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에 대하여 2
교회에 대하여 2
김헌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선물로 보내 주신 절기를 맞이하여 삼위 하나님을 경하하는 이 절기에 우리의 책상 위에는 또 다른 선물이 놓여 있다. 『교회에 대하여』 제2권이 바로 그것이다. 성탄을 의미 있게 지내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께서 오심』을 꺼내서 읽을 필요가 있는데, “주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이라는 여섯 장들에서는 성탄의 의미로 교회를 언급하고 있다. 따라서 이 계절에 교회에 대한 말씀을 읽는 것은 성탄을 매우 의미 있게 보내는 것이 될 것이다.
『교회에 대하여』 제1권에서 우리는 교회의 표지에 대하여 배우고(1-4강), 교회의 첫 번째 표상으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사실(5-7강)과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는 것(8-14강)을 구체적으로 배웠다. 『교회에 대하여』 제2권에서는 교회에 대한 표상을 계속 배우는데, 교회가 하나님의 성전이다, 하나님의 집이다, 새 예루살렘이다, 진리의 기둥과 터이다는 상징의 의미를 살핀다.
교회가 무엇인가는 외적인 표지에서만 알 수 없고, 교회의 본질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에서 알 수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에서는 몇 가지의 표상으로써 교회가 무엇인가를 가르친다. 따라서 표상이 의미하는 바가 정확히 무엇인가를 주의해서 살피고 그 표상으로써 가르치는 바를 바르게 알 때 우리는 교회에 대한 바른 이해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첫째 표상으로 말씀하신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은 신자가 그리스도와 생명의 연결 가운데 있고 머리 되신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사실을 현저하게 표현한다.
표상에 대해서 공부한다는 것은 익숙한 일은 아니지만 표상에 대해서 바르게 배우지 않으면 우리는 권선징악적인 신앙생활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표상에 대한 강해를 주의해서 따라가는 것이다.
1. 교회는 하나님의 전, 하나님의 집 (15-19강)
교회가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가르치는 것은 구약의 성전 제도에 기초하고 있다. 이 말은 신약의 교회가 구약의 성전과 같은 ‘건물’이라는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성전이 성전이 되는 것은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그곳에 거하신다는 사실 때문이다. 어느 곳에나 계신 하나님께서 그곳에도 계신다는 편재(遍在)의 의미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영광의 구름으로 그곳에 거하시면서 그 백성을 인도하신다는 사실 때문에 성전이 성전이 되는 것이다. 바울 사도가 교회가 성신의 전이라고 이야기할 때에도 그 핵심적인 것은 “하나님의 성신이 거하시는” 것에 있다.
하나님께서 신약의 성전을 지을 때 머릿돌로 삼으신 것은 그리스도이고 그리스도께서 그 기초로 쓰신 자들은 사도와 선지자이다. 교회가 사도와 선지자의 기초 위에 세워졌다는 사실은 교회에 대한 바른 판단 기준을 제시한다. 교회는 유행하는 이론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사도적인 전통의 복음을 견지하고 그러한 표준 아래에서 나갈 것이며, 종교적인 감정에 휩싸여서는 되지 않는다.
여기에서 중요하게 생각할 일이 있는데, 그것은 교회를 세우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교회가 완성에 이르는 것은 사람의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사람의 노력으로 완전에 이르게 하는 일이 아니라고 하여서 염세적인 생각을 가지고 살면 안 되고, 오히려 주님께서 주신 시간 동안에 영광을 위해서 나가야 한다. 완전한 영광에 이르게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영광스러운 일에 가담하는 것을 자신의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서 성전으로 쌓아 나가실 때에는 부패와 타락의 요소를 지니고 있는 인간성을 벗어버리고 그리스도께서 새로 지으신 새사람으로 나와야 하며, 성전의 한 부분으로 삼으신 뜻에 따라서 함께 지어져 가야 할 것이다. 불에 타는 풀이나 짚이 아니라 타지 않는 금이나 은으로 지어져야 할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성신이 거하시는 거룩한 곳이라는 사실은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개혁할 것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준다. “교회의 신성성을 무시하고 속된 것을 교회에다가 집어넣되, 기독교 문화라 해서 문화를 넣고 또 우상을 끌어다 넣고, 그래도 괜찮은 줄” 아는 것은 참으로 두려운 일이다. 신사 참배 때에는 무력으로 교회의 거룩함을 훼손하였지만, 이제는 더 교묘하게 사람의 정신을 부패케 하는 이상한 것으로써 교회에 샤먼적인 종교 형태가 가득하게 할 수 있다. 자기의 복을 위해 종교를 이용하거나 종교적인 감정만을 자극하는 것은 교회의 거룩함을 훼손하는 일이다.
베드로 사도는 교회를 세우는 일에 있어서 그리스도께서 산 돌이심을 밝히고 신자도 산 돌로서 교회로 쌓아지는 사실을 가르쳤다. 그리스도께서 살아 있는 돌로서 세상의 세력을 파쇄하고 교회를 세우신 것처럼 우리도 산 돌로서 거룩한 성전으로 지어지고 거룩한 산 제사를 드리면서 살아야 할 것이다. 특히 말씀의 가르침이 희미하여지고 종교열이 강조되는 시대에서는 더욱 이 일에 마음을 기울여야 한다.
교회는 ‘하나님의 전’이라는 표상은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라는 표상으로 보충된다. 성경에서 ‘집’이라는 말이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되고 있지만 교회가 하나님의 집이라고 할 때는 ‘건물’ 혹은 ‘예배당’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가장으로 모시고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는 식구’를 가리킨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친히 다스리고 돌보시는 가정이기 때문에, 교회에서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직분자의 권위에 대한 정당한 순종이 있어야 하며, 또한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사랑과 돌봄을 받고 전진해야 할 것이다. 교회가 하나님의 집이라는 교훈은 이러한 실체가 드러남에 따라서 더욱 큰 의미를 지닐 것이다.
2. 교회는 새 예루살렘 (21-23강)
교회를 예루살렘이라고 부르는데,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 혹은 “위에 있는 예루살렘” 혹은 “새 예루살렘”이라고 부른다. 교회가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할 때에는 교회에 하나님께서 거하신다는 사실을 중요하게 이야기하였는데, 예루살렘이라는 표상도 하나님께서 거기에 거주하신다는 사실을 나타내지만 ‘통치의 보좌’를 두고 다스리신다는 더 확대된 사실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 시온에 통치의 보좌를 두고 다스리시기 때문에 구약의 하나님의 백성들은 예루살렘을 사모하였으며, 시편 137편의 시인은 예루살렘을 잊는다면 차라리 생명을 유지해 주는 오른손을 잊어버리겠다고 고백하였고, 다른 여러 시인들이 구한 것도 예루살렘의 복이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통치하시지만, 그 만물에 대한 통치를 예루살렘이라는 말이 표현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예루살렘이라는 말로 표현할 때에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그리스도께서 구원의 은혜를 입히시고 언약을 친히 이루어 가시는 교회를 가리킨다. 마치 하나님께서 모든 곳에 거하시지만 모든 곳을 성전이라고 부르지 않고 특별히 언약을 맺으시고 거하시는 곳을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하나님의 교회에 대한 통치를 새 예루살렘으로 가르친다.
“새 예루살렘”이라는 말로 종말에 완성될 교회를 표시하기도 하였는데(계 3:12; 21:2), 또한 현재의 교회를 표시하기도 한다. 갈라디아서 4장에서는 구약의 예루살렘, 혹은 시온 산과 대비하여 신약의 교회를 “위에 있는 예루살렘”이라고 이야기하고 히브리서 12장에서는 예배드리는 신약의 백성들이 “하늘의 예루살렘”에 이르렀다고 가르친다.
아브라함이 여종 하갈을 통해 얻은 자녀는 육체를 따라 얻은 것이지만 자유자(自由者)인 사라를 통해서는 약속의 자녀를 얻은 것처럼, 위에 있는 예루살렘인 교회는 육신의 힘으로 율법을 이루려고 시도하는 것이 아니라 성신의 능력으로 율법을 행하면서 사는 곳이다.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새 언약의 백성이 된 사람들이 자유를 누릴 뿐 아니라 새 예루살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 사이에서도 자유롭고 자연스러운 삶이 성신의 힘으로 나타난다.
한국 사람들은 인정이 많다고들 하는데, 그 인정이라는 것이 대체로 가족이나 친척을 중심으로 하는 것이고, 그 이외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매우 불친절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통치하신다는 사실은 항상 자기와 자기의 식구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미미하고 비천한 데서 우리의 생각을 높이 들어올려 거룩하고 아름다운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게 한다.
3.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 (24강)
바울 사도는 에베소 교회에서 사역을 하고 있는 디모데에게 편지를 쓰면서 교회를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말하였다. 그리스 사람들은 땅 위에 좌대(座臺)를 만들고 그 위에 동상이나 비석을 세웠는데, ‘기둥’은 좌대 위에 있는 동상이나 비석이나 기둥을 가리키고 ‘터’는 그 아래에 있는 좌대를 표시하는 말이다.
그리스 건축에서 기둥과 터는, 첫째, 어떤 인물을 표시하고, 둘째, 빛을 드러내며, 셋째, 어떤 말을 전한다. 따라서 교회가 진리의 기둥과 터라는 사실은, 첫째, 교회에서는 그리스도를 나타내며, 둘째, 산 위에 있는 것처럼 빛을 드러내고, 셋째, 말씀을 선포해 나간다. 진리의 기둥과 터인 교회에서는 사람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만 나타나고 빛으로 드러나며 그의 말씀만이 높이 선양되어야 한다.
4. 교회의 표상적 지칭들의 종합 (25-28강)
교회에 대한 네 가지 표상들 - 그리스도의 몸, 하나님의 성전, 새 예루살렘, 진리의 기둥과 터 - 을 하나씩 살펴본 다음에는 네 가지를 종합해서 검토한다. 이 네 가지 표상은 따로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의 교회라는 전체 안에 있는 성격들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표상적인 용법에서 일종의 통일성을 찾아야 할 것이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하는 것은 교회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의미가 아니고, 그리스도와의 생명의 연결 관계를 가리키며 또한 신자 사이의 통일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신비한 생명의 연결 가운데 있으면, 여기에는 하나님께서 거기에 거하신다는 사실이 전제되는 것이다.
이 전제된 사실을 좀더 명료하게 표현하는 말이 교회가 ‘하나님의 전’이라는 말이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친히 거하시면서 구원의 일을 이루어 나가시고, 하나님께서 경영하시는 본질적인 실재 세계가 이 땅의 현실에서 구체적으로 표현되도록 하신다. 따라서 신자들이 자신의 종교열을 앞세워서 무엇을 만들어 나가려고 할 것이 아니고 그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개인으로서 순종할 뿐 아니라 교회로서의 순종을 드리면서 나가야 한다. 특히 예배를 드리거나 찬송을 드리거나 헌상을 할 때에 교회아(敎會我)로서의 각성을 가지고 행해야 할 것이다.
‘새 예루살렘’으로 교회를 표시하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 거하면서 통치하시는 사실을 더 명확히 표현하는 것이다. 구약 이스라엘도 신정(神政)의 형식으로 하나님의 통치를 드러냈는데, 신약에서는 제2위이신 성자께서 신인(神人)이 되심으로써 구원의 경륜을 더 밝히 드러내시면서 온 세상을 다스리신다. 세대주의에서는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관계가 없는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교회보다 더 넓은 범위의 내용을 가지고 있으며,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영광의 나타남을 위해서 있는 준비적인 단계이고 그리로 도달하게 하는 방도로 준비하신 기관이다.
‘진리의 기둥과 터’라는 말을 중세기 교회에서는 오해하여서 교회가 일반적인 진리도 다 전유하는 것처럼 생각하였고, 요즈음에는 과학적인 지식으로 성경을 재단(裁斷)하는 일이 많다. 그러나 교회가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할 때에는 하나님께서 성신으로 성경 전체를 영감(靈感)하셨기 때문에 성경은 무오(無誤)한 진리이며, 교회는 그 말씀에 담긴 거룩한 진리를 선양하는 기관이라는 의미이다. 특히 한국 교회는 복음, 신령한 생활, 은혜의 방도들(말씀, 기도), 교회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해에 심각한 부족이 있기 때문에 진리의 기둥과 터인 교회가 그리스도의 중보적인 사역을 바르게 깨닫고 차서 있게 가르치는 일에 모든 힘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5. 처음 사랑을 버린 교회 (20강)
교회의 표상에 대한 강설 가운데 작은 ‘파격’이 있다. 그것은 부활절을 당하여 말씀하신 에베소 교회에 대한 강설이다. “처음 사랑을 버린 교회”라는 제목의 이 강설은 교회에 대한 강설에 한 자리를 차지하며, 책 소개의 결론으로도 적합할 것이다.
에베소 교회는 환난에 대해서 오래 참았을 뿐 아니라 열심이 있었고 자칭 사도라고 하지만 아닌 자를 시험해서 알아낼 정도의 성숙성을 갖춘 교회였다. 그러나 이러한 장점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것 때문에 회개하지 않으면 촛대를 옮기리라는 심한 책망을 받았다. 우리는 여기에서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처음 사랑을 가지고 주님께 모든 것을 다 드리는 것임을 배운다. 처음 사랑이라는 것은 단순한 애틋한 감정만은 아니다.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눅 14:26)라는 주님의 말씀처럼 누구보다도 그리스도를 더 사랑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고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주님을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
이 시대에 교회로 서서 가려는 교회로서는 20강의 마지막 문단을 다시 경청할 필요가 있다: “그러한 각오도 없고 정신도 없고 기민하게 활동하는 것이 없이 무엇이 와서 저절로 해 주기를 바라는 태도는 안 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교회뿐 아니라 가령 몇몇 교회가 바로 나아가야겠다고 하지만 그렇게 바로 나아가겠다는 감정뿐이지 그 일을 위해서 자기가 무슨 대가를 지불할 용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럴 용의는 없고 그냥 누가 와서 떠먹여 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서 무엇이 되기를 바라는 이런 불쌍한 상태에서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 깨달은 사람이, 한 발이라도 앞선 사람이 먼저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