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의 금기사항
목사의 금기 사항
19. 어떤 경우에도 돈 이야기하지 말라.
“(마24:45)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줄 자가 누구뇨”
“(막12:33)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 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오늘의 모든 사람들은 돈에 대하여 예민하고 민감한 반응을 나타낸다. 성도들도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목사가 성도들에게 돈에 대한 말씀 즉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에 대하여 말하지 않을 수는 없도 가르쳐 바르게 순종할 수 있도록 하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므로 이 부분에 대한 설교나 가르침은 대단히 신중하게 해야 한다.
우선 성도들에게 돈 이야기를 하지 말라. 11조도 말하지 말고, 결혼식이나 장례식에 대해서도 특별히 힘을 주어 광고를 하지 말고 아무리 굶어 죽게 생겼어도 성도들에게 돈을 꾸어서는 안된다. 여하튼 돈에 대한 이야기는 일절 하는 않는 것이 말하는 것보다 백배 더 낳다. 특히 교회 제정이 건축이나 다른 일로 어려울 때 돈을 빌려 달라고 직접 말하지 말라.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목사의 목회 생명을 스스로 단축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11조는 교회 생활을 몇 달만 해도 잘 알게 된다. 특별히 광고를 하고 설교를 하지 않아도 매 주일 드려지는 11조에 대한 기도로 인해 아주 쉽게 알려진다. 성도가 11조를 하게 하기 위해서는 말 보다 11조를 할 수 있는 믿음을 그에게 주십사 하는 목사의 기도가 우선이다. 기도만 하고 기다려야 한다. 11조, 기도, 전도, 교회 섬김의 기초적인 교회 생활을 강조했을 때 시험을 당하는 사람은 그런 일들이나 다른 성도의 의무를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잘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11조를 말했을 때 시험을 받는 사람은 11조를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11조를 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말이다. 그럼으로 그가 그런 기초적인 의무를 잘 감당할 수 있도록 목사는 기도를 해 주며 기다리는 인내가 필요하다.
말하고 가르치려면 같은 입장에 있는 성도들로 하여금 말하게 하고 가르치게 하라. 11조를 드려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이야기를 들려주도록 하고 기도나 전도를 해서 받은 바 은혜를 간증하게 하라. 그리고 동행하게 해서 가르치는 것이 좋다.
나는 성질이 급하고 성도들에게 요구하는 것이 원색적이 여서 돈 이야기가 성도들에게 해롭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흔히 강단에서 11조나 기도에 대하여 아주 강력한 메시지를 선포하곤 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기대와 정 반대였다. 성도들, 특히 그런 하나님의 요구를 감당할 수 없는 어린 성도들은 모두 시험을 당하여 교회를 나오면서도 죄인 인양 얼굴을 들지 못하고 결국 교회를 떠나는 것을 많이 보았다.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되 고도의 지혜를 가져야 한다. 죽을 먹고 우유를 먹어야 하는 어린아이에게 맛이 있다고 오징어를 먹이고 불고기를 먹이면 탈이 나는 이치와 같다. 그래서 바울 사도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롬6:19)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라고 하셨고 “(고전3:1)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라고 하셨다.
성도들의 경축 사에 대해서도 지나친 광고와 강요는 절대 금물이다. 성도들은 자기와 경축 사를 당한 성도와의 개인적 관계에 따라 경축 사에 참예를 한다. 그런데 목사가 자기를 표준하여 경축 사 참여와 도움을 강요한다면 성도들에게 무례를 범하는 것이 될 것이다. 목사가 그렇게 강요하지 않아도 개인간의 관계에 따라 더욱 잘하는 사람도 있고 무심한 사람도 있다.
목사는 성도들에게 돈 이야기를 해야 하는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생긴다. 나는 교회를 개척하다 보니 그런 일들이 많았다. 교회가 어떤 일로 긴급한 자금이 필요한데 어디에 가서 누구에게 돈 이야기를 할 것인가? 그래서 광고 시간에도 돈 이야기를 하고 개인에게도 돈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목사에게 돈 이야기를 듣는 성도의 입장을 한 번 생각해 보라. 집에 돈이 있는 사람은 자기 집에 있는 돈을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교회가 어렵다고 하는데 그것을 안 내 놓을 수도 없고 내 놓을 수도 없는 갈등을 겪게 된다. 그리고 혹시 하나님의 일을 돕기 위해 돈을 교회에 꾸어 줄 경우에 이자를 받을 수도 없고 안 받자니 아깝고------ 더 나아가서는 그 돈을 회수하자니 죄 짓는 것같고 헌금을 하자니 헌금하기는 너무 힘이 들고----- 그래서 시험에 든다.
우리 교회가 재정적으로 많이 어려울 때 목사의 광고를 듣고 사업 자금을 급히 돌려 가져 온 집사가 있었다. 그것도 그 집사의 아내가 남편에게 강요해서 가져 온 돈이 였다. 그렇게 해 좋고 그 돈을 매꾸기 위해 남편은 상당히 고생을 했다. 나는 그들 부부 사이에 이 돈 문제로 사소한 다툼이 있었다는 것을 전혀 몰랐다. 얼마 후 그 돈을 상환하려 했을 때 남편은 이자 없이 원금만 달라고 했는데 아내는 그 돈을 헌금하겠다고 했다. 이 일로 그 부부는 대판 싸움을 벌렸고 나는 그 돈을 돌려주기는 했지만 정말 미안하고 괴로웠으며 그 착한 부부와의 사이에 영 아물지 않는 상처가 생겨 버렸다. 그리고 다시는 그들에게 돈 이야기를 부탁하지 못했다. 꼭 그런 것은 아닌지 모르지만 결국 그들은 시험에 들어 교회를 떠나 버렸다.
목사가 만 부득이 성도들의 돈이나 성도들이 보증을 선 돈을 쓸 경우에는 반드시 그 성도가 교회에 꾸어 준 돈 때문에 근심하지 않도록 미리 미리 은행의 이자 보다 더 좋은 이자를 지불하고 약속한 날짜와 기한 내에 반드시 상환해야 한다. 그럴지라도 아에 말하지 않고 꾸어 쓰지 않는 것만 못하다. 나는 교회에 돈을 꾸어 주고 시험을 받지 아니하는 성도를 거의 보지 못했다.
성도들에게 돈을 꾸어 하나님의 일을 할 바에는 하나님께서 필요한 것을 주셔서 하도록 하실 때까지 기다리라. 아니면 우리 교회 성도가 아닌 사람에게 돈을 꾸어 쓰도록 하라. 만일 기한 내에 못 갚아 욕을 얻어먹는 일이 있어도 교회는 지장이 없다. 목사 개인이 욕을 먹는 것이기 때문이다.
20. 목사인 자기와 같이 되라는 요구를 하지 말라.
“(빌2:5-11)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눈 높이 교육이라는 것이 있다. 대단히 좋은 말이라고 생각한다. 어린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치는 선생님은 자기 자세를 어린아이만큼 낮추어야 교육적인 효과가 극대화된다는 말이다.
내가 대학원에서 설교학을 배울 때 설교학을 가르치는 목사님이 설교의 수준을 초등 학교 4학년 정도로 낮추라고 당부하였다. 그리고 무식한 할머니 권사가 설교를 듣고 이해하는 수준의 설교가 아니면 그 설교는 실패한 것이라고도 했다. 설교 뿐 아니다. 목사의 모든 목회 사역들이 교회 안에 가장 어린 성도들의 수준에 맞도록 자세를 낮추는 지혜와 슬기가 필요하다. 그런데 이것이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다. 정말 어렵다. 그리고 그렇게 자세를 낮추지 아니하면 절대 목회에 성공할 수 없다.
나는 이 점에 있어서도 남 못지 않은 많은 잘못을 저질렀다. 그럼에도 이 문제에 대하여 아무에게도 조언이나 충고를 듣지 못했다. 목회가 어려울 때마다 그 원인을 분석하고 찾아보았지만 마치 미궁을 헤메이는 것같아 답답하기만 했었는데 이제사 지세를 낮추지 못한 것이 목회의 어려움을 가져 온 하나의 중요한 이유라는 점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 알아 얼마나 목회에 적용할 수 있을까? 거의 일손을 놓고 있는 것을-------
우리 부부는 우리 아이들을 위해 11조만큼 또는 그 보다 더 많은 헌신 예물을 하나님께 드렸다. 그것은 레27:2-8에 말씀하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사람을 여호와께 드리기로 서원하였으면 너는 그 값을 정할지니 너의 정한 값은 이십 세로 육십 세까지는 남자이면 성소의 세겔대로 은 오십 세겔로 하고 여자이면 그 값을 삼십 세겔로 하며 오 세로 이십 세까지는 남자이면 그 값을 이십 세겔로 하고 여자이면 십 세겔로 하며 일 개월로 오 세까지는 남자이면 그 값을 은 오 세겔로 하고 여자이면 그 값을 은 삼 세겔로 하며 육십 세 이상은 남자이면 그 값을 십오 세겔로 하고 여자는 십 세겔로 하라 그러나 서원자가 가난하여 너의 정가를 감당치 못하겠으면 그를 제사장의 앞으로 데리고 갈 것이요 제사장은 그 값을 정하되 그 서원자의 형세대로 값을 정할지니라”라는 말씀에 따라 정성을 다한 서원 예물이 였으며 아이들을 위한 날마다의 기도와 모든 예배 참석시키기 등 온갖 정성을 다해 믿음으로 양육하고 키웠다.
이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 여서 과히 이를 말이 아니 였다. 이런 자식들이 축복을 받는 일에 대한 비결(?)을 우리 성도들이 듣고자 했다. 특히 과외도 한 번 시키지 않았는데 어떻게 대학에 들어갔는가를 굼굼해 했다. 그래서 나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아이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도록 기르는 방법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강조하여 설명했는데 이를 듣다 못한 한 집사가 내게
「목사님 그런 이야기 그만 하십시오. 목사님은 하셨을지 모르지만 우리들은 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아주 기분 나쁘게 말했다. 나는 우리 성도들의 자녀들이 공부 잘해서 대학 들어가는데 근심이 없으라고 우리 아이들 이야기를 했던 것인데 그런 소리를 듣자 몹시 기분이 나빴다.
그 말에 대하여 서운해하는 나를 본 다른 집사가
「목사님 서운해하지 마십시오. 목사님의 말씀이 다 바른 말씀 인줄을 알지만 그렇게 못하는 성도들은 하기 싫다기 보다는 할 수가 없어서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해하십시오.」
내가 어리석었다. 집사들만도 못했다. 감당하지 못할 요구를 계속 강조하니 듣는 성도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한 줄 알지만 하지 못해 시험에 들고 믿어지지 않으니 자기 믿음 없음에 낙심한다는 사실을 나는 전혀 알지 못했던 것이다. 참으로 한심한 목사가 아닐 수 없다. 자기 교회 성도들의 신앙 수준을 그렇게 몰라서 어떻게 성도들을 양육하며 성장시킬 수가 있다는 말인가?
만일 주님께서 당신의 입장과 수준에서 우리들을 부셨더라면 인간은 한 사람도 구원을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죄인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다는 것을 수 백번 설교하고 그 은혜에 감격해 하면서도 목사라는 인간이 자기를 낮출 줄 모르고 모든 성도들에게 자기 수준이 되어야 성도가 되는 것처럼 자기를 표준 해서 그렇게 되기를 강요했으니 그 말과 그 가르침을 듣는 성도들이 얼마나 괴로웠을까?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양을 모르고 양을 치는 목자 ― 양들에게 사람이 되라고 한다.
고기를 모르고 고기를 잡는 어부 ― 고기들을 보고 그물을 찾아 들어오라고 한다.
성도를 모르는 목사 ― 목사인 자기와 같은 성도가 되라고 강요한다.
기도도 나와 같이 하고 헌금도 나와 같이 드리고 예배도 나와 같이 드리고 전도도, 헌신도 내가 하듯이 해야 한다고 한다. 그 말을 듣고 있는 성도들은 얼마나 신앙적 좌괴감과 좌절을 받았으며 스트레스를 받았을까? 아니면 목사님은 목사님이니까 으레하는 말씀이고 우리는 우리들 대로 신앙 생활한다는 겉돌기식 말씀 듣기를 했을까? 그러면서도 얼마나 괴로웠을까?
나는 처음 주님을 영접했을 때 11조를 드렸던가? 주님을 영접한 후 3년만에 새벽 기도를 나가기 시작을 했고 5년만에 11조를 드리기 시작했으며 전도는 평생 부담스럽고 하기 싫은 일이 였다. 그런 인간이 이제 겨우 신앙 생활 한지 1년도 안된 성도들을 불어 모아 전도를 시키고 헌금을 하라 하고 기도를 나오지 않는다고 질책하고 예배에 빠진다고 책망한다. 마치 그들이 아주 큰 죄를 지은 죄인 인양 몰아 세우는 것이다.
그럴 일이 아니다. 어린아이를 기르듯, 어린양을 돌보며 키우듯 사랑해 주고 아껴 주며 위해 기도해 주며 가르쳐 은혜를 받도록 해야 한다. 자라서 어른이 되면 사랑할 줄도 알고 섬길 줄도 알며 하지 말라고 말려도 11조도하고 기쁨으로 전도도 잘한다. 성도들이 성장해서 성전 건축을 감당할 수 있으면 스스로 알아 성전 건축을 하자고 하고 모든 것을 주님 앞에 드릴 것이다. 이와 같이 되기까지 시간이 필요하고 심고 가꾸는 정성이 필요하다. 그것은 간과하고 속성으로 양육하여 슈퍼 성도를 만든 후에 일을 시키려고 하면 그 양이 죽어 버린다.
목사는 하나님의 종으로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사람이지만 성도는 그렇지 않다.
목사는 세상에 다른 직업이 없는 전문직이지만 성도들은 그렇지 않다.
목사는 목회가 생업이요 교회가 삶의 터전이지만 성도는 그렇지 않다.
목사는 성경의 지식이 많고 하나님의 일에 많은 생각을 하지만 성도는 그렇지 않다.
목사는 하나님의 자녀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종으로 부르심(사역적 소명)을 받은 사람이지만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다.
목사는 교회를 자기 집으로 생각하지만 성도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기 집이 따로 있기 때문이다.
대체적으로 어느 교회든 목사 보다 더 헌금을 많이 하는 사람이 드물다. 목사는 특별한 경우의 성도가 아닌 일반적인 성도들보다 훨씬 더 많은 헌금을 드리면서 자기 수준의 헌금을 하도록 성도들에게 말하고 요구한다. 목사가 헌금을 많이 하는 것은 교회가 바로 자기 생명과 같다고 생각하기 때문에다. 특별히 목사가 교회를 개척했을 때 그 교회에 가지는 애착은 절대적이라 할 것이다. 그래서 아무리 많은 교회가 있어도 자기 교회 이외의 교회에 대해서는 한눈을 팔지 않는다. 즉 자기 교회를 떠나 다른 교회를 다닐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목사가 자기 교회 사랑하고 잘되기를 위해 기우리는 노력과 정성은 가히 필사적이라고 할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 헌금도 하기 때문에 목사는 전 재산이나 모든 소득을 아낌없이 하나님의 교회 즉 자기 교회에 바치지만 성도들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성도들은 목사와 같이 교회를 생각하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교회는 자기들의 신앙적인 터전일 뿐이다. 다시 말해서 다니던 교회가 마땅치 아니하던지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면 다른 교회를 선택해서 신앙 생활을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목사가 이 점을 몰라서 모든 성도들이 자기와 같은 정도의 신앙 생활을 요구하고 헌신을 요구한다면 성도들은 매우 부담스러워 하고 갈등을 겪게 될 것이다.
바울은 모든 성도들에게 자기와 같이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그리고 주님께서도 모든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되라고 말씀하셨다. 이와 같은 말씀은 모두 우리 성도들의 신앙의 목표 지점이 어디인가를 가르치시기 위한 말씀이시다. 그리고 실제로 주님은 우리들이 구원 얻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도록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게 성화 작업을 하고 계신다. 바울은 모든 성도들이 자기와 같이 되기를 바라서 평생 죽기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신앙적 모범을 보였다.
목사가 성도들에게 자기와 같이 되기를 바란다면 그렇게 되도록 성도들을 목숨 걸고 가르쳐야 할 것이며 그렇게 되도록 주님이 하시듯 성도들을 계속 보살피고 사랑해서 거룩하게 만들어 가야 한다. 그런 정성과 사랑의 성장 작업이 없이 자기와 같이 되기를 요구한다면 그것은 목사의 욕심이다. 주님이 하시듯 바울이; 하듯 성도들을 사랑으로 보살피고 양육한다면 어느 날에는 목사와 같은 수준의 성도가 될 것이오 그 보다 더 좋은 진실한 성도가 될 것이다. 그 때까지 목사는 성도와 같은 눈 높이 신앙 생활의 양육이 필요하다.
목사는 성도 각각의 수준에 맞추어 자기의 지세를 낮추어 목회를 할 필요가 절실하다. 이런 성도의 수준에 맞게 자세를 낮추는 마음가짐과 태도가 목회에 큰 유익이 될 것이다.
21. 목회 성공을 위해 너무 서두르지 말라.
“(히12:1-3)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딤후2:5)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면류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
나는 목회 성공이 무엇을 말하는지 잘 모른다. 그렇지만 많은 목사들이 목회 성공을 많은 성도들이 모이는 큰 교회를 말하고, 세계 선교를 담당하고 소문나게 사회 봉사를 하며 이 세상의 찬란한 빛과 소금이 되어 우리 사회를 밝고 아름답게 하는 사역을 잘 감당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한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면서 수 동안 목회를 했다. 정말 그런가???????
그렇게 되기 위해 지금도 많은 목사들이 서둘러 전도하고 무엇인가 하나님과 세상을 위한 일을 열심히 일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목회의 성공에 대하여 주님은 무엇을 말씀하셨을까?
주님의 말씀을 들어보자 “(요21:15-17)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양을 먹이라 하시고 또 두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세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죄인이 성도로 성장하고 하나님의 종으로 자라 주님을 위해 죽을 수 있도록 되기까지 모세의 경우에 80년이 걸렸고, 노아는 120년 동안 순종하였으며, 아브라함도 120년이 지나서야 주님의 마음에 합당한 종이 되었다.
제자들의 경우에 3년×365일×24시간=26,280시간을 가르치였고 그것도 모자라 오순절의 성령 체험을 하게 하셨다. 그리고 나서야 그들은 주님을 위해 죽을 수 있는 제자들이 되었다. 이 26,280시간은 일주일에 10시간씩 말씀 파묻혀 산다고 하면 1년이 52주간이므로 26,280시간÷(52주×10시간)=47년이 걸린다. 일주일에 한 시간씩 하나님께 드린다면 470년이 걸릴 것이다. 그런데 우리들은 어떤가?
주님의 제자 기르심은 주님께서 직접 가르치시고 훈련시키셨으며 그것도 이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을 가진 유대인 어른들에게 이런 막대한 시간과 노력과 정성과 사랑을 쏟아 하시므로 사도들을 탄생시키셨고 그들은 주님의 기대에 조금도 어그러짐이 없이 주신 사명을 잘 감당했다.
그런데 우리 한국 교회에는 초자연적인 능력을 가지신 목사님들이 많으시다. 어떻게 교회를 개척한 지 3년만에 수천 명이 모이고 거대하고 웅장한 성전을 건축했다고 하는지---- 참으로 우리 한국 교회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기적과 이적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그런 일을 이루신 목사님들이 정말 경외스럽도록 존경스럽다. 그리고 많은 젊은 의욕이 넘치는 젊은 목사들이 슈퍼 성도들을 엄청나게 양산한 슈퍼 목사님들의 교회 성장에 대한 비법을 배우기 위해 이리 몰리고 저리 몰려다니면서 감탄을 하고 흥분하면서 성공적인 목사 되기를 꿈꾼다. 그리고 슈퍼 목사님들이 쓴 성공적인 목회 비법에 대한 책을 사서 목회의 필독서로 읽고 또 읽는다.
그러나 우리 한국 교회에 주님을 위해 죽을 수 있는 목사와 성도들이 얼마나 될까? 그것이 문제다.
누군가 어떤 선교사는 아프리카 선교사로 수 십년 사역하여 겨우 자기 집에서 일하는 하녀의 아들을 성도로 얻었는데 그는 하나님의 종으로 모든 사람에게 인정을 받았다는데 이것은 어쩐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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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 말고 우리 주님께서도 그런 말은 시간과 노력을 기우려 겨우 12명의 사도들과 따르는 여인들이 모이는 교회를 하시다가 목회를 그만 두셨는데--------
이제 나이가 들어 목회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 보는 이 지음 나는 목회자의 성공은 주님에게 칭찬을 받는 사람이 되느냐 그렇지 못한 사람이 되느냐에 있다고 생각됩니다. 어떤 슈퍼 목사님이 대형 교회에 대하여 비판하는 글에 대해 대답을 하셨습니다.
[사람이 많이 모여야 구원 얻는 사람도 많아지는 것이지 사람이 적게 모이면 아무래도 권 얻는 사람이 적을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사람이 많이 모이는 교회를 그렇게 나쁘게만 비판하지 말라]
옳은 말씀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모여 주님을 위해 충성하고 죽을 수 있도록 성장한다면 정말 얼마나 좋을 것입니까? 나도 그런 성도들이 모인 큰 교회 목사님들은 하나님께 가셔서 큰상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렇지 않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목사 한 사람이 관리할 수 있는 성도의 수는 200명 정도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큰 교회는 성도 200-300명 단위로 부 목사를 두는 경우를 봅니다. 바른 정책이요 방침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런데 주님의 종들에 대한 칭찬은 꼭 수가 많고 적음에 있지 않습니다. 맡은 바 일에 얼마나 충성했느냐에 칭찬의 척도가 있습니다. 1달란트를 맡은 사람은 한 달란트를 남겨도 칭찬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10달란트 맡은 사람은 10달란트를 남겨야 칭찬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주님 식으로 생각하자면 아마 큰 교회 목사님들 보다 작은 교회 목사님들에 주님의 사역에 더 충성할 수 있고 칭찬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성공적인 목회의 확률이 큰 교회 목사들 보다 작은 일에 충성하는 목사들에게 더 높다는 말입니다.
사람 보기에 큰 교회를 하기 위해 너무 서두르지 마시고, 많이 모이지 않는다고 실망하지 마시고, 한 사람이라고 옳게 가르치고 바르게 양육하여 주님을 위해 순교할 수 있는 성도들 만들어 냅시다.
그렇게 인내하며 주님이 가르치 신대로 목회 하지 못해 후회하는 목사가 있답니다. 맨날 서두르고 서둘러 큰 교회, 화려한 성전, 세계 선교를 제청하고 꿈꾸고 기도하다가 지금은 이렇게 작은 글을 써 나 지나 온 목회 30년의 비틀거리고 정도를 걷지 못했던 발자취를 뒤돌아보면서 후회하고 회개하면서 저는 이 글을 씁니다. 바울 사도는 나와 같이 되라고 말씀하셨지만 나는 절대 나와 같이 탐욕스럽고 성질 급한 목사가 되지 말라고 여러 후배 목사님들에게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목사 만들어 주심을 감사하고, 작은 종이 되심을 감사하고, 설교하고 기도할 수 있는 강단이 있음만으로도 감사하고, 다른 목사와 비교하지 마시고 내 일터 주심을 감사하고, 나의 설교를 듣는 성도 있음을 감사하고, 하루 세끼 주신 은혜를 감사하고, 건강하여 전도할 수 있음을 감사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 아이들 무럭 무럭 잘 자라고 있음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다 보면 작은 일에 충성하는 사람 점진적으로 조금씩 큰 일도 마껴 주실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