은 바 은혜를 잊지 않고 사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내가 경험한 바로는 대다수의 성도들은 그렇지 아니했다. 그들은 환경에 따라 수시로 변하고 자기들의 삶에 따라 언제든지 색깔을 달리했다. 그리고 자기들의 사정에 따라 목사를 보는 눈과 생각이 달라지고 변했다.

 

내가 양구에서 군목으로 근무를 하고 원주 병원에 와 근무할 때였다. 병원 옆에 병원에서 사용하는 약품을 관리해 주는 부대가 있었는데 그곳에 정말 착실하고 믿음 좋은 사병이 한 사람 있었다. 그는 정말 믿음이 좋았다. 그래서 아에 그 사병의 별명이 목사님이 였다. 그는 주일이나 수요일에는 언제나 부대 내의 신자들을 인솔해서 예배에 참예를 했고 자기 일도 있지만 만사를 제켜 두고 교회의 일을 도와주었다. 내가 그 부대에 인격 교육을 하기 위해 갈라치면 허리를 굽실거리며 자기로서는 가장 최고의 대접을 해 주었다. 나는 그를 보는 것이 기쁘고 즐거웠으며 전역 후에 목사 공부를 해서 좋은 목사가 되기를 바랬다.

그렇게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살다가 그가 전역을 하고 나도 전역을 했다. 그리고 몇 년후에 교회를 개척하면서 그를 찾아 우리 교회에 나오게 했다. 처음에 그는 아주 기쁘게 교회 개척에 참여를 했다. 그런데 몇 달이 되지 못해 그로부터 이상한 느낌을 감지했다. 무슨 일인지 잘 알 수 없지만 그이 마음이 군대에 있을 때와 딴판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는 불평 불만에 가득 차 있었고 목사의 설교에 대하여 노골적인 비판을 하기도 했다. 그가 교회를 떠나겠다고 해서 나는 두 말하지 않고 그렇게 하라고 할 정도였다. 그 후에 나는 교회 일로 정신이 없어 그를 다시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난 후에 뜻밖에 그가 우리 집에 찾아왔다. 그가 온 이유는 우리 교회를 나올 때 사귀었던 집사와 돈 거래가 있었는데 받을 수 없게 되자 돈을 받아 달라고 온 것이다. 그의 말인즉 목사인 나로 인해 그를 알게 되었고 돈을 꾸어 주게 되었으니 목사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정말 황당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다. 그는 수없이 나를 찾아 와 나를 괴롭혔다. 그가 돈을 받았는지 못 받았는지 나는 모른다. 돈을 가져 간 집사도 이미 우리 교회를 떠난 지 오래 되었었기 때문이다. 그 일을 통해서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변할 수 있다는 것인가? 놀랍기만 했다.

 

결혼 주례를 해 준 집사에게 따귀를 얻어 막고 핍박을 당하는 목사를 잘 안다. 어린 성도들 키워 장로를 만들기까지 13년이 걸렸는데 그 장로 대문에 교회를 떠나야 되었던 친구 목사가 있다. 노회에 참석한 그 장로는 밤이 세도록 자기를 장로 되게 한 목사의 욕을 했다.

 

10. 목사는 스스로 성도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자기가 하나님의 종이요 전적으로 교회(성도)만 위해 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정말 성도들이 그런 이유만으로 목사를 존경하고 사랑할까?

목사가 성도들을 사랑하고 성도들이 목사를 사랑하는 것은 두 말할 여지가 없는 당연한 말이다. 그런데 요즈음 이 당연한 일들에 이상 기류가 생겼다. 목사가 성도를 사랑하는 방법이 달라지고 있고 성도가 목사를 사랑하는 방법이 달라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된 이유는 많이 있을 것이다.

그 이유를 말하면 그 일차적인 책임은 목사에게 있다고 할 수 있다.

 

▶ 성도들이 목사에게 실망하고 있다.

목사가 도무지 성도들이 기대하고 바라는 목사가 못되는 것이다.

신령하지 못하고 세속적이며, 진실성이 없고, 경건하지 못하다.

성도들이 바라는 그 어떤 것을 채워 주지 못하는 무능력자가 되고 그러면서도 스스로 자기를 높여 대접을 받으려 한다.

희생 정신이 부족하고 이기적이며 욕심이 많다.

모든 일에 독선적이고 안하무인격이며 성도들을 무시하고 일방 통행 식의 교회 운영을 한다.

자기 자랑을 너무 많이 하고 여행을 자주 다니며 놀기 좋아한다.

늘 선교 여행이나 해외 집회 인도를 한다고 하지만 그것이 거짓 말이라는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는데도 목사는 계속 교회 제정을 써 가며 여행을 다닌다.

우리들(성도)들이 낸 헌금을 사용하여 살면서 성도들에게 감사할 줄 모르며 오히려 큰 소리를 치고 성도들 위에 왕처럼 군림하려고 한다.

다른 교회의 이야기를 하면서 은근히 더 많은 사례를 요구하는 목사의 욕심을 감당할 수 없다.

하나님의 종이라는 이유만으로 권위주의 자가 되고 조그마한 잘못을 정죄 하기도 하며 듣기 곤란한 말로 성도들의 약점과 허물을 공격하고 공개한다.

편견이 심하고 편애를 일삼으며 회개할 줄 모르면서 회개하라고 소리를 지른다.

설교는 귓전을 스쳐 지나가는 말일 뿐 심령의 갈증을 해소하거나 해갈해 주지 못한다.

마음에 와 부딪치는 설교를 들었으면 소원이 없겠다. 그런 설교를 못하면서도 그런 설교를 듣기 위해 다른 교회를 찾아가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속 좁은 사람이 바로 우리 목사다.

여기 저기서 카피해서 전해지는 설교에 이제 더 이상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그 설교는 감동이 없고 영적인 양식이 되지 못하며 연설이요 강론이다.

그렇지만 어쩌겠는가? 그도 하나님의 종임에는 틀임이 없으니 그저 모른 체하고 따라 가는 수밖에----

체면 때문에 다른 교회로 갈 수도 없고 안 가자니 죽을 지경이다.

주일만이라도 교회에 가서 평안을 얻고 싶다. 격려와 위로도 함께 얻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 목사는 우리들의 심령의 갈증과 아쉬움과 은혜를 사모함에는 관심이 없는 기독교 사업가다. 오늘도 새로운 일을 벌리기 위해 고집을 부린다.

교회 시설을 아름답게 하면 교회가 성장한다고 생각하는 목사의 사고 방식이 큰 문제다. 교회 성장의 제일 요건은 은혜로운 설교인 것을 우리 목사는 모르는 것같다.

공부하지 않는 목사에게 무엇을 기대할까?

목사의 사업 의욕을 감당하기가 힘들다. 내 개인적인 일에도 많은 고통이 따르는데 교회 일로 인해 너무 견디기 힘들다. 차라리 장로 직을 사임하고 싶은데 방법이 없다.

목사가 자기를 비방하고 흉보는 성도들을 무마하라고 부탁을 했다. 그러나 나도 성도들이 목사에 대하여 말하는 것들을 동감하고 있는 내가 어떻게 그들의 불평을 무마할 수 있을까?

내가 목사를 위해 평생을 바쳤는데 지금 얻은 것이 무엇인가? 목사를 위해 산 삶이 과연 하나님을 위한 삶이 였던가?

우리 교회 형편에 어울리지 않는 목사의 생활을 좀 정리해 주었으면 좋겠다. 우리 교회에서 가장 좋은 집, 좋은 자동차------

 

▶ 목사들도 성도에 대한 사랑과 애틋함이 변질되어 간다.

변덕스러운 성도들로 인하여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한 문제가 끝나는가 싶더니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해서 목회라는 것이 어렵고 복잡한 인생의 문제들을 수습하는 것을 말하는 것인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것인지 혼란스럽다.

전도를 해서 믿음을 키워 장로 되게 했더니 목사를 물어 뜯고 핍박하며 배신하기 일수다.

그렇게 많은 정성과 사랑을 쏟아 부어 주었는데 한마디 서운한 말을 했다고 그 동안의 모든 사랑과 정성을 외면하고 원수로 대하는 성도들에게 질리고 말았다.

목사를 다른 일을 하지 못하니 성도들에게 매달려 먹고살자는 쪽으로 생각하는 것 같은 성도들의 눈치는 정말 역겹다.

목사의 고생과 수고로움을 마치 당연한 것처럼 생각하여 전혀 동정하지 않는 무심한 성도들이 야속하다.

좋은 일이 있을 때는 자기들끼리 즐거워하고 어렵고 나쁜 일들은 목사를 찾아 와 수습해 주기를 하소연하며, 자기들이 만족할 만큼 수습이 되지 않을 경우에 무능한 목사로 단정하는 것을 견딜 수 없다.

목사의 나이나 경력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들만큼만 살아 주기를 바라는 성도들의 무분별이 참으로 곤혹스럽다.

목사의 교회를 위한 헌신과 희생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교회에서 받은 사례금을 차곡차곡 쌓아 가면서 치부하는 줄 아는 성도들에게 질리고 말았다.

교회의 모든 일들을 하나님 중심으로 해석하여 처리하려 들지 아니하고 자기들의 형편에 맞게 처리하려 하는 무리들에게 기대할 것이 없다.

자기 교회와 자기 목사 보다 이웃 교회나 다른 목사를 더 칭찬하고 자랑하는 꼴은 도저히 더 보고 들어 줄 수 없는 참담함이다.

성도들의 외식과 아무리 가르치고 설교를 해도 변화되지 아니하는 그 완악함과 파렴치함을 어떻게 감당하여 변화하게 할 수 있을까? 이 일을 하지 못하면 목사로서의 자격 상실이다.

목사의 날마다 시간마다 계속되는 스트레스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성도들에게 무엇을 기대하며 어떤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것인가?

조그마한 선물이나 선심을 베풀고서도 엄청난 사랑을 요구하는 것을 감당할 수 없다.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생활하는데도 불구하고 자기들의 것을 주는 양 목사를 마음대로 지배하려 든다.

다른 교회와 목사의 이야기를 하면서 은근히 압박을 가하는 것을 참기 힘들다.

어떤 때는 설교에 많은 은혜를 받았다고 극구 칭찬을 하더니 이제 와서 설교 못한다 하고 은혜 없다고 하니 종잡을 수 없는 사람들이다.

평생토록 섬기며 돕겠다고 철석같이 약속을 했는데 일년도 되지 않아 다른 소리를 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믿고 함께 일할 것인가?

만일 내가 목사가 아니 였다면 절대 그런 인간과는 상종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에게 당한 멸시와 치욕을 영원히 잊을 수가 없다.

천국에 가서도 보기 싫은 사람이다. 그럼에도 그를 보고 웃어야 하는 내 처지가 정말 안쓰럽고 딱하다.

 

위에 기록한 말들을 보면서 어떤 목사는 나는 성도들에 대하여 전혀 그런 생각을 해 보지 않았다고 말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런 분은 정말 주님을 마음을 가진 천사와 같은 목사요 존경할 만한 분이라고 치하하고 싶다. 그러나 나는 30여년 동안 성도에 대한 이런 마음들이 싸였고 그런 하나님의 종답지 못한 생각을 떨어버리기 위해 무진장 애를 써야 했다.

 

우리 성도들은 나에 대하여 전혀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목사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조심스럽게 목회를 해야 목사의 정도에서 탈선하지 않을 것이다.

 

이와 같은 목사와 교회의 갈등은 반드시 풀고 넘어 가야 한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아니하면 교회는 그 빛을 잃고 하나님의 버림을 받을 것이다. 이런 문제를 만든 것은 목사들이다. 그럼으로 이 매듭을 목사들이 먼저 풀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들의 현실은 전혀 그러치 못하고 있다.

 

그것이 무엇인가?

(1). 대량으로 양산되는 실력 없고 영력 없는 직업적인 목사들이 문제다.

평신도보다도 못한 말씀과 세상 지식에 대한 실력, 하나님의 종이라는 이유로 하늘을 찌를 듯한 그 오만함과 교만함, 권위주의, 역겨운 자기 자랑들, 섬기는 자세가 아니라 섬김을 받으려는 자세, 먹고살기 위해 조잡하게 급조된 목사들은 성도들에게 실망을 주고 목사를 기대하지 않게 만들고 말았다.

많은 군소 신학교와 심지어 목사 학원까지 등장한 이 시점에서 신학교를 세워 운영하고자 하는 목사들은 자신을 진솔한 심정으로 돌아보았으면 좋겠다. 과연 내가 신학교를 세우고 운영하며 목사 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에게 신학을 가르쳐 목사 되게 할 수 있는 사람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객관적인 입장에서 볼 때 도저히 목사 선생이 될 수 없는 사람이 스스로 목사 선생이 되겠다는 것은 정말 우리 한국 교회나 자신을 위해서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다.

 

(2). 목사의 인격이나 목회에 필요한 모든 일들을 훈련하는 곳이 없다.

한 번 목사는 영원한 목사요 목사가 된 순간부터 더 이상 배울 것도 없고 연단 받을 것도 없고 훈련받을 것도 없는 완전한 목사가 되어 버린다. 그런 가운데서도 조금 양식 있는 목사는 자기의 부족을 깨닫고 학교 공부를 더 한다든지 아니면 여기 저기를 다니면서 좋은 목사 되기 위한 배움을 계속한다. 그러나 그 배움이라는 것도 교회를 잘 해보겠다는 배움이지 자신의 인격이나 신령한 삶을 위한 배움이 아닐 수가 많다. 그러나 아무리 교회 잘하기를 배웠다고 해도 목사의 인격이나 삶의 질이 하나님과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종으로서 인정받지 못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3).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는 강력하고 효과적인 대안이 없다.

말만 초대 교회로 달아 가자 한다. 초대 교회가 어떤 교회였던가? 기도 많이 하고 이적이 많이 나타났던 것만이 초대 교회였는가? 초대 교회는 하나님을 위한 헌신과 사랑의 희생이 충만한 교회였다. 하나님을 위한 헌신과 사랑으로 가득 찬 교회로 돌아가기 위한 강력하고 효과적인 대안이 무엇인가?

 

목사와 성도의 이와 같은 심각한 갈등은 교회의 힘을 잃게 하고 퇴보하게 한다. 이와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목사는 단순한 하나님의 종으로 돌아 가고 성도들은 그야말로 하나님의 양으로 돌아 가야 한다, 만일 우리가 이 일에 실패를 한다면 교회의 장래는 암담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