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와 성도의 생각 차이들
목사와 성도의 생각의 차이
4. 목사의 간절한 소원의 기도가 성도들을 변화시킨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도들은 자기들의 노력으로 은혜를 받았다고 생각한다.
목사는 평생 기도를 한다. 목사와 기도를 떼어놓고는 생각할 수 없다. 다른 목사들은 어떻게 기도를 하는지 잘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나는 평생 이렇게 기도를 해야 했다. 우선 내 자신을 위해 기도를 했다. 내가 잘못한 일에 대한 회개의 기도가 최우선이 였으며 젖먹이를 둔 어미가 언제나 먼저 생각하는 것처럼 성도들을 위해 은혜가 충만한 목사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를 했다. 그 기도는 상당히 오랫동안 계속이 되었는데, 보통 30분 이상이 걸렸으며 어떤 경우에는 한 시간 두 시간 동안 계속되기도 했다. 특별한 일이 없을 때에는 우리 성도들을 위한 기도가 계속되었다. 장로로부터 그의 가족들에 이르기까지 차근차근 기도를 하고 병든 사람, 믿음이 없는 사람, 가정이 화평치 못한 사람들을 기도했다. 주일 학생들까지 생각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데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 담은 나라와 민족과 한국의 온 교회들, 친구와 친척들을 위해 기도를 했다. 그리고 힘이 소진될 때가 되어서야 우리 가족들을 위한 기도를 시작했다. 이 기도를 할 지음에는 너무 시간이 많이 걸려 상당히 지쳐 있기 때문에 아주 간단히 기도를 해야 했다. 맨 나중에는 우리 부부를 위한 기도를 했는데 그 때의 기도는 건강과 평안을 위한 기도로 기도를 마쳤다. 그러나 특별한 어려움이 있을 때에는 그 어려움을 가져온 사람을 위해 오랜 시간을 할애하여 기도를 해 주었다. 이런 기도로 인해 다른 기도를 전혀 할 수 없는 때도 있었다.
그런데 이런 기도를 하면서 늘 생각하고 기대하는 것은 나의 기도가 하나님의 응답을 받아 성도들이 바로바로 변화되기를 기대한다는 것이다. 이런 기대는 교회에서 말썽을 피우거나 목사를 괴롭히는 사람이 있을 경우에 더욱 더 심했다.
나와 아내의 기도가 장로를 변화시키지 못했다.
아내는 40일 동안을 금식하며 기도를 했다. 그 때 가장 많이 위해 기도를 한 사람은 우리를 극도로 핍박하는 장로 부부를 위해서였다. 그 장로는 목사를 상습적으로 핍박하고 교회에서 쫓아내기를 몇 번인가 거듭했다고 스스로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가 사업을 하다가 실패를 해 완전히 망하게 되었을 때 우리 교회로 이명을 왔다. 우리는 그를 전혀 알지 못했다. 우리는 모두 그의 신앙적 열성과 기도하는 모습에 속아 우리 교회의 협동 장로로 추대를 하고 받아 들였다. 그러나 그이 마각은 교회를 나온지 2년 후에 드러나기 시작을 했다. 그는 우리 교회의 성전 건축을 위해 많은 액수의 헌금을 약속하고 그 헌금을 위해 압류된 자기 땅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땅을 찾기 위해서는 당시로서는 아무 많은 1억을 차용해 줄 것을 요구했다.
나와 우리 성도들은 그의 말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의 성전 건축을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특별한 은혜라고 생각하고 건축을 위해 마련해 둔 수천만 원과 모자라는 돈 얼마를 빗을 내서 그가 요구하는 데로 교회의 건축비 1억(1985년도의 1억을 지금의 5억 이상이 될 것이다. 우리 교회가 2억을 주고 산 땅이 지금은 10억을 호가한다.)을 빌려주고 그의 땅을 찾아 주었다.
그런데 그는 우리와 약속한 상전 대지를 사 바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원금도 떼어먹을 속셈으로 온갖 음해를 일삼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 한참 성장하던 우리 교회는 쑥대밭이 되어 어린 일이 있었다. (목사 홈의 30년 목회의 사기꾼 장로 이야기)
이 때 아내는 견딜 수가 없어 40일 금식 기도를 했다. 그리고 그 기도의 핵심은 그 사기꾼 장로와 그의 마누라인 권사가 자기들의 잘못을 회개하고 하나님의 교회를 헤치지 못하도록 마음을 돌이켜 달라는 것이 였다. 그의 음해로 말미암아 성도들이 시험을 당하고 교회를 떠나지 않도록 지켜 달라는 기도를 했다. 우리 부부는 살던지 죽던지 상관하지 않았다.
그 때 우리 자신들을 위한 기도는 살려 달라고 하던지 아니면 목회를 잘하도록 해 주시라는 요구가 아니 였다. 차라리 이런 고통과 괴로움에서 영원히 벗어나도록 우리들의 생명을 어두워 가시라는 기도만을 했다. 아무리 그렇게 기도를 해도 그 인간들은 변화되지 않았다. 40일 금식 기도를 하고 돌아 온 그 다음 날, 그 장로의 마누라가 아내에게 전화를 했다. 전화를 받기도 힘이 들어 하는 아내에게 그 권사라는 여자는 온갖 폭언을 퍼부었다.
「교인들에게 사기를 치고 변명할 말이 없으니 가짜로 금식 기도를 한답시고 온갖 맛있는 것을 야금야금 먹어 가며 성도들을 속여. 이년아! 너 같은 년이 벼락을 맞지 아니하면 누가 비명횡사를 하겠냐?」라는 식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저주를 마구잡이로 퍼부었다. 아내는 그 여자의 전화를 받으면서 정신을 잃기도 했다. 적어도 그 당시에 그 상황에서는 아내의 생명을 건 기도는 아무 효과가 없었다. 그들이 조금도 변화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더욱 더 악해 발악을 했기 때문이다.
목사가 이름을 불러 가며 그렇게 마음이 아파 간절히 기도하던 그들의 개인적이 변화는 알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들은 결국 교회를 떠나게 되었고 떠난 그들은 절대 그들의 모습을 우리들에게 알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를 괴롭히던 사람들을 위한 날밤을 세며 간구하던 기도들은 우리가 바라는 데로 그가 변화되어 교회에 충성하는 성도가 되지는 않았지만, 여러 가지 다른 방법으로 우리들의 기도를 들어 주셨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예를 들면 우리 아이들이 더욱 더 부모를 소중하게 알게 되었다 던지, 좋은 성적표를 가져 왔다 던지 하는 것들이요, 그 장로에게 그런 일을 당한 3년 후에 그 장로의 사건으로 말미암아 우리 교회는 성전 부지를 마련할 수 있는 일이 생겼고 7년 후에 성전을 건축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목사인 우리는 늘 기도의 제 일번 순서에 성도들을 둔다. 다른 순서를 만들어 기도를 하려 해도 어느 틈에 다시 그 순서로 되돌아가는 것을 알 수 있다. 목사 개인의 회개 기도, 은혜 충만, 사랑하는 성도들을 위한 기도, 그 가운데 가장 못된 성도들을 위해 기도를 한다. 그 기도를 할 때에 그에게 당한 온갖 수모와 괴로움과 고통을 견딜 길이 없어 하나님께 우리들의 아픔을 호소하고 제발 그가 그런 짓을 하지 못하도록 마음을 돌러 교회를 사랑하고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되어 하나님의 축복을 받도록 기도를 한다. 어떤 목사도 자기를 괴롭히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면서 그를 저주할 수는 없다. 하나님 앞에 그런 기도라는 것을 상상할 수조차 없는 것 아닌가? 그렇게 간절히 기도했던 그가 변화되어 새 사람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나 나의 경우에 그런 변화는 정말 하늘의 별 따기처럼 쉽지 않았다. 문제의 해결은 결국 그가 온갖 잡된 소리를 하면서 교회를 떠나는 것으로 일단락 되기 십상이 였다. 목사는 그가 그렇게 교회를 떠난 후에도 그로 인한 심려의 아픔이 가시기까지 계속 그를 위해 기도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리고 그를 위해 기도하는 시간이 줄어지고 마음이 편해지면 그가 어느 곳에 가 은혜 생활을 잘 하고 있겠거니 스스로 위로하고 다음 사람을 위해 기도를 하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에 우리들의 요구에 따라 응답하시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보다 많이 하나님 자신의 의지에 의해 우리들의 기도에 응답하신다. 그리고 결국 바울이 말씀하신 데로 “(롬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 하여 선을 이루느니라”하신 말씀대로 섭리하시고 이루어 주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감정과 아픔과 원망과 피곤함과 괴로움과 눈물과 좌절과 죽음을 부르는 이런 고통의 기도들을 사랑과 위로와 합력 하여 선이 되도록 응답하신다. 그리고 그 기도의 응답은 기도하는 사람에게 가장 좋은 최고의 응답이시다.
나는 40일 금식 기도를 하고 요양을 하는 중에 어떤 성도의 전화를 2시간 동안 받고 세상을 떠나 버린 목사를 알고 있다. 우리가 볼 때에 그 젊은 목사의 죽음은 너무 애통하고 억울하며 하나님을 도우심과 보살핌을 전혀 받지 못한 것 같았다. 그의 가족들은 하나님께 완전히 버림을 받은 것같이 생각되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가고 세월이 가면 그 죽음에 따르는 하나님의 사랑과 섭리와 은혜를 깨닫게 될 것이다.
내가 미국의 풀러 신대원에서 단기 수업을 받게 된 것은 미국 유학을 위해 70년대에 교회가 안정되었을 때에 시켜 달라고 한 기도인데 1992년에 사 응답을 받은, 그야말로 20년 넘게 한 기도의 응답이 였다. 어떤 기도는 우리가 세상을 떠난 오랜 후에 사 이루어지는 기도도 있다고 한다.
사랑하는 목사님 여러분. 우리들의 날마다 가슴을 치며 소리쳐 하는 기도의 응답이 우리가 바라는 데로 이로워지지 않아도 어느 땐가 반드시 이루어지는 기도는 것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그렇게 기도하고 축복해 주었던 사람이 변화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라도 변화된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열심히 기도하되 들어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은 당시의 뜻대로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다 아실 줄 압니다.
성도들은 어떤 기도의 순서에 따라 기도를 하는지 나는 잘 모른다.
그들도 목사를 위해 기도를 할 것이고 교회를 위해 기도를 할 것이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때에 가슴을 쥐어짜며 기도를 하는지 잘 모른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목사가 시험을 당하고 성도들에게 고통을 당할 때에 불안한 교회를 위해 40일 동안 금식하며 기도하는 성도들을 보지 못했고 목사와 그 가족들이 어떤 일로 인생살이의 위기를 당했을 때 생명을 건 기도를 하는 성도들을 나는 만나 보지 못했다. 그것은 나의 덕이 부족이요, 은혜의 부족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목사를 위해 생명을 걸고 기도했노라 는 성도들은 만나 본 일이 몇 번 있었다. 일정한 시간을 정해 놓고 자기가 섬기는 목사님을 위해 진심으로 기도해 주는 성도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목사에게 행복한 일인가? 나는 그런 행복이 별로 없었던 것 같다. 다 나의 부족함 때문이지------
그러나 나는 교회가 위기를 만나면 그 무거움을 견디지 못하는 성도들을 많이 보았다. 그런 성도들은 정말 마음이 아파하지만, 결국 교회를 떠나 근심 없고 시험 없는 곳으로 가 평안하게 신앙 생활을 하려 한다. 그런 성도들의 자기 신앙 지키기가 목사에게 또 다른 고통으로 다가온다. 진실로 교회 문제를 생각하고 목사의 입장을 생각하여 기도해 주는 성도들이 교회를 떠날 때에 목사가 당하는 소외감과 허전함은 정말 견디기 힘들다.
교회를 떠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교회의 모든 어려운 문제의 책임을 목사에게 돌리고 자기들은 완전한 의인이 되어 목사를 갈아치우면 교회가 평안하고 성장하리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기를 쓰고 하나님도, 목사도, 교회도, 성도도, 이성도 없는 사람들이 되어 목사 몰아 내기에 전심 전력을 한다. 그리고 기도도 목사가 회개하기를 하나님께 기도하며 자기들의 의인됨을 확인하는 기도를 한다. 하나님과 교회를 위하여-------
우리 목사들은 주님을 죄인들이 주님을 믿어 구원 얻은 것만으로 만족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즐겁게 살아가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다른 것은 아무 것도 기대하지 말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라. “(고후11:2) 내가 하나님의 열심히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하셨으니 이에 더한 기쁨을 바라지 말 것이다.
5. 성도들이 목사에게 한 충성의 약속과 맹세를 믿지 말라. 그것은 일시적인 감정의 산물일 경우가 대부분이다.
성도들은 목사에게 거짓말을 잘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 거짓 말들은 상황에 따라 진실을 말했지만 나중에 지키지 못해서 거짓 말이 된 경우가 많이 있다. 그러나 목사를 속이는 거짓 말도 있다. 목사는 대체적으로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들이 하는 거짓 말에도 속아 넘어 가는 일이 많이 있다. 그런데 요즈음 성도들은 목사들도 남 못지 않게 거짓을 말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참으로 한심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왜 이렇게 목사들의 신뢰심이 땅에 떨어져 버렸는지 모른다.
내가 아는 목사는 정말 거짓 말을 잘한다. 그의 거짓 말은 하도 유명해서 우리 교단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그러나 그는 목회를 잘하는 편이다. 성도들도 1000명이 넘고 교단에서도 꽤 영향력이 있어서 그를 아무도 무시할 수가 없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그의 거짓 말은 말을 할 때는 언제나 진실하다. 그렇지만 그 진실한 말이 지키지 않고 곧 다른 말로 바꾸기 때문에 거짓 말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성도들의 경우에도 이란 사람이 많이 있다. 내가 여기서 거짓 말을 하는 사람이 많다는 용어를 사용한 것은 대부분의 성도들이 거짓 말을 하고 잇다는 것을 체험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목사들은 스스로 거짓을 말하지 말 것이며 한 번 말한 것은 반드시 지키던지 아니면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사과와 양해를 구할 줄 알아서 성도들에게 신뢰 심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1). 평생 충성하겠다는 집사의 맹세.
우리 교회에 구 안기부에서 근무하다가 퇴직했다는 60이 넘은 집사가 한 사람 있었다. 그는 상당한 지식을 가진 인텔리로써 나이도 먹었을 뿐 아니라, 점잖은 그의 언행 심사로 인해 모든 성도들에게 존경을 받던 사람이 였다. 그는 우리 동네로 이사를 와 여러 교회를 다녀 보고 부부가 함께 등록을 했고 그의 자녀들도 함께 교회를 나와 여러 부서에서 봉사를 잘해 주어 교회에 큰 힘이 되어 주었다. 어느 날 그는 나를 조용하게 만나고 싶다고 했다. 나와 그는 공원의 벤치에 자리를 잡고 지나 간 세월들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교회에 대하여 말하기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그가 갑자기 정색을 하며
「목사님. 제가 목사님을 여러분 겪어 보았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처럼 진실하시고 솔직하신 분은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더욱이 목사님께서 문학을 전공하셨다고 하니 정말 마음에 듭니다. 내 비록 목사님 보다 연상이지만 나이를 떠나서 목사님을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그래서 제 집 사람과 의논을 하고 오늘 이렇게 뵙자고 한 것입니다.」
나는 그의 장황히 늘어놓는 낯뜨거운 칭찬에 할 말을 잊고 그를 쳐다보기만 했다.
「그래서 하는 말씀인데요. 우리 부부와 우리 자식들은 평생 목사님을 모시고 살기로 했습니다. 목사님이라기보다는 형제와 같고 어찌 보면 백년을 사귄 친구와도 같은 정을 느낍니다.」
나는 정말 그의 말에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그럼 비슷한 말을 여러 번들은 일이 있고 그런 말의 가치가 무엇인가를 알기 때문에 그렇게 흥분될 수는 없었다.
「집사님의 말씀 정말 고맙습니다. 저를 도와 힘이 되어 주신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그저 교회 사랑해 주시고 위해 많은 기도를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러나 그의 이런 약속은 얼마 되지 못해 언제 그랬느냐 싶게 변질이 되어 버렸다. 우리 교회가 그의 집에서 도보로 20분 정도 되는 곳으로 장소를 넓혀 이사를 가게 되었을 때에 한 두 번 나오던 그들과 가족들은 교회를 떠나 가까운 곳으로 가 버렸다. 무슨 일이 생기면 으레 그렇겠거니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교회를 잘 나오도록 계속 권하는 나와 우리 성도들의 바램을 일언 지하「 거절해 버리는 그들의 싸늘한 반응에 쓴웃음을 짓지 아니할 수 없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사람의 약속은 믿을 것이 못된다고 하셨는가 보다.
(마5:33-34) “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찌니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2). 평생 선물을 드리겠다는 집사의 약속
우리 교회에 강집사가 있었다. 어느 주일에 예배를 드리고 집에 와 쉬고 있으려니 강집사가 찾아 왔다. 그는 아주 좋은 과일 한 상자를 가지고 왔는데 와서 이런 말을 했다.
「목사님, 저는 우리 교회에 나오기 전에 하나님을 몰랐습니다. 물른 주님도 영접치 못한 나일론 신자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목사님께 은혜를 받고 정말 구원이 무엇인지를 알고 확실히 주님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이 우리들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는 저의 친부모보다 더하고 세상의 누구보다도 더합니다. 목사님은 우리 가정을 구해 주신 분입니다. 그래서 비록 약소하지만 한 달에 한 번씩 목사님의 가정에 제일 좋은 과일 한 상자를 드리기로 했습니다. 계속 우리 가정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아니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집사님의 말씀만 들어도 저는 보람과 기쁨이 넘칩니다.」
「아니요. 저의 정성이요 고마운 마음의 표시입니다. 만일 우리가 목사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우리 집 사람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좌우간 체집사님이 그렇게 건강해 져서 정말 다행한 일입니다」
강집사의 아내인 체집사는 아들 형제를 기르고 있었는데 아이들을 기르노라고 힘이 들어 서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어서인지 알 수가 없으나 정신병 증세가 있었던 사람인데 우리 교회에 와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면서 아주 말끔히 병세가 없어지고 몸과 마음이 건강해져서 구역 장까지 하고 있었다.
그런데 최 집사의 이와 같은 사랑과 친절의 원인이 다른 곳에 있다는 것을 몇 달 후에 사 알았다. 그는 약속한 데로 두어 번 사과니 배를 집에 가져 왔다. 그런데 교회가 신년 들어 예산을 새로 세우고 교회 직원들의 인사 이동을 하게 되었을 때에, 나는 강집사가 교회 회계를 하고 싶어하는지 알고 있었지만 교회 여러 성도들의 의견과 그의 직장 동료들의 말을 들어보고 마땅치 않게 생각이 되어 회계 감사로 임명을 하고 그가 원하는 회계를 마끼지 아니했다. 그런 후에 그는 시험에 들기 시작을 했다. 분기마다 실시되는 그의 회계 감사는 회계를 보는 집사를 무척 괴롭히는 것이 되어 버렸고 감사인데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교회 제정에 깊이 관여하여 말을 많이 하는 것은 여러 성도들과 나에게 부담으로 작용을 했다. 그는 장말 열심히 일을 한다고 하는 일들이 나와 다른 사람에게는 껄끄러운 일이 되어 버린 것이다.
내가 그를 그렇게 조치를 한 것은 그에게 너무나 많은 시달림을 받던 회계 집사 부부가
「목사님. 강집사를 조심하셔야 합니다. 말씀을 다 드리지는 못했지만 강집사는 결코 목사님과 교회에 유익한 인물이 아닙니다. 그리고 죄송한 말씀이지만 우리는 이번에 다른 교회로 교회를 옮기기로 했습니다.」 아무리 말려도 소용이 없었다. 그들은 목사나 교회에는 유감이 없지만 강집사 부부 때문에 교회를 더 이상 나올 수 없다고 하면서 이웃 교회로 가 버렸다. 나는 이 일로 얼마나 많이 속이 상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최 집사를 감사되게 한 일을 크게 후회했었다. 그렇게 본의 아니게 교회를 그들은 정말 착실하고 성실한 성도들로써 분인 집사는 우리 교회 여전도 회장까지 했던 사람이 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음 해 직원 임명에는 주일학교 부장을 시키면서 제정 부에서 손을 떼도록 했다. 나는 그는 이런 목사의 조치가 매우 섭섭했던 모양이다. 물른 사과 상자는 이미 오래 전에 배달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늘 목사의 하는 일에 시비를 걸고 비판적인 사람이 되어 버렸다. 그이 그런 성도답지 못한 교회 제정 장학하기 작전은 실패를 했지만 목사를 괴롭히며 이곳 저곳을 다니면서 교회를 어지럽히는 일은 그가 부산으로 발령을 받아 직장을 옮겨 갈 때까지 계속이 되었다.
나는 평생에 성도들이 목사에게 한 약속을 지키지 않거나 그 약속을 잊어버리고 시침이를 떼는 것을 너무 많이 보았다. 그들은 목사에게만 그런 거짓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도 그런 거짓 말을 떡먹듯이 한다.
그런데 하나님께 대하여 거짓 말을 하는 것은 비단 성도들만이 아니라는데 심각한 문제가 있다. 목사들도 하나님께 거짓말을 아주 잘한다.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께 서원하고 약속한 일들을 실천하지 않고 넘어 가 버리는 거짓 말들, 이 핑계 저 핑계를 데 가며 거짓 말을 하는 경우, 할 수 없이 거짓 말을 하게 되는 일들, 약속을 해 놓고 완전히 잊어 버리는 일들, 헌금에 대한 거짓 말, 심방에 대한 거짓 말, 실수로 하는 믿을 수 없는 약속들------ 우리는 기도를 하고 지키지 않고 스스로 맹세하고 지키지 않으며, 약속을 하고 오리발을 내 미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나중에는 으레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다는 식으로 스스로를 변명하고 위로 받다가, 결국 거짓 말에 대하여 무감각해져 버리는 경지까지 가 버린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모든 거짓 말들을 낱낱이 생명 책에 기록하셔서 우리들의 말과 행위를 저울질하실 것이다.
목사는 성도들의 말을 믿지 말라. 목사와 성도들의 관계는 믿음의 관계가 아니며 오로지 사랑의 관계다. 그래서 성경에는 한 번도 목사들이 성도들을 믿고 살라는 말씀이 없다. 오직 그들을 사랑하라는 말씀만 이 존재한다. 신실하지 못하고 어리석고 약해서 거짓을 말하지 않을 수 없는 목사들이지만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지 말 것이며 약속한 것은 목숨을 걸고서라도 지키도록 해야 한다. 하다가 힘이 부처 못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실 것이다. 그리고 정 못하면 못하게 된 우리들을 이해해 주실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약속에 최선을 하지 않고 하나님을 속이면 하나님을 속이는 자의 받을 책망을 면치 못할 것이다.
“(마5:37)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쫓아 나느니라”
6. 목사는 목사의 생활 수준이 교회가 허락한다면 자기의 경륜과 수고에 걸맞는 삶을 살기를 바라지만 성도들은 자기들만큼만 살기를 바란다.
성도들은 목사가 자기들만큼만 살기를 바란다. 목사의 나이, 연륜이나 노력의 성과나 학업의 성취도, 전문성을 인정하지 않고 늘상 자기들과 비슷한 생활을 하던지 아니면 조금 자기들 보다 못 살아야 한다고 은연중에 생각한다. 성도들은 세상에 살아가는 것, 자식들 커 가는 것, 목사의 환경, 목사 가족들의 문제들을 자기들의 그것들과 비교하기를 좋아한다. 그리고 부러움과 시기 질투를 분별하지 못하며 무조건 비평하고 기분이 나빠한다. 그러나 극도로 이런 그들의 심리를 자제한다. 목사는 이런 성도들의 심리를 알고 생활의 지혜를 가져야 할 것이다.
많은 목사들이 이 점을 간파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간파하지 못할 뿐 아니라, 어리석게도 우리 성도들은 목사인 나와 우리 가족을 사랑하기 때문에 (성도들의 일상적인 목사에 대한 사랑은 지극 정성이다. 그러나 그런 말에 속아서는 안된다) 우리 가족들이 좋은 집에서 살고 좋은 음식과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자동차를 타고 다니는 것을 보면 좋아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말 어처구니없는 목사의 착각이 아닐 수 없다. 우리 속담에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더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을 목회 일생의 좌우명으로 삼을 것이다.
목사의 생활이 자기들 보다 윤택해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우리 교회는 성전 부지를 이미 몇 해전에 마련해 놓았기 때문에 성전 건축비만 있으면 성전을 건축할 수가 있었다. 나는 부흥회를 한다 던지 다른 특별한 방법을 사용하여 건축 헌금을 작정하지 않기로 오래 전에 마음을 먹었기 때문에 시간이 걸리더라도 차근차근 준비를 해서 성존 건축할 계획을 가졌다. 그래서 교회의 재정을 긴축하면서 건축비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 방법의 하나로 은행이나 다른 곳으로부터 빗을 얻어 좀 모자라는 돈으로 아파트를 한 두체 사기 시작을 했다. 이 문제는 성도들에게 매우 민감한 부분이 였기 때문에 여러 번 숙의를 하고 조심스럽게 추진을 했다. 물른 성전 건축비용을 성도들이 한꺼번에 부담하지 않기 위한 방법이라고 누차에 설명도 했다. 아파트를 사 놓는 것은 성전을 건축할 경우 자금의 유동성 때문이다. 아파트는 팔려고 내 놓으면 한 달 내에 현금으로 전환이 되는 특징이 있었기 때문이며 좀처럼 원금이 줄어지지 아니하는 특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임대료를 받게 되면 많은 돈을 들이지 않고서도 집을 살수가 있다. 이와 같은 숙제를 가지고 있을 때에 성도들도 뚜렷한 목표가 있기 때문에 교회 제정을 사용하는데 있어 신중을 기할 수 있겠다는 다른 전략도 있었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아파트를 새로 분양을 받아 새 집으로 무리가 이사를 했다. 그런데 성도들은 새 집으로 이사를 하는 목사의 꼴을 보지 못했다. 새 집으로 목사가 이사를 가야 하는 이유도 많았다. 당국에서는 교회가 주택을 마련할 경우 한 주택에 대해서만 세금을 감면하는 혜택을 준다. 또한 집의 등기를 한 집에만 국한해 허락하고 있다. 그래서 집을 도체 이상 마련하려면 어떤 개인의 이름으로 등기를 해야 하는데 장로의 이름으로 할 수도 없고(만일의 사태를 위해서 불안하다.) 더욱이 집사나 전도사의 이름으로 등기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결국 목사의 이름으로 등기를 해야 한다. 그리고 3년 동안은 그 집을 팔 수가 없다. 만일 3년이 안 되였는데 임대를 하거나 매매를 할 경우는 법에 걸려 많은 세금을 물어야 한다. 그래서 살던 집의 전세 보증인을 빼서 집 값을 주고 우리는 새 아파트로 이사를 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것은 목사 보다 성도들 자신이 너무 잘 아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은 이런 목사의 이런 행사를 싫어했다. 처음에는 별로 심하지 않더니 좀 넒은 집으로(42평) 이사를 하게 되었을 때에는 노골적으로 이 일을 비방하고 반발했다.
「우리 목사님은 욕심이 많아 자기 이름으로 집 등기를 하고 대궐 같은 집으로 이사를 했다」
「목사가 꼭 그렇게 잘 살아야 돼」
「목사 이름으로 등기를 해 놓은 것은 좀 불안하지 않아?????」
「교회 재산이 목사의 개인 재산이 되는 거 아녀????」
「우리는 이렇게 사는데 목사님만 많이 발전하시는군」
이런 말을 들으면서 나는 정말 우리들 자신들을 많이 돌아보았다. 살던 집의 전세금을 빼서 새 아파트의 집 값으로 지불을 하고 이사를 할 수밖에 없었고, 교회 이름으로 등기가 불가능해서 목사의 이름으로 등기를 해야 했으며, 새로 마련한 지을 임대했을 경우에 임대 자에 대한 불안 요소도 있고, 3년 안에 집을 팔면 많은 세금을 불어야 하기 때문에 부득이 목사가 이사를 할 수밖에 없다라는 설명을 나도 하고 장로도 하고 집사도 해서 공공연히 공증이 되었는데도, 그런 설명과 말들이 아무 소용이 없었다. 어떤 성도들은
「목사님이 우리 교회에서 마련한 새 집에 이사가시는 게 당연한 거 아냐? 목사님이 가 사셔야 되지 장로가 가? 집사가 가? 이왕지사 임대를 하자면 불안한 일도 있고 또 지금 살고 있는 집의 임대료를 빼서 집 값을 주는 것인데 그게 그거라면 목사님이 세 집에 사시는 게 좋은 일 아닌가?」라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도 어떤 성도는 무조건 목사가 새 집만 찾아다닌다면서 우리를 비방했다.
이런 성도들의 심리에는 목사는 자기들과 비슷하게 살아야 하며, 조금 못하게 살아야 한다는 이상한 심리가 있다. 그런데 그런 심리가 사실상 우리 한국 성도들에게 만연되어 있다는 것이 문제다.
50이 넘어 35평의 아파트에 사는 것과 이제 30이 넘어 25평에 사는 자기들과의 차이가 삶의 연륜이나 수고의 대가로 인한 차이점일 수 있다는 것을 전혀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자기 보다 15살이나 더 많은 직장의 부장이 40평에서 사는 것을 비방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들의 나이가 자기 보다 많고 직장에서 그만큼 많은 연륜을 쌓은 상사이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며, 자기도 그만한 나이가 되면 최소한 그 정도는 살 수 있고 잘 하면 그 보다 훨씬 더 성공해서 더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하여 아무 저항이 없다.
그러나 그런 당연한 일들이 교회에서는 이해가 안되는 일이 되고 용납할 수 없는 일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자기들이 살고 있는 집 보다 더 큰집에서 목사가 사는 것은 목사의 욕심이라고 생각한다. 자기들이 나이 30에 25평서 살면 목사는 나이 50이 되어도 25평에서 살아야 마음이 편하다. 전세를 살면 더 좋다. 나이 40이 되어 35평에서 사는 사람들은 목사가 15년 연상이어도 35평 정도의 임대 아파트에서 살아야 한다는 알 수 없는 사고방식을 가진다. 즉 자기들의 생활과 비슷하거나 그 보다 더 못한 삶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 이상이 되면 목사가 푼수에 맞지 않게 사치를 하며 돈을 좋아하고 현실에 맞지 않게 산다고 생각한다.
물른 목사는 그들이 생각하는 데로 살아야 할 것이다. 내 주변의 목사들은 자기 이름으로 등기가 되어 있는 집을 가지고 있지 않는 사람들이 대 부분이다. 그것 자체를 죄악으로 보는 견해가 이제까지 많았다. 목사의 등기가 되어 있는 집을 가지는 것은 죄악이다? 통장도 그렇다. 교육 보험도 그렇다. 오로지 교회가 주는 것 이상으로 먹지 말고 쓰지 말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그 이상의 것을 바라는 것은 욕심이요 탐욕이요 죄악이다.
그런 생각을 목사들은 많이 가지고 있다. 그리고 목사의 모든 것들,― 사는 것, 아이들 공부 가르치는 것등등 ― 을 교회에서 책임져 주기를 바라고 살았다. 그러나 교회에서 목사를 위해 책임을 져 주는 것은 극히 제한적이다. 우선 아이들의 공부를 끝까지 책임지지 않는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목사의 주택을 책임지지 않는다. 그래서 목사는 언제나 임대 주택에서 살수밖에 없다.
재래 시장에 다니는 주부들은 목사 사모가 백화점에 다니면 죄를 짖는다고 생각한다. 자식을 대학밖에 보낼 수 없는 성도들은 목사의 자식이 대학원에 가는 것은 사치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목사들은 그런 성도들의 심리를 알지 못하고 터부니 없는 착각을 한다.
목사가 좋은 집에 살면 성도들이 기뻐할 것이라고 한다. 좋은 자동차를 타고 다녀도 성도들이 목사에게 잘 해 준다고는 자부심을 가질 것이라고 착각한다. 아이들 공부 잘해서 좋은 대학에 가고 유학을 가면 성도들이 자기 자식이 그런 것처럼 기뻐하리라고 착각한다. 그래서 자식을 성도들에게 자랑하고, 번쩍거리는 중형차를 타고 다니며 좋은 집에서 살면서 고맙다는 표시로 성도들을 자기 집으로 초청하기를 좋아한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어리석은 나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생각에 사로잡혀 저질렀던 나의 과거를 다른 목사님들을 되풀이 말기를 바란다.
목사의 사 생활을 말하지 말라. 좋은 것을 자꾸 말하면 시기와 질투를 하고 어려운 것을 자꾸 말하면 부담스러워 한다. 자식들에 대한 말을 하지 말 것이며, 좋은 식당에 드나들지 말 것이며, 혹 성도들이 초청해서 고급 식당에 들어 갈 일이 있거든 촌놈처럼 처신해야 한다. 그래서 성도들이 좋아한다. 좋은 옷을 입고 자랑하지 말 것이며, 좋은 차를 광을 내서 타고 다니지 말라. 목사의 노후나 자식들을 위해 집을 마련할 경우에 절대 비밀로 하는 것이 좋다. 감사 헌금은 무명으로 하라. 하나님께 공개해도 좋을 일들이 사람에게 공개해서는 안되는 일들이 많다. 공개 안하는 것은 거짓 말이 아니다.
바울은 “(고전6:12)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아무에게든지 제재를 받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했지만 사실 그의 생활에서 많은 부분이 성도들을 위해 스스로 제재를 받고 있었다. “(고전8:13) 그러므로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하신 것도 한 예이다.
목사는 성도들에게 덕을 끼치도록 해야 한다. 덕이란 성도들에게 유익한 무엇을 말하는 것이며 목사의 모든 생활의 공개가 덕이 되지 않을 수가 많고 오히려 숨기는 것이 덕이 되는 경우가 많다. 하나님께서도 우리들에게 숨기시는 것이 많다. 계시는 부분적이지만 완전한 것이라는 것을 알 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것이 우리들에게 알려 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알려 주신 것만큼만 아는 것이다.
목사가 스스로를 생각하는 것처럼 성도들도 목사를 그렇게 생각하리라는 믿음을 버려라. 절대 그렇지 아니하다. 그리고 성도들이 바라는 그런 수준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보일 필요가 절실하다. 그러나 그들의 요구대로 살다가 자식들과 부인들에게 원망을 들을 수도 있다. 고도의 생활의 지혜가 필요한 시점에 우리 목사들은 와 있는 것이다. 다른 무슨 대안이 있는가????
“(마10:16)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