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신앙의 진품명품
<진품명품>이라는 재미있는 TV 프로그램이 있다. 전문가들이 출연해 골동품의 진위와 가치를 가격으로 평가해 주는 프로그램이다. 각 분야의 전문가들과 연예인들도 감정 평가단으로 나온다.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골동품 소장가들에게 그 물건을 소장하게 된 사연을 직접 들어 보고 연예인들이 나름대로 가격을 정해 본다. 출연자들이 집에 있는 골동품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가격은 얼마인지 감정을 받을 수 있어 인기가 많은 프로그램이다. 흥미로운 것은 출품작 가운데 고가의 골동품으로 추측되는 것일수록 대부분이 가짜였다는 사실이다.
한번은 어떤 중년 신사가 오래 되어 보이는 붓글씨를 한 점 들고 나왔다. 우리나라 역사에 나오는 유명한 사람이 직접 쓴 글이라는 것이다. 소장자는 애국자의 붓글씨를 소장한 것에 대한 자긍심이 대단했다. 연예인 감정가들도 감탄하면서 매우 비싼 가격을 매겼다. 소장자도 감정가를 1억원이 넘게 써냈다. 이제 마지막으로 전문가의 평가만 남았다. 숨을 죽이고 전광판을 지켜보는데, 글쎄 단돈 500원이 나왔다. 소장자의 얼굴이 벌게지더니 금세 표정이 굳었다. 가짜였던 것이다. 소장자는 지금까지 가짜를 보고 기뻐하고 있었다. 가짜를 다른 사람에게 자랑하고 다녔다. 소장자는 이제 정신을 차리고 헛된 자긍심을 버릴 수 있게 되었다. 우리 신앙도 자주 점검을 받아야 한다. 귀한 것일수록 복제품이 많기 때문이다. 거짓된 확신은 눈을 멀게 하고 귀를 멀게 한다. 신자는 자주 성경에 비추어 자신을 점검하는 사람이다.
2. 사람에게는 6가지 감옥이 있다.
첫째 감옥은 "자기도취"의 감옥이다.
(공주병, 왕자병에 걸리면 정말 못말리지요)
둘째 감옥은 "비판"의 감옥이다.
(항상 다른 사람의 단점만 보고, 비판하기를 좋아합니다)
셋째 감옥은 "절망"의 감옥이다.
(항상 세상을 부정적으로만 보고, 불평하며 절망합니다)
넷째 감옥은 "과거지향"의 감옥이다.
(옛날이 좋았다고 하면서, 현재를 낭비합니다)
다섯째 감옥은 "선망"의 감옥이다.
(내 떡의 소중함을 모르고, 남의 떡만 크게 봅니다)
여섯째 감옥은 "질투"의 감옥이다.
(남이 잘되는 것을 보면, 괜히 배가 아프고 자꾸 헐뜯고 싶어집니다)
사람이 이 여섯 가지 감옥에서 탈출하지 않으면
결코 행복할 수 없다고 합니다.
3. 매 맞고 전도
황해도 신천에 있는 장개교회 오명신 집사에 관한 이야기다. 예수 믿고 교회 다닌다는 이유로 남편에게 매를 수 없이 맞았으며, 여러번 집에서 쫓겨났고 성경찬송도 불태워졌다. 그러나 오 집사는 그 남편의 영혼구원을 위해 계속 눈물로 기도했다.
어느날 술에 취한 채 집에 들어온 그의 남편은 부흥회에 참석하러 간 아내를 찾으러 갔다. 어두컴컴한 예배당 안에 자기 아내라고 생각된 여자의 머리채를 잡고 밖으로 나와 두들켜 팼다. 비명을 지르며 쓰러진 뒤에 보니, 그 여자는 자기 아내가 아니고 면장부인이었다. 겁에 질린 그는 살려 달라고 애원했다. 면장부인인 집사는 두 가지 일을 하면 감옥에 보내지 않겠다고 했다. 앞으로 오집사를 때리지 말 것과 교회에 나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 다음날부터 예수를 믿고 교회를 나가게 되었고 집사가 되었다.
오집사의 기도응답이 면장부인이 매 맞음으로 남편이 구원받게 된 것이다.
기도는 만사를 변화시킨다.
한 영혼 구원은 남을 위한 십자가를 지는 자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4. 가는 말이 고와야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나들이를 가게 됐다. 한참 걷다가 피곤함을 느낀 할머니가 “영감, 나 좀 업어줄 수 없소?”라고 했다. 할아버지는 싫었지만 나중에 들을 잔소리가 겁나 할머니를 업어주었다. 업혀 가던 할머니는 조금 미안해서“나, 무겁지?”라고 하였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그럼, 무겁지!”하고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할머니가 “왜?”하고 되묻자 할아버지의 대답. “아, 머리는 돌덩어리지, 얼굴은 철판 깔았지, 간댕이는 부었지 그러니 무거울 수밖에.” 돌아오는 길에는 할아버지가 계단을 헛디뎌 다리를 삐껏 했다. “할멈, 다리가 아파. 나 좀 업어주지 않겠소?.”할머니가 갈 때의 일도 있고 해서 할아버지를 업어주었다. 미안한 할아버지가 “할멈, 나 무겁지?”하면 좀 전의 자기를 따라할 것 같아서“나, 가볍지?”하고 묻자, 할머니는“그럼, 가볍죠!”라며“머리는 텅 비었지, 입은 싸지, 허파엔 바람만 잔뜩 들었으니까”라고 대답했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늘 말이 곱다. 크리스천의 말에는 긍정적인 생각이 담겨 있어야 한다.
5. 생각해 볼 일
미국에 이민해서 살고 있는 한국인 2세가 명문 컬럼비아대 의과대학에
지원했습니다.
공부도 잘해서 SAT 시험에 만점을 받았습니다.
집안 형편도 부유해서 무난히 합격되리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불합격 통지서가 날라 왔습니다.
그곳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귀하의 성적은 아주 우수합니다. 가정형편이나 여러 조건들도 만족스럽습니다.
그런데 귀하의 서류 어디를 보아도 헌혈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남을 위해서 헌혈한 경험도 없는 귀하가 어떻게 환자를 돌볼 수 있겠습니까.
귀하는 의사가 될 자격이 없습니다."
요즘은 능력위주의 시대이다. 그래서 대학이든 기업이든 우수한 인재만을 뽑는다. 거기다가 재정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을 우선 선발한다. 심지어는 기여입학제라는 것을 시행하려고도 한다.
실력이 참작 될런지는 모르겠지만 실력은 좀 모자라더라도 경제력으로 대학을 들어가는 일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의 인재 선발원리를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실 때와 견주어 본다면 어떤 차이가 있을까? 주님이 만일 세상적인 기준을 가지고 사도들을 선발하셨다면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과 안드레가 12제자의 수에 포함 될수 있었을까?
학력이 우수한 사람은 나다나엘 한 사람뿐이었을 것이다.
주님이 사람을 선택하시는 원리는 지식정도가 아니라 영성의 수준이었다. 하나님을 위해서 헌신 할 수 있느냐가 선택의 기준이었지 공부를 많이 했느냐가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그러고도 주님은 그들을 인류최대의 실력자로 길러 내셨다.
주님은 세상의 천한 자들도 능력 있는 자로 길러내실 수 있었기에 약한 자들을 부르셨다. 그러나 세상은 능력 있는 사람으로 길러낼 수 없기에 실력 있는 사람만을 고르는 것이 아닐까?
진짜 실력이란 아주 못한 사람을 택해서 조금 나은 사람으로 키우고 조금 나은 사람을 선발해서 더 나은 사람으로 길러내는 것이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는 말은 영성의 깊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대학이나 기업이나 오늘날은 영성의 깊이를 보는 것이 아니라 소위 유명한 간판을 본다. 간판으로서 간판을 따는 것을 주님의 말씀에 비추어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6. 엄지의 시대
대학 1학년 때부터 타자를 배웠다. 오랜시간 타자를 쳤기 때문에 키보드 다루는 것은 힘들지 않다. 그런데 키보드를 누를 때마다 엄지는 왜 이렇게 쓸모가 없나라는 생각을 해왔다. 왼손가락은 A,S,D,F를 기준으로 위 아래 적어도 15개의 키를 누른다. 오른손가락도 J,K,L,콜론을 기준으로 15개 이상의 키를 누르는데 사용한다. 그런데 엄지는 겨우 스페이스 키를 누르는데만 사용된다. 거의 기능이 없다. 키보드를 칠 때 엄지는 천덕꾸러기이다. 키보드를 치다가 피곤해 진다. 그럴 때 2번부터 5번가지 손가락은 주물러 준다. 그러나 엄지는 예외이다. 네가 한 일이 뭐가 있다고! 그리고 외면한다. 엄지손가락은 별 용도가 없다. 귀를 파기도 힘들고, 코를 파기도 힘들다. 역시 코를 파기에는 새끼손가락이 안성맞춤이다. 그렇다고 긁기에 사용하기에도 별로 좋지 못하다. 잡혀서 지문 찍힐 때나 쓰는 그런 존재가 엄지이다.
최근 휴대폰 사용자가 4000만 명이 넘어섰다고 한다. 어린 유아 빼놓고는 전 국민이 다 한 대씩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휴대폰은 통화용도로도 쓰이지만, 문자를 보내는데 더 많이 사용한다. 그런데 휴대폰을 사용할 때를 보면, 거의 엄지만 사용한다. 그래서 휴대폰 세대를 엄지족이라고도 부른다. 폴더가 되었든, 슬라이딩이 되었든 휴대폰을 열 때 엄지를 사용한다. 물론 아저씨나 아줌마들은 손 전체를 사용해서 연다. 그러나 젊은이 가운데 엄지를 사용하지 않고 휴대폰을 여는 사람은 없다. 아무에게나 휴대폰을 열어보라고 해보라. 엄지로 열면 신세대이고, 손으로 열면 아저씨, 아줌마이다. 휴대폰을 여는 것뿐만 아니라 키를 누르고 문자를 보내는 모든 것이 엄지로만 이루어진다. 나머지 네 손가락은 오직 휴대폰을 받쳐주는 역할만 할 뿐이다. 인류 역사상 엄지가 이렇게 독보적인 위치에서 사용받기는 휴대폰에 와서 처음일 것이다. 한번은 지하철에서 놀라운 일을 보았다. 긴 머리카락의 헤드폰을 낀 멋진 여학생이었다. 한 손으로는 손잡이를 잡았다. 그리고 한 손으로는 보지도 않고, 넓은 액정을 빠른 속도로 문자로 채워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눈으로 확인도 하지 않고, 전송해 버리는 것이었다. 엄지 공주였다. 빠른 사람은 1분에 400타를 친다고 한다. 엄지 하나만으로 이루어지는 놀라운 세계였다.
자기 인생이 엄지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자신은 쓰임 받지 못하는 소외된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낙심하지 말라. 소외되고, 쓰임 받지 못하던 엄지가 이렇게 크게 독보적으로 쓰임 받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이 시대의 많은 엄지들이여, 낙심하지 말라. 엄지의 시대가 온다. 성실하게 준비하고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으면, 반드시 엄지의 시대는 온다. 약해도 쓰임 받을 수 있다. 하나님은 약한 자를 부르셔서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는 분이시다. 엄지여, 힘내라. 엄지여, 일어서라. 이기게 될 것이다.
[삼일교회 전병욱 목사]
7. 유혹을 기회로 착각하지 말라
행16장을 보면, 기적적으로 옥문이 열렸다. 옥문이 열렸으니, 바울은 얼마든지 도망칠 수 있었다. 우리는 문이 열리면 기회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것은 유혹이다. 왜? 바울의 목적은 안락함이 아니라 사명완수에 있기 때문이다. 자결하려는 간수에게 바울은 외친다.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행16:28) 문이 열렸지만, 바울은 그 자리에 머물렀다.
기회란 목적을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이 매우 높아진 상태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기회란 목적과 같은 방향으로 갈 때만 의미가 있다. 바울이 옥문이 열렸다고 도망했다면, 간수와 그 가족을 변화시키는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사명을 이루려면 항상 현장에 있어야 한다. 고통받는 사람과 함께 있는 것으로부터 사명을 이루는 일은 시작되는 것이다.
금년은 본 회퍼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본 회퍼는 히틀러의 학정에 저항하다가 순교한 사람이다. 그는 미국에서 공부했다. 그리고 독일로 돌아와서 사역을 시작했다. 2차대전 직전 본 회퍼에게는 히틀러의 압박의 위험이 시시각각 다가왔다. 그를 아끼는 사람들은 그를 미국으로 도피시키기 위해서 미국에서의 강연을 요청했다. 유니온 신학교의 라인홀드 니버는 본 회퍼가 미국에 머물기를 원했다. 그러나 본 회퍼는 조국 독일 교회 앞날과 넘어지는 양떼들을 돌보기 위해서 2차 대전을 앞두고 귀국한다. 이후 고난은 줄을 잇는다. 1940년에는 강연, 집필 금지처분을 받았다. 1942년에는 카나리스 제독, 오스터 장군, 몰트케 백작 등과 함께 히틀러 암살계획을 세운다. 1943년 에는 게슈타포에게 체포 되었다. 결국 1945년 4월 미군의 진군 직전 프로센부르크의 강제수용소에서 처형되었다. 본 회퍼는 고난의 현장에 있었기에 사명을 완수했다.
독일의 국가교회는 히틀러를 지지했다. 만약 독일에 본 회퍼와 고백교회가 없었다면, 독일의 교회는 존재 기반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독일 교회의 정통성을 본 회퍼에게서 찾았기에 독일 교회는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미국에 갈 문이 열린 것은 본 회퍼에게는 기회가 아니라 유혹이었다. 그가 서야할 자리에 섰을 때, 그의 역할이 있게 되었고, 그에게 준 하나님의 사명도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사명의 자리를 떠나는 것은 유혹이다. 목사는 말씀 증거 하는 자리를 지킬 때 아름답다. 불신자가 있는 곳에 목사가 있어야 한다. 도서관에서만 머무르려 하는 것은 유혹이다. 선교사는 선교지에 서 있을 때 아름답다. 선교지보다 미국에서 선교사들을 더 많이 보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성도는 성도의 증거의 자리에 서있을 때 아름답다. 학교에서 복음 증거 사역을 잘하는 기독교사가 있다. 그는 요즘 그 자리를 떠나 신학교를 가려고 한다. 그것은 유혹이다. 쓰임 받는 자리, 증거 할 수 있는 자리를 쉽게 떠나지 말자. 꾸준히 사명의 자리를 지킬 때, 세상은 변화될 것이다.
[삼일교회 전병욱 목사]
8. 나의 특권으로 섬기라
어떤 형제의 이야기이다.. 지하철을 타는데, 자리가 많이 있었다. 조금 빨리 움직이면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별로 앉고 싶은 생각도 없어서 천천히 걸어갔다. 그러다가 동작이 빠른 사람들에 의해서 자리는 곧 채워졌다. 중간에 연로하신 할머니가 타셨다. 그런데 어느 누구도 자리를 양보하려고 하지 않았다. 특히 젊은이들이 외면하는 것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그냥 참고 있어야 하는가, 잘못된 행동을 하는 사람을 비난해야 하는가, 아니면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는가? 이때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이 옳은지를 물었다. 나는 ‘네가 제일 나쁜 놈이다’라고 외쳤다. 왜? 조금 빨리 움직여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으면, 옆사람 눈치 볼 것도 없이 그냥 양보하면 되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부주의함, 자신의 나태함이 섬길 수 있는 기회를 놓쳤버린 것이다.
상황에 따라서 쉽게 얻을 수 있는 것들이 많다. 그런데 나태함과 안일로 인해서 그것을 얻지 못한다. 그리고 나중에 도움을 주지 않는 사람을 비판하고 비난한다. 먼저 자신이 잡을 수 있는 기회, 누릴 수 있는 주도권을 놓친 것에 대해서 반성해야 한다. 그리고 남의 것으로 섬기려고 하는 태도가 옳은지를 반문해 보아야 한다. 왜 구제를 남의 돈으로 하려고 하는가? 왜 선교를 남의 헌금으로 하려고 하는가? 구제가 없다, 선교가 없다고 외치는 사람들이 많다. 자기가 하면 될 것이 아닌가? 남의 특권으로 나의 정의를 이루려는 것이 문제이다. 일제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조선에는 인재가 없다고 한탄했다. 그때 도산 안창호 선생은 이렇게 외쳤다. “자꾸 조선에 인물이 없다고 말하지 말라. 네가 하면 될 것 아닌가?” 느헤미야는 무너진 성벽의 재건을 위해서 기도했다. 그러다가 그냥 내가 하면 될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갑자기 기도가 바뀌어 “오늘날 종으로 형통하여 이 사람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느1:11)라고 외친다. 자기가 하겠다는 말이다.
부담감이 사명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가난한 사람, 어떤 사람에게는 장애우, 어떤 사람에게는 교도소에 있는 사람들이 부담감으로 다가온다. 그것이 사명이다. 그런 부담이 느끼는 사람이 그냥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는 움직이지 않고, 타인을 향해서만 제대로 살라고 외치는 것은 외식이다. 매사에 주도권이 중요하다. 요즘 젊은이들이 야성을 잃어가고 있다고 한다. 왜? 개척하려는 의지가 없기 때문이다. 이미 있는 자리에 불려가려면 임명권자에게 인정받아야 한다. 주도권이 자기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있다. 반면에 아무도 하지 않은 일, 아무도 가지 않은 곳에 가려고 하면, 주도권이 자기에게 있다. 개척정신은 주도권을 쥐게 만든다. 책임감은 비판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주도적인 인생이 되게 만든다.
[삼일교회 전병욱 목사]
9. 모여드는 다윗, 흩어지는 사울
다윗은 사울에게 쫓겨 도피하는 생활을 한다. 다윗은 쫓기면서도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로 몰려든다. 아둘람 굴에서만 400명의 사람들이 다윗에게 몰려들었다. 반면에 왕궁에 있는 사울에게는 사람들이 떠나갔다. 권력자의 외로움에 지친 고백을 들어보자. “너희가 다 공모하여 나를 대적하며 내 아들이 이새의 아들과 맹약하였으되 내게 고발하는 자가 하나도 없고 나를 위하여 슬퍼하거나 내 아들이 내 신하를 선동하여 오늘이라도 매복하였다가 나를 치려 하는 것을 내게 고발하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삼상 22:8)
빈손으로 나선 다윗에게는 사람들이 몰려드는데, 사울에게서는 사람들이 떠나는 이유가 무엇인가? 다윗은 사람을 모으겠다고, 선동하지 않았다. 설득하지도 않았다. 다만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가는 길을 선택했다. 신앙을 중심으로 자신의 삶을 재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반면에 사울은 에돔 출신의 기회주의자 도엑 한 사람만이 제사장들이 다윗을 숨겨준 것을 고발했다. 다윗을 신앙 중심의 결속이었고, 사울은 이익 중심의 결탁이었다.
내게는 타고난 친화력은 없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반장 투표를 할 때, 단 1표를 얻었다. 그래서 1년 동안 내 별명이 “ 한 표”였던 기억이 난다. 교만, 독선, 이기심, 희생 없는 모습으로는 결코 사람들의 마음을 얻을 수 없음을 절감했다. 그 충격으로 낮아지는 많은 변화를 맛보았다. 드디어 고등학교 1학년 때, 투표를 통해서 반장이 되었다. 태도와 인격이 변화되는데, 오래 시간이 걸림을 알게 되었다. 그 후 목회자가 되어서 교사들을 이끌게 되었다. 사람을 만나는 접촉을 통해서는 사람들의 마음을 얻는데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사람들과의 관계는 좀 멀리하고, 더 많은 시간을 하나님께 엎드리기 시작했다. 더욱 말씀 앞에 복종하는 생활에 힘을 기울였다. 그랬더니 흩어졌던 교사들이 모여들었다. 하나님께 가까이 했더니, 흩어졌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이것이 영적 리더십이다.
다윗에게 있는 습관 중에 제일 부러운 것은 묻는 습관이다. 그는 항상 하나님께 자세히 묻는다.“이에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되”(삼상23:2)“다윗이 여호와께 다시 묻자온대”(삼상23:4) 아마 성경 상의 인물 중에 다윗보다 열심히 하나님께 물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스라엘의 총리 비서실장을 10년 이상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남들은 비서실장을 1년 하기도 힘든데, 10년을 했다. 그 비밀이 두 가지라고 했다. 첫째, 모든 영광을 총리에게 돌린다는 것이다. 둘째, 매사에 작은 일도 항상 물으면서 한다는 것이다. 성도의 삶도 이와 같다는 생각을 했다.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 돌리고, 매우 작은 일이라고 해도 하나님께 묻는 습관이 우리를 위기 중에도 세울 것이다 [삼일교회 전병욱 목사 칼럼]
10. 삭제할줄 아는 지혜
세상을 살다 보면 미운 사람도 많습니다.
사랑하고픈, 좋아하고픈, 친해지고픈 사람도 많습니다.
그래서 사랑하다보면 괴로움이 따릅니다.
때로는 사랑해선 안 되는 사람이어서,
때로는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어서
아픔도 따르고 괴로움도 따릅니다.
그렇다고 사랑이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습니다.
괴로움, 슬픔, 아픔이 따른다고
사랑을 하지 않는다면
삶이란 것 자체도 괴로움의 연속이니
살지 말라는 말과 같습니다.
아파도 괴로워도
우리는 살아야 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서 좋아하고 그래서 사랑하다 보면
때로는 실망하고 때로는 배신의 아픔으로
미움을 갖게 됩니다.
배신의 아픔은 우리가 그에게
반대급부를 바라고 있었음을 반증합니다.
조건 없이 바람 없이 주고 사랑했다면
돌아서가는 사람은 그것으로 그만입니다.
미움도 아픔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사랑은 기쁨이지만 괴로움이 동반되듯,
누군가를 미워하면
그것은 더욱 자신을 아프게 합니다.
미워하는 마음은 희망 없는 아픔이요,
희망 없는 괴로움입니다.
사람이니까 그럴 수 있으려니
사람이니까 변하고 배신할 수 있으려니 하고
그냥 내 마음에서 그들을 놓아줍니다.
마음에 간직해서 괴로운 미움을
마음에서 지우고 그 사람의 기억도 지워버리는 겁니다.
내 인생의 장부에서
지워서 보내고 놓아주는 겁니다.
살아가면서 인생을 기록하면서
그 기록이 쌓이는 것으로 짐을 만들기보다는
적절히 기억의 기록을 지우고 삭제할 줄 아는
지혜로움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