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세대교회
차세대교회
매끄러운 영상예배, 영적인 인도, 그리고 소속된 한 장소 : 도처의 지역의 교회들에서 옛 질서는 새로운 질서에 길을 양도해 주고 있다.
뾰족탑도 없고, 십자가도 없다. 예복도 없으며, 성직자용 가운도 없다. 교회용 긴 좌석도 없다. 무릎받침대, ,... 파이프 오르간, 지루한 18세기 찬송가, 강요된 엄숙함, 헌금접시, 이 모든 것들을 찾아볼 수 없다.
수세기에 걸친 유럽풍 전통들과 기독교 관행들이 의도적으로 폐기되고, 오늘날 새로운 형식의 예배와 소속감에 그 길을 내주었다.
위와 같은 새로운 형태들을 적용시킨, 독자적인 기업형 회중들을 이름하여 차세대 교회라 부르는데, 이러한 차세대 교회는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과 과거에 교회에 다녀본 적 있는 매우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이러한 운동은 분명한 미국의 교회 생활에 대한 종교개혁으로서 종파와 교회전통의 한계를 초월한 운동이다. 그러므로 차세대 교회들은 그 이상의 다른 것들을 나타내주는데, 그것은 이들 차세대 교회들은 성스런 공동체가 아니라 세속적인 공동체들로 재변형 되었다는 것이다.
한때 시민생활을 유지해 주던 학교, 가족들, 주정부들, 회사들, 이웃들, 그리고 전형적인 교회와 같은 사회기관들은 이제 과거의 명성을 잃었다. 새로운 형태의 교회들은 종교생활을 재편성해가며, 이 공백들을 채워주고 있다. 이러한 교회들을 살펴볼 때, 차세대 교회란 말은 그러한 지역 공동체를 표현하는 가장 적절한 용어이며, 또한 한 세대 전체에 속한 사람들이 비인격적이고 일시적이라고 느낄 수 있는, 나라에서 알고 또한 발견하고픈 가장 중요한 시민생활의 제도적 구조이다.
차세대교회들은 우선적으로 그 규모에 있어서 놀랍다. 이들 중 많은 교회들(대부분이 개신교)은 주일예배에 수천 명의 사람들이 참석한다-몇몇 교회들의 경우 만 명 이상이다. 이같은 거대한 크기로 인해 거대교회(megachurches)로 알려져 있는데 그 교회들은 자신들이 이렇게 불려지는 데에 대해 달갑지 않게 생각한다. 우리가 접할 수 있는 다른 형태의 교회들 중에는 full-service 교회, seven-day-a-week 교회, pastoral 교회, 사도 교회(apostolic churches), "새 지파“ 교회(“new tribe" churches), 새 패러다임 교회(new paradigm churches), 구도자 민감형 교회(seeker-sensitive churches), 쇼핑몰 교회(shopping-mall churches) 등이 있다. 이러한 용어들 중 어느 만으로 차세대 교회를 대표할 수 있는 의미를 지니지 않지만, 장님들이 코끼리의 각 부분들을 더듬어 알 수 있듯이, 이 용어들을 종합하면 차세대교회가 무엇인지 우리는 보다 잘 파악할 수 있다. 현재 이 거대하고 역동적인 교회들의 수는 단지 400 교회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교회들은 가장 급속히 성장하고 있다. 차세대교회의 한 중요인물의 말을 인용하면, 교회에 다니는 미국인들 중 반이 40만 교회들 중 단지 12%의 교회들에 집중되고 있다. 이는 달리 보면 미국개신교회들의 과반수는 75명 이하의 교인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말이 된다.
대규모의 회중들로 이루어진 거대한 교회들은 상당한 예산과 경제적인 능률(예로서 교인 수에 비해 매우 적은 스텝진)과 많은 자원봉사자들을 가능하게 하며, 또한 거의 무한적으로 다양화시키는 능력을 산출함으로써 회중들의 필요를 충족하고 교인들을 자원봉사에 연관시키는 새로운 “생산라인”(product lines)을 개발하고자 한다.
차세대교회가 무엇인지를 이해하기 위해서 평범한 수백 개의 소규모 교회들을 무시해서는 안된다. 이들 소규모 교회들은 커지기를 원하며 성장을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한다-그들은 성장을 위해 “절치부심”한다. 이 교회들의 성장을 위한 몸부림은 가히 놀랍다. 주류교단들(역주-감리교, 침례교, 장로교)은 출혈하고 있다. 이 주류교단의 교회들은 교인들의 수보다 좌석수가 많은 실정이다. 스스로 변화를 모색하지 않는다면 이 교회들은 역사의 뒤안길 속으로 묻혀버리고 말 것이다. 한 연구에 따르면, 시골지역과 도심지 교회들은 백 명도 채 못되는 소수의 교인들만이 예배에 참석하고 있으며 한 주에 50여 교회가 문을 닫고 있는 실정이다.
차세대교회운동은 많은 전통적인 교회의 지도자들과 적극적인 기독교인들을 민감하게 자극한다. 왜냐하면 이 운동은 이미 신뢰된 것과 참이라고 생각된 것, 그리고 어느 정도 거룩한 것 등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또한 많은 사람들에게 하늘나라를 이뤄 가는 데 있어서, 세속적인 시장 중심적 접근방법을 제안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차세대 교회들이 회중들과 그 지역을 함께 세워 가는데 두드러진 성공을 거두고 있음을 볼 때, 많은 신자들은 의구심을 떨쳐버리게 된다.
지난 한해 동안 필자는 무엇이 이들 교회들을 움직이게 하는지 알고자 그 교회들을 방문하고 그 교회 목회자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교인들과 대담을 가졌다.
흐름 한 가운데 있는 섬
필자는 캘리포니아 주 뉴포트 비취의 한 언덕에 있는 매리너스 교회를 방문하였다. 아스팔트가 깔린 넓은 입구에서 노란 색의 반사광자켓을 입은 남녀들이 손을 흔들어 들어오라고 신호하며 앞서 예배드렸던 사람들이 탄 차들이 빠져나가는 빈 자리를 다시금 메우도록 교통정리를 하고 있었다. 다행히도 서로 양보하였기에 큰 혼잡은 없었다.
새로운 교회건물은 눈에 띌 정도도 아니었다. 매리너스 교회의 성전은 7년된 건물로 벽돌로 평평하게 쌓은 단층이며 강당의 천정만이 그 건물의 지붕이다. (교회를 표징하는-역자 주) 뾰족탑이라고 할만한 것은 없다. 차에서 내려 걸어가면서 필자는 그 교회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문을 볼 수 없었다. 이러한 류의 교회들처럼 매리너스 교회도 장난기 있는 디자인을 하고 있었으며, 특색 있는 수많은 문들이 있었다. 또한 주차장 건너편에는 사람들이 들어갈 수 있는 넓은 잔디밭이 있었다. 요즘 3,500명이 매주 네 번의 예배에 참석하고 주중에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여기를 방문한다. 차세대교회는 한시도 쉴 틈이 없이 움직인다.
매리너스교회의 출입문들 좌우로는 가로수가 늘어서 있는 반원형의 정원이 펼쳐져 있어서 주일아침에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서서 햇볕을 즐기며 담소를 나눌 수 있다. 명찰을 단 몇몇 사람들이 안으로 들어오는 모든 이들에게 다가가 악수를 건네며 인사를 나눈다. 낯선 사람일 경우에는 다만 간단히 상냥하게 인사말을 건넬 뿐이다. 지나친 친절은 오히려 어색함을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실내에선 오케스트라가 가벼운 ROCK 음악을 연주하며 선율과 노래를 밖으로 흘려보낸다. 사람들의 복장은 캘리포니아에서 흔히들 입는 옷차림이다. 여기저기서 아이들이 뛰놀고 있다. 파라솔이 딸린 카푸치노 수레차가 한쪽 곁에 서있다. 정원 주위에는 그늘을 만들어주는 테이블들이 나란히 배열되어 있어서 사람들에게 교회의 다양한 “선교회들”과 후원조직들의 모임장소 및 친교의 기회들을 제공해준다. 바로 이러한 작은 모임들이 매리너스 교회공동체 안으로 들어가는 출입문의 역할을 한다.
그날 아침에 있었던 조사단과 연구모임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홀로 자녀를 효과적으로 키우기 위한 세미나, 유형별(알코올,마약,학대/abuse) 자율 협조에 따른 12단계 치유모임, 사춘기자녀를 둔 부모들의 모임, 결혼예배학교, “주택건설자” 학교, 번코 나이트(Bunko Night)라 불리우는 모임, 일하는 여성의 아침겸 점심식사를 위한 모임, 노인을 위한 친교모임, 남성만의 휴식을 위한 모임, 여성들을 위한 성경공부모임, 야구팀들의 경기, 많은 X세대를 위한 모임들, “슬픔당한 이들을 위로하는 선교회들”, 예배를 위한 음악과 드라마와 춤, 이혼한 이들을 위한 모임, 새교우 신입반, 생활향상을 위한 모임(“당신은 자신을 알게 될 것이며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해 준비해놓으신 일터가 어디인지 깨닫기 시작할 것입니다. 이 반은 놓쳐서는 안되는 모임입니다”). 말할 것도 없이 매리너스에서는 일주일 내내 아이들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들도 진행되고 있었다.
이러한 모임들이 이루어지는 장소들을 벗어나 필자는 다른 곳으로 이동하다가 우연히 대부분 20, 30대의 남녀로 구성된 한 무리와 마주치게 되었다. 그들은 반바지와 티셔츠차림으로 세례처인 연못-실제로는 하늘색의 온수욕조-주변에 모여있었다. 와이셔츠 차림을 한 목사가 그들을 차례차례 불러내자, 그들은 앞으로 나와 자신들 앞에 앉아있는 친구들과 부모님들 앞에서 맹세하였다. “제 이름은 ---입니다. 저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고백합니다” 혹은 “나의 개인적인 구주로 고백합니다.” 그리고 나서 그 목사가 한쪽 팔을 잡자 그들은 아주 차가운 물 속으로 점차 들어갔다. 세례를 집례하는 목사가 그들의 머리를 마지막으로 물 속으로 넣자마자 그들은 자신들의 코를 움켜줬다. 그 후 그들이 물 속에서 나와 중생의 경험 속에서 몸을 떨 때, 친구들과 가족들은 박수를 쳤다.
필자는 수백 명의 사람들과 함께 예배처소로 들어가 카펫이 깔린 통로 곁에 자리를 잡았다. 깨끗하고 아주 현대식으로 근사하게 지어진 계단식 강당이었다. 6인의 남녀로 이루어진 싱어들과 색스폰, 신디싸이져, 기타, 드럼 등 12명으로 구성된 오케스트라가 인도하는 열정적인 찬양(이 노래들 중 1990년 이전에 작곡된 노래는 전혀 없었으며 모든 노래들은 클럽에서 연수될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이었다) 뒤에 매리너스 교인들은 몇 명의 교인들의 간증 순서가 진행되었다.
키가 크고 단아하게 차려입은 한 여인이 자신의 성경공부 경험에 대해 잠시 나누었다. 이 여인이 성경으로부터 배운 것은 남편을 변화시키려 하기보다는 남편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한 부부가 자신들이 수료한 새교우반에 대해 이야기를 하였다. 그 부인은 전에 “나는 매리너스 교회에 다녀요(go to)”라고 말하였지만 이제는 “나는 매리너스 교회에 속해있어요(belong to)”라고 말하게 되었음을 설명하였다. 그 남편에게 어떻게 그들 부부가 이 거대한 공간에서 작은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느냐는 질문-새 교우들이 궁금해하는 질문으로 매우 적절하나 대답하기 쉽지 않는 질문-이 주어지자, 그는 자신이 참여했던 소그룹활동 속에서 “소속감”과 “다양한 활동 속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가운데 새로운 목적”을 발견했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나서 우리들은 41세 된 매리너스의 수석목사인 켄톤 비쇼(Kenton Beshore)의 설교를 들었다. 그는 “고립된 집단거주처와 지역”(Enclaves and Community)에 대하여 토론하는 식으로 또 종종 재치 있게 말하였다. 한 구절이 필자의 주의를 사로잡았다. 성경구절의 인용이었다: “내가 내 교회를 세운다. 그리고 지옥의 문들이 이를 견디지 못하리라.” 비쇼는 앞에 있는 사람들에게 설명했다. “지옥은 이 교회와 우리 지역의 모든 교회들을 각기 둘러싼 담들을 쌓기를 원합니다. 그러면 결국 세상이 우릴 보지 못합니다. 우리의 사랑과 사귐을 보지 못하고 맙니다... 세상은 우리의 연합을 보지 못합니다.”
그는 계속 이어갔습니다. “지옥은 문들을 세우려고 합니다. 지옥은,” 그는 잠시 멈추고는 다시 말했다. “출입제한 지역입니다.”
군중들로부터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오, 아닙니다. 아닙니다.” 비쇼는 군중들을 가라앉힌 후에 당황하며 말했다. “여러분들이 만약 출입제한 지역에 산다면, 저는 그것을 의미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계속했다. “지옥은 교회 주변에 담을 쌓기를 원할 뿐 아니라 당신 주위에도 담을 쌓아올리기를 원합니다... 왜냐하면 만약 여러분이 작은 개인적으로 출입제한 지역에 속해있다면... 여러분은 관대해질 수 없으며 두려움 속에서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들에게 말했다. 예수님께서 “여러분들 사이의, 그리고 여러분과 지역 사이의 막힌 담들을 허무셨습니다.”
출입제한 지역들에 대한 이야기는 틀림없이 그곳에 앉아있던 수백 명의 사람들의 아픈 곳을 찔렀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사는 지역이란 다름 아닌 현대의 소외와 계층-인종간에 놓인 불신의 상징으로서 비난받는 대상이며, 그 자신들이 다양한 중산층에 속하여 안락한 지역사회 안에서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매리너스와 같은 교회-아니 모든 교회-는 필연적으로 인구통계학상 유사한 생각을 지니고 마음이 맞는 사람들끼리 모인다. 그 점이 내부인과 외부인을 갈라놓는다.
담에 대한 비쇼의 논의는 차세대 교회라는 필연적인 요구와 함께 지속전이 도전을 제시해주고 있다. 발디딜 틈없이 가득찬 수천 명의 회중들이 전통적인 개신교파의 안팎에서 세상과 구별되는 성전이 되어왔으며(이 장들에서 자주 언급되는 용어를 사용하자면, “흐름 한 가운데 있는 섬”), 그와 같이 그들은 자신들이 개인적인 중생과 인간적인 소속감을 위한 근거임을 증명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생동하며 목적을 가지고-자신들이 발견한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오직 성장함으로써, 즉 주의 깊게 경계는 하나 세상을 향해 열려진 자세를 가지고 적극적으로 세상 사람들을 끌어들이면서 바로 그 세상 가운데 머물러있다.
고린도전서의 말씀과 같이 그들은 “모든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되고자 노력한다-“몇몇 사람들이 구원을 얻을 수 있도록” 심판의 날의 남은 자들을 잊지 않는다. 웰컴 웨건, USO, 로타리 클럽, 퀼팅 비(역주: 누비이불 만드는 여자들의 모임), 도서클럽, 커피클럽, 사교모임 등에서 주어지는 역할들만큼이나 다양한 역할들을 담당함으로써 그들은 많은 미국인들이 자라나는 배경이 되는 전통적인 교회들 보다 더욱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매리너스나 또 다른 거대한 교회에 소속되는 것은 한 지역의 구성원이 됨을 의미한다. 그 속에서 얻는 유익으로서 친구들을 사귈 수 있으며 위로를 얻으며 목적의식을 공유할 수 있다.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한다는 뜻깊은 자기만족감을 얻을 수 있다.
우리가 비쇼의 집무실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그는 차세대교회의 전략을 필자가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명료하게 설명해주었다. “우리는 그들이 원하는 것을 줍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그들이 깨닫지 못하나 원하고 있는-삶의 변화-를 제공합니다.”
최근에 매리너스에 다니기 시작한 본니 리트마는 이러한 현상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우리의 정부는 우리를 좌절로 이끌었습니다. 우리의 작업장은 안전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지역들은 산산히 쪼개져 있습니다. 교회들과 회당들은 그 지역에 봉사해야 합니다.” 그녀가 덧붙였다. “이것이 지난 20년간 잘 지켜진 비밀이다.”
“누가 우리의 고객인가?”
텍사스출신의 사업가이자 작가인 밥 버포드(Bob Buford)는 차세대교회탐험의 안내자들 중 한 명이었는데, 어느 날 내게 상류층이 사는 달라스의 터틀 크맄 지역에 있는 자신의 서재에서 벽에 걸려있던 멋진 목판을 보여주었다. 그 판에는 “무엇이 우리의 사업인가? 누가 우리의 고객인가? 고객은 가치있게 여기는 것은 무엇인가?”라고 적혀있었다.
이 말은 경영이론의 최고 권위자인 피터 드루커(Peter Drucker)가 한 말로서 그는 전원적인 교회의 등장이라는 현상을 20세기 후반의 중대한 사건들 중 하나-사회구조들과 인간관계들을 자연스럽게 전면적으로 재편성하는 부분-로 보았다.
“무엇이 우리의 사업인가?” 그것은 FDFX일 것이다. 필자는 셔츠에서 이 신비스런 첫 문자들의 약어를 보았고 결국 그 글자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파악하게 되었다. 이 약어는 차세대교회의 선교선언문에서 나온 말이다: 비종교인이나 교회 밖의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께 전적으로 헌신한 추종자(Fully Devoted Follower of Christ)가 되게 하라.
“누가 우리의 고객인가?” 그들은 대부분 베이비부머들(Baby Boomers 역주: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60년대를 전후로 태어난 이들, 이 때 미국의 인구가 극도로 증가함)이다. 이러한 고객 설정은 정확히 이윤이 나는 시장전략은 아니다. 전후출생한 베이비부머들은 가장 거대하고 오늘날 가장 강력한 무리들이며, 이제 막 떠오르기 시작하는 사람들로서 가장 왕성히 일하는 이들이다. 부머들은 가난한 사람들이며 또한 동기유발된 세대로서 영적인 위안을 찾고자 많은 경험들을 하였다. 오늘날 새로이 교회를 찾는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이 1960년대에 고조된 의식을 소개받았으며, 1970년대에 영적 지도사들과 자아실현운동들(self-actualization movements)에 흥미를 가졌으며, 1980년대에는 뉴에이지(New Age)라는 특효약에 젖어들어 보았다. 로버트 블라이(Robert Bly)의 “이이론 존”(Iron John)이라는 책에 매달리고 빌 마이어(Bill Moyer)의 죠셉 캠벨(Joseph Campbell)을 애독하던 바로 그 세대가 지금은 제임스 레드필드(James Redfield)의 천상의 예언(The Celestine Prophecy)을 읽고 있으며 천사들에 관심 갖고 있다. 하나님께서 이곳에 시장확보의 가능성을 갖고계신 것은 아닐까?
현대적이며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진정한” 예배형식들-상징적이며 명료한 음악-을 개발하며 이에 대해 창의적으로 거리낌없는 태도를 취하기 때문에 전에 비기독교인이었거나 불행했던 교인들이 매리너스와 같은 교회로 몰려들고 있다. 차세대교회의 예배들은 영상매체들을 이용한다. 설교자의 머리 위로 영사기가 선생님들이 칠판에다 기록하듯이 요점을 비추며, 그 메시지 속에서 준비된 삽화나 간단한 인용구, 비디오로 편집한 영상들을 청중들에게 보여준다. 학자이며 대규모 교회운동에 대한 수십 권의 책을 펴낸바 있는 라일 쉘러(Lyle E.Schaller)는 이들은 스테인글라스 창문들의 후예이며, 말이 아닌 또다른 이야기 전달장치를 필요로 하는 세대들이라고 말한다(영사기는 이미 찬송가나 기도책들 대신에 사용되고 있으며, 그 주일의 성경구절을 앞의 화면에 투사한다.) 한 사람의 간증이나 두 세 명이 연출한 간략한 드라마는 실제 생활의 한 단면으로 목사가 전하려고 하는 메시지의 핵심을 보여준다(이것은 거의 설교라 할 수 없다).
이러한 규모의 회중들에게 제단 앞에서 행하는 성례전은 비현실적이다. 필자가 본 성례전은 일반적이지 않고 매우 특별했다. 그 많은 수의 사람들이 앞으로 나오면서 연속에서 무릅꿇는 것은 매우 까다로운 일이기 때문에 성례전은 계단식 강당 안의 미리 정해진 자리들에 맞추어 차례대로 사람들이 일어섬으로써 집행되었다.
미네소타 주의 에덴 프레어리에 있는 우드데일교회(Wooddale Church)를 담임하는 레이스 앤더슨(Leith Anderson) 목사는 이 운동의 지도자로서 “문화를 읽기”(reading the culture)”와 “문화를 번역하기”(translating the culture)에 대해 말하기를 좋아한다. 오늘의 문화는 예전 교회가 지닌 “유럽풍” 분위기나 예식, 언어 따위를 별로 신용하지 않는다-일반적으로 옛 관행들이나 제도들에 대해 신뢰를 보내지 않는다.
이들 교회들 중 일부는 “선교사들이 수십년 전에 알고 있었던 진리를 드라마로 연출하고 있다”고 교회연구가인 조지 헌터(George Hunter)는 그의 새 책 비교인들을 위한 교회(Church for the Unchurched)에 적고 있다. “비기독교인들에게 다가가기 위해서 교회가 문화적으로 ‘선교의 장’에 알맞게 토착화되는 것이 필요하다” - 그곳이 아시아, 아프리카, 혹은 라틴 아메리카나 아니면 교외의 주택단지(Exurbia)이든지 간에. “교회의 의사전달 형태들이 지역주민들에게 생소할 때 그들은 결코 기독교의 하나님이 자신들과 같은 사람들을 위해 존재한다고 인식할 수 없다.”
미국의 기독교 종파들은 대부분 유럽문화의 제도적 표현양식들 속에 남아있으며 그들의 신앙과 전통의 보루들은 여전히 강력하다. 일례로 필자가 어려서부터 접해온 앵글리칸 예전과 음악을 지금도 필자는 주일아침이면 그 웅장함과 친밀함 때문에 즐기고 있으며, 이 음악들은 영원으로 인도하는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결국 그들 역시 근래에 이루어진 신앙의 표현일 뿐이다.
앤더슨은 21세기를 향한 교회(A Church of the 21st Century)에서 다음과 같이 전망했다.
신약성서는 교회들에 대해 자주 언급하면서도 교회구조와 생활에 관련시키는 많은 문제들에 대해서는 놀라우리만큼 침묵하고 있다. 교회의 구조나 강대상, 전형적인 설교의 길이, 혹은 주일학교를 위한 규정들에 대해서는 일체의 언급을 피하고 있다. 음악의 형식, 예배의 순서, 교회모임의 횟수 등에 대해서는 거의 말하고 있지 않다. 거기에는 성경도 없으며, 종파들이나 지회 또는 목사들의 회의들, 이런저런 위원회들도 없다. 신약성서 속에 나오는 교회들처럼 되고자 하는 교회들은 그 원리들과 순수성을 지니고자 노력해야지 세밀한 부분들을 재창출하고자 해서는 않된다. 우리는 상세한 부분들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만약 우리들이 알고 있는 부분들을 재창출하려고 했다면 우리는 이미 회당과 헬라어와 고린도교회의 다양한 죄목들과 함께 사라져버렸을 것이다.
헌터는 마틴 루터가 성경을 자국어인 독일어로 번역했고 루터교회는 당시 유행하던 음악들-술 마실 때 흥얼거리던 노래들까지도-을 채용하였음을 지적한다. 웨슬레 형제들의 감독 하에 감리교도 일반 백성들에게 다가가고자 보다 하찮은 문화를 수용하기로 동의하였다-그리하여 들이나 도심의 광장에서 복음을 전하였다. 그들은 추종자들에게 “가장 분명하고 쉽고 평범한 말로 우리가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전하라”고 말하였다. 구세군의 창설자인 윌리엄 부스(William Booth) 장군도 “왜 악마가 온갖 듣기 좋은 노래들을 지니는지 아십니까?”라고 자주 말하곤 하였다.
새로운 형식의 예배들에 대하여 제도적으로 저항하는 일은 어리석다고 생각하는 자신의 견해를 보다 쉽게 설명해주기 위해서 쉘러는 필자에게 교회를 나뉘게 한 이전의 논쟁들을 떠올리게 하였다: “우리가 교회건물 안에 전화를 가설해도 됩니까? 우리가 교회 안에 수도관을 설치해도 됩니까? 당신들은 하나님의 집에 그러한 일이 벌어지기를 원치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먼 옛날의 이야기가 아니다. 필자는 한 젊은 그리스도 교회의 목사를 만났다. 그는 자신이 속한 교단이 아직도 예배시간에 악기들을 사용하는 것을 금지시키고 있다고 한탄하였다.
성장의 진두에서 회중들을 갈라놓는 것은 사실상 핵심적인 문제나 상징의 문제가 아니라 음악이다. 파이프 오르간, 옛 찬송가, 길게 늘어진 성가대의 가운들이 전통을 중시하는 사람들에게 교회가 지닌 연속성과 단결의 표상들일지 모르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다만 겉치장과 배타성의 상징들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교회가 현대음악을 사용하느냐 안하느냐의 문제는 교회가 어떤 사람들을 원하느냐의 문제를 규정한다. 교회가 현대음악을 사용하면, 그 교회는 비기독교인들-특별히 임신한 이들이나 자녀를 키우는 세대들-을 원한다고 말할 수 있다.
문화적으로 “진정한”(authentic) 교회음악의 지지자들은 이러한 변화에 무딜 수 있다. 달라스주 노스웨스트 바이블 교회의 담임목사인 하워드 클락(Howard Clark)은 한 젊은 부목사(a young staff member)가 자신에게 "저는 오르간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제 친구들 중 어느 누구도 오르간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왜 우리가 주일에 오르간을 들어야 합니까?”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현대적인 찬양과 예배음악을 교회에 제시해주고 있는 찬양전문회사인 마라나타 음악의 회장직을 맡고 있는 척 프롬(Chuck Fromm)은 필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가 우리의 음악에 대해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우리 지역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지에 대해 더욱 깊게 생각해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21세기에는 암만파의 신도(Amish, 개신교의 한 종파, 역주 필요- 아마도 현대음악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교파)가 될 것입니다.”
성공을 위한 대가
수년 동안 여러 교회들을 둘러본 뒤 최근 매리너스교회에 등록한 한 젊은 여성이 필자에게 “처음 주차장에 있는 (고급차종들인-역자 주)비머와 재규어 차들을 보았을 때 어떻게 이러한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할까? 나는 의아하게 생각했습니다”라고 말하였다. 매리너스 교회(이웃에 큰 교회가 들어선 이래로 지금은 매리너스 사우스코스트 교회라 불린다)에는 미국에서 가장 부유하고 공화당 색채가 강한 지역들 중 한 곳인 캘리포니아 주의 남부 오랜지 카운티에 사는 사람들이 많이 참석하고 있다. “그들은 신흥갑부들이죠”라고 켄톤 비쇼는 필자에게 말했다. “우리 교회의 많은 교인들이 회사를 운영하고 있으며, 프링스톤, 하바드, 스탠포드 대학을 나온 고임금자들입니다. 그들은 중역을 맡고 있는 기업인들입니다.”
그는 자랑하지 않고 핵심만을 말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원했던 세상에서 출세를 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자신들이 원했던 그 세상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맡고 있던 교구의 많은 사람들이 모든 것-특별히 돈, 술과 마약, 신앙을 저버리거나 (infidelity/성적인 부정?) 과식-을 시도해보았다. “술취하여 제정신이 나갔다란 말의 참 뜻은 다른 결과를 기대하며 동일한 일을 반복적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일리노이주의 사우스 배링톤에 있는 가장 큰 교회인 윌로우 크맄 지역교회(Willow Creek Community Church)의 담임목사인 빌 하이블스(Bill Hybels)는 이러한 현상을 “성공 공포증”(success panic)이라 말하며 이러한 증세를 부유한 사람들에게만 한정하지 않았다.
어느 주일아침 필자는 윌로우 크릭에서 존 오트버그라는 쾌활하고 재미있는 설교자로부터 메시지를 들었다. 전도서 6장 7절를 인용하며 “모든 사람의 수고는 입을 위한 것이나 식용은 절대로 만족되지 않는다”라고 말하였다. 2,400명의 회중들에게 “여러분들이 지닌 열망들은, 만약 여러분들이 그 핵심에 이를 수 있다면, 영원을 향한 것입니다.”
매리너스 교회로 다시금 나오게 된 보니 리트마(Bonnie Leetmaa)는 그녀의 오빠가 어떻게 세상에 질문을 던지게 되었는지를 기억했다: “사람들이 이제 곳 죽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기만 한다면 사람은 교회로 돌아올 것입니다.”
위의 생각은 종종 부모관계로부터 뒤따라 나온다. 자녀들은 많은 비교인들이나 배교한 기독교인들을 다시금 교회에 나오게 한다. 그들은 자손이 없었다면 교회의 필요성을 못 느꼈을 것이다. 설교와 예전과 교회라는 지역공동체는 부모와 자식들에게 영원한 연속성들을 떠올리게 하며 그들에게 도덕적 교훈들을 제공해준다. 규칙들은 모호하며 우리는 죄와 덕목들에 대한 신앙의 회복을 즐긴다. (필자의 대화 속에서 가장 자주 인용되는 지혜의 원천은 하나님을 제외하고는 월리엄 베넷이다.)
가장 완고한 전통적인 교회들조차도 만약 그들이 비판적인 무리들을 지니고 있다면, 부머 가정들과 부스터라 불리우는 세대(베이비 붐 이후인 1964년 이후에 태어난 이들)를 끌어들이기 위해 가장 매력적인 요소인 음악을 사용하여 자녀들을 교육하고 아동들을 돌보며 십대의 아이들에게 여러 활동영역을 제공하고 있다. 새로운 교회들은 인구통계학상으로 특정한 대상들에 대해 상세히 이해하고 있는데, 이 점에 대해 산타 바바라에 있는 캘리포니아대학의 사회학자인 왜이드 클락 루프(Wade Clark Roof)는 부머의 영성에 대한 명저 구도자들의 세대(A Generation of Seekers)에서 잘 기술하고 있다.
그들의 관심은 물려받은 신앙이나 관념과 생각들로부터 방해를 받지 않고 삶을 직접적으로 체험하며, 하나님이나 신적인 존재와 만남을 갖거나, 혹은 단순히 본인이 직접 자연이나 다른 사람들과의 만남을 갖는 데 있다. 그러한 열망은 이해할만하다. 왜냐하면 전수된 종교는 더 이상 의미없기 때문이며 또한 개인적인 경험만이 어떤 의미에서 진정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그들에게 원기를 북돋아주기 때문이다.
그 수단은 시장 중심적이고 문화적으로 민감한 것이며, 최첨단의 것들이나, 이러한 사실이 차세대교회를 근본적으로 “진보적”이거나 “자유분방한” 교회로 만들지는 못한다.
새로운 교회들의 본질은 텍사스 주의 아이빙에 있는 라트 콜리나스 교회(Fellowship of Las Colinas)가 공언한 목적에 의해 잘 표현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 자라가기 위해(to reach up) 존재합니다-그것이 예배(하나님께 사랑을 표현함)입니다. 우리는 세상으로 뻗어가기 위해(to reach out) 존재합니다-그것이 복음주의(또는 다른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나눔)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 도달하기 위해(reach in) 존재합니다-그것이 제자도(헌신하여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가 됨)입니다.” 비록 근본주의자들이 매우 드물게 자유스런 교회나 세속적인 미국사회에 받아들여지기도 하나, 이들 교회들은 복음주의에 소속되어 있으며-즉, 그들은 선교와 회심을 강조한다-성경을 문자 그대로는 아니지만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들에게 거룩하게 간주되는 유일한 것이며, 그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친구에 대해 이야기할 때처럼 매우 자주 그리고 아주 친밀하게 부른다.
이들은 텔레비젼 사업들이 아니다. 그들은 결속력 강한 회중들이다. 그 교회들의 지지자들은 부흥회 때 천막 속에서 힘없이 앉아있던 사람들이 아니다. 팜플렛을 가지고 문을 두두리거나, 낙태를 행한 병원 앞에서 시위하는 군중들도 아니다. 거대교회에 속한 보통 사람은 자신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어느 정도로 강열한 지에 관계없이 보다 조용하고 사회적으로 절제된 사람, 즉 보통 미국인이다. 미네아폴리스의 도심에 있는 프린스 어브 피스 루터교회에서 만난 한 여인은 필자에게 “우리는 손을 높이 쳐들고 미친 듯이 행동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결국 루터교인을 뿐이지요”라고 말했다.
선택가능한 교회
교회의 고객으로서 부머들은 생활 속에서 일일이 선택하는 절충주의에 익숙해져있다. 19세기의 성당을 자연적으로 모방하는 가운데 상점가와 같은 거대교회는 한 지붕 밑에서 일련의 멋진 선택사항들-넓은 주차공간과 깨끗한 화장실과 다시 오고 싶을 정도로 사람들의 취향을 자극하는 일들과 공간들 외에도 다양한 예배형식들로부터 소규모의 사역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들-을 제공해준다. 바로 이 점이 고객들이 높이 평가하는 부분이다. 필자는 지역신문에서 오랜지 카운티의 작은 감독교회에 대한 기사가 실린 것을 보았다. 그 교회는 매 주일 아침이면 전통적인 예배와 현대적인 예배 그리고 은사집회도 제공해주고 있다. 필자가 만난 또다른 목사는 텍사스 주의 타일러에 있는 폴라드연합감리교회를 시무하는 스텐리 코프랜드(Stanley Copeland)는 예배메뉴를 “쵸콜렛, 바닐라, 딸기”로 언급했다. “우리는 이미 기독교인이 된 사람들을 위한 교회가 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우리는 정도(正道)만을 제시하는 교회가 아닙니다. 다양한 선택들이 가능한 교회입니다.”
필자는 여행 중에 많은 선택들이 있음을 보았다.
에드 영(Ed Young)은 라스 콜리나스 교회의 젊고 활력넘치는 목사로서 우편을 통한 시장확보에 특별한 관심과 열정을 쏟고 있다. 라스 코리나스의 대중적인 토요저녁집회에 오도록 강권하는 메시지들("A Succsexful Marriage")를 그 지역의 우편함들에 보내고 있다.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수없이 많은 편지들 덕분에 라스 콜리나스의 주말집회에 3천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석하여 예배드린다. 한 예로 영의 부활절 시리즈인 “가정의 미래”란 내용을 담은 편지는 92,000통이나 보내졌다.
스포츠 역시 라스 콜리나스에서는 큰 비중을 차지한다. 교회는 38개의 야구팀들을 조직하여 리그전을 펼치며, 남녀 아이들의 경우 1등급에서 6등급까지 이르는 팀들이 조직되어 있다. 이 교회는 뉴욕 양키즈 팀이 개최하는 야구교실을 후원하고 있다. 또한 텍사스 주의 모든 남자들의 반발을 예상하여 예배는 달라스 카우보이 풋볼팀이 경기하는 시간 이전에 끝마쳐진다. 그리하여 예배가 끝난 뒤 교회 건물 바깥 쪽에 대형 스크린을 설치하여 사람들이 경기를 지켜보며 서로 사귐을 갖도록 유도한다. 주일이 구별된 까닭은 사람들로 하여금 쉬도록 위함인데, 라트 콜리나스는 그들의 편의에 맞추어 토요일 밤에 예배를 드린다.
사람들은 이러한 교회에 나가기 위해 45분에서 한시간 가량을 운전할 것이다. 그러나 그 후에 여느 미국인들처럼 습관적인 생활 속에 젖어든다. 밥 버포드(Bob Buford)는 "사람들은 가까운 집근처에서 일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가까운 근처에서 쇼핑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집 가까이에 있는 영화관에는 가지 않습니다. 왜 사람들이 가까이에 있는 교회에 나갈 것이라고 생각해야 합니까?그들은 차를 몰아서 집근처의 작은 교회들을 지나 보다 다양한 예배와 프로그램들이 있는 큰 교회들로 나올 것입니다.“
그는 에드 영의 교회운영과 “힛타이드 사람들(역주: 구약 성경에 나오는 헷 족속)에 대해 설교하고 있는 석조 교회(stone church)” 사이의 대조적인 모습에 머리를 흔들었다. 그는 말을 이었다. “라스 콜리나스교회가 제시한 프로그램들은 압권입니다. 음향시스템은 예술적 경지의 수준이며, 설교의 내용은 적절하며 청중들에게 잘 전달됩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교회로부터 윌로 크릭 교회와 같은 요소들을 요구할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교회로부터 그같은 요소들을 얻어내지 못한다면 윌로 크릭교회로 떠나갈 것입니다. 이는 작은 구멍가계와 대형상점(Wal-Mart)의 경쟁관계와 유사합니다. 공평한 경쟁이 이루어지기 불가능하지요.”
아마도 필자가 참석했던 예배들 중에서 가장 영적으로 격양되고 음악적으로 매력적이었던 예배는 미네아폴리스에 있는 오픈 도어 교회(the Church of the Open Door)의 예배였다. 데이빗 존슨의 집회는 수천명이 주말에 세차례씩 그 도시 북서쪽 노동자들의 거주지역에 있는 고등학교로 사용되었던 장소에서 모였다.
필자가 그곳을 방문하던 때는 비오는 겨울날 아침 8시였다. 주차장은 진흙탕이었으며, 서로 밀치며 녹슨 벽장들이 늘어서있는 복도를 따라 들어갔다. 교회가 주중에 제공하는 활동들과 돕는 사업들을 홍보하는 수십 개의 칸막이들이 있는 방을 지나 위로 올라가자 동굴같이 침침한 체육관에 들어왔음을 알 수 있었다. 그 곳에는 의자들이 배열되어 있었고, 양 측면에는 농구골대들이 있었다. 부유한 거대교회들을 볼보를 타고 오는 사람들과는 달리 이 교인들은 대부분 청바지와 셔츠 차림이었다.
그 모든 수수함에도 불구하고 오픈 도어 교회는 성경구절과 노래가사를 비추기 위해 영사기를 사용하였다. 이것은 사치스러워보일지 모르나, 찬송가 2천 권과 기도서 2천 권을 구입하는 것 보다 싼 것이었다. 그 교회는 보다 현명했다: 우선적으로 스크린에 말씀과 노래가사를 비추기 때문에 사람들이 고개를 떨구고 책을 이리저리 뒤적이지 않아도 되었다. 이러한 교회들에서 필자가 들었던 찬양들이 모두 우렁차며 열정적이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부분적으로는 음악이 단순하고 유치할 정도로 여러 번 반복되는 구절들이 많았기 때문이기도 했으나, 사람들은 고개를 들고 손을 자유스럽게 뻗거나 흔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자연스럽게 손뼉을 치거나 엉덩이를 들썩거렸으며, 때로는 한 쪽 손을 뻗어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그날 아침 오픈 도어 교회에는 40여분간 쉼없는 찬양이 이어졌다. 그들은 모두가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고무되어 일어나 있었다. 이러한 류의 교회들이 지니는 특징은 찬양 속에서 예배가 지속된다는 것이다. 앞에서 찬양을 인도하는 여자는 자신이 뿜어내는 찬양의 힘을 절제하여 전달하였다. 찬양하다가 지치게 되자 그녀는 마이크에 대고 잠잠해진 청중들을 향해 조용히 속삭였다. “주님, 당신의 승리로 인하여 감사합니다.”
그 후 존슨이 등장하여 연재되는 돈에 관한 설교 한편을 전달하였다. 그 속에서 그는 교회에 주어지는 방해물들을 찾아내고 그 교인들에게 재정적인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지속적으로 투쟁해야할 이유들을 설명하였다. 냉철하고 분명한 어투로 원고대로 설교하는 큰 교회의 설교자들과는 달리 존슨은 활동적이며, 간혹 큰 소리를 외치며 설교하였다-지미 스웨가트(Jimmy Swaggart)는 땀과 눈물이 없었다. 그러나 그의 자세는 차세대교회에 적합하였다. 플라스틱으로 된 투명한 성경책받침대 주위의 강단을 배우처럼 이리저리 거닐면서 예수님처럼 존슨은 앞에 있는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말하였다. 실제로 그는 고성을 내며 말하였다. 필자는 전날 밤 텔레비젼에서 매우 호소력 있는 대담자들이 죠 페시와 로빈 윌리엄스와 함께 이야기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존은 스스로 말하는 것을 중단시켰다. 코메디에서 하듯 일어나서 다른 굵은 목소리를 한 사람의 소리를 내면 말하였다. “자 데이브 이것은 영적인 것으로 들리지 않는군.” 죤슨은 본래 자신의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이것에 대해 누군가가 더잘 말할 수 있겠지요. 이것이란 바로 바로 하나님을 말합니다. 그것은 돈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성(sex)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아주 독특한 인물에 관한 것입니다. 바로 영적인 분 - 바로 하나님에 관한 것입니다.”
필자가 방문했던 많은 교회들의 교인들은, 비록 거의 모든 교회에서 흑인이나 갈색인종과 아시아계 사람들이 일부 자리에 있기도 했지만, 대부분 백인들이었다. 대다수의 목사들은 그들이 자신들의 지역에 우연히 살계된 사람들을 교회로 끌어들이기를 간청했지만, 그들은 그 점에 대해 달갑지 않게 여겼다.
교회연구가인 라일 쉘러는 필자에게 인종과 민족은 미국교회(매우 크고 다문화를 포함한 은사중심의 교회들을 제외하고) 내에 “여전히 존재하는 경계선”이라고 말했다.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과 사회적으로 유사한 사람들과 함께 예배하며 교회선택이 스스로의 위치를 결정해준다고 생각하도록 만드는 동일한 충동은 그들로 하여금 인종적으로 섞이지 않고 자신들이 구분되어 유지하도록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문이 닫혀진 교회는 생존한다. 이러한 교회들이 문제를 말하고 필요를 채우는 한가지 방법은 소수인 자신들 중심의 특정한 교회들을 세우는 것이다.
흑인 중심적 사고의 발흥은 수백 개의 미국 흑인교회들 속에 강력한 인상을 주었다. 남부 달라스에 위치한 콘코드 미션내리 침례교회를 시무하는 베일리(E.K. Bailey) 목사는 자신이 명명한 “버피스”(흑인의 전문직업인)라는 흑인들의 전문적 직업향상을 위한 모임 속에서 사람들을 모으고자 했다. 그들은 콘코드와 같은 아프리카계 미국인 교회가 행할 수 있는 전문화된 사역들을 필요로 하였다. “그들은 종종 백인들의 조직 속에 한 일부로 자리합니다. 그러나 그 문화 속에서 그들 모두는 부담을 느끼게 되지요. 여기에서 그들은 본래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고 다른 사람들처럼 해야할 의미있는 일들이 주어져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콘코드의 예배의식들은 전형적인 대교회의 모습과 똑같지는 않다. 그러나 그 사실은 미국 내 흑인교회가 이미 오래 전부터 자신들의 문화를 뿌리내리기 시작했으며 킹제임스역본(역주:1611년 영국왕 제임스 1세의 명령에 의해 번역된 영어성경으로 가장 오랜 시간동안 권위있고 훌륭한 영역본으로 인정받아왔다)과 같이 시대의 흐름에 관계없어 보이는 예배형식과 가스펠송 전통들을 발전시켜가고 있음을 반영하고 있다.
차세대 교회들은 주로 20대 미국인들을 교역의 대상으로 삼는 교회를 만들고 그들로 하여금 예배하도록 하는 것에 높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필자는 부머들과 부스터들 사이에서 취향과 기대치, 영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한 차이점들을 설명해놓은 여러 이야기들을 들었다. 캐롤 촤일드리스(Carol Childress)는 세대들 간의 기호와 취향에 대하여 연구한 뒤에 교인들로서 부스터들은 거대교회의 과도함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을 지니며 무엇보다도 (역주: 교회됨의) “진정성”(authenticity)을 추구한다고 말한다. 필자가 판단하기에, 취향과 기대치에 대한 다른 차이점들은 다만 25세와 45세 사이에 존재하는 시간적인 간격들로 인한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텍사스 주의 와코에 있는 유니버시티 침례교회의 목사인 크리스 시이(Chris Seay)에게서 버스터 형식의 중요한 특징을 볼 수 있었다. 그는 다만 24살의 청년처럼 느껴졌다. 시이는 20대와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목회를 하였는데, 낡고 허름한 영화관에서 집회를 연지 12개월만에 1,200명이나 되는 젊은이들이 모이게 되었다.
우리가 지난 해 달라스에서 만났을 때, 시이는 필자에게 유니버시티 교회가 지니는 두 가지 매력에 대해 말해주었다. 이 교회는 와코에서 최고의 락-음악 가수들을 데려다가 멋진 락-음악 찬양을 부르게 한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들의 “음악”-“a cross between Pearl Jam and Hootie and the Blowfish"-에 대해 말했다. 그 교회는 또한 “세포들”(cells)이라 불리우는 소그룹들 속에서 친구들(Friends)이라는 텔레비전프로를 감상하고 서로 이에 대해 토론한 뒤에 성경공부에 들어간다. (부머교회들에서는 이와 대응되는 프로그램으로 흥(Cheers)이 있다. 그 주제곡은 익명의 세상 속에서도 누릴 수 있는 친밀감에 관한 가사를 담고 있다: “모두가 당신의 이름을 알고 있는 곳이...”)
유니버시티 교회에 부머교회들은 자신들이 지녔던, 꽉짜여지지 않은 예배순서들을 양도해주고 있다. 시이는 자신의 예배에 대해 말하였다. “우리는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 못합니다-아니면 적어도 다음에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지 알지 못하는 냥 사람들에게 보이도록 합니다.”
시이는 3대째 이어오는 목사로서 부스터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우리들은 제도적인 교회들(institutions)을 신뢰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이 우리를 무시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부스터들이 그리스도를 거부한다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그의 사역이란 “안전한 장소에서 찾아오는 이들과 대화하며 복음을 전하는 것(communicate)”입니다. “그들은 편안하게 ‘이것들이 전후 하나님에 대한 것이라고 생각지 않아요. 제게는 허풍같거든요’라고 말할 수 있는 장소가 필요합니다.”
새롭고 거대한 독립 교회들은 보다 많은 성공을 거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류 교단들처럼 낙태나 동성연애에 대하여 다양한 입장들을 수용하려고 한다. 미네아폴리스 도심에 자리한 프린스어브피스 루터교회의 목사인 미첼 포스 같은 몇몇 사람들은 이 문제들에 대해 우리가 분명한 입장을 취하기란 불가능하다고 본다. “나는 기독교인들이 이 문제들에 대하여 어느 한 쪽을 편들 수 있다고 분명히 생각합니다”라고 지난 가을 포스는 필자에게 말하였다. 교회가 겪는 비극들 중 하나는 불필요한 곳에도 선을 그으려는 경향입니다. 기독교인들은 바로 기독교인인 자신들에게 돌을 던지는 행위를 그만 두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것에 동의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문제들은 하찮은 것들입니다. 우리가 관심가져야 하는 것은 영적인 중생의 문제입니다.“
물론 위와 같이 무책임한 사고가 앞서 필자가 언급했던 모든 차세대교회의 목사들 중 가운데 명백히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정치가들처럼 그들은 이 문제들을 언급하는 성경 상의 금지명령들에 대하여 다양한 강조점을 제시하고 있다. 그들은 성경이 피임하며 단순히 즐기고자 성관계를 갖는 사람들에 대해 심도있게 비난하고 있다고 본다. 그러나 필자에게 비쳐지는 그들의 결론은 언제나 이 문제들에 대해 공감하며 동정할 필요-죄에 대해 경계는 하나 죄지은 자에게는 용서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 입장은 필자가 만난 많은 차세대 목사들의 지닌 공동된 생각이다. 텍사스 주 아링톤의 판테고 바이블 교회 목사인 랜디 프래지(Randy Frazee)는 네게 이처럼 말했다: “나는 교회에 대하여 다시 정의 내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교회 밖에서 많은 실패를 경험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결코 교회 안에서 자신들이 받아 들려질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영적인 의미에서 굶주려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이 하찮은 계층의 시민일 뿐이라고 느낍니다.”
그가 말한 바에 따르면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가톨릭 교회에서 성장했다. 사실 상 가톨릭교회를 떠난 이들이 개신교에서 거대교회들의 수적증가에 큰 영향을 미쳤다. 프래지가 담임한 교회의 회중들 중 많은 사람들이 파혼했다. “나는 그들의 모습 그대로를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교회는 온전한 사람들의 위한 기관이 아니지요.”
진공청소기 선교회
필자가 라스콜리나스 교회 목사인 에드 영에게 그의 교회가 점점 계속해서 성장할 수 있겠는가라고 물어보았을 때, 그는 “우리가 점점 더 작아지는 한 그럴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이 선문답 같은 대답은 생각해볼 가치가 있다.
성장하는 교회들과 회중들은 부상하는 사업과 같아서 신축적으로 시장을 점유하고자 한다. 그들은 늘어나는 숫자를 자신의 가치와 동일시하며 교회건물을 신성시한다. 그러나 성장은 복음전파사역의 한 표현이기도 하다. 필자가 윌로우 크릭의 빌 하이블에게 그 교회의 외관상 드러나는 성장과 규모-매주 15,000명 이상이 예배에 참여한다-에 대해 놀라워하자, 그는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교회에서 차로 한시간 거리 안에는 200 만 명이 살고 있습니다. 사업상의 용어를 빌리자면, 우리는 단지 1%의 시장점유률을 지닌 것뿐입니다. 우리는 넘어야 할 산들이 아직 많이 남아있습니다.”
단지 개성있는 (차세대교회의-역자 주) 목사들만이 성장을 염두에 두는 것은 아니다. 오래 전에 뉴욕시에 설립되어 주류교단인 감독교회에 속해있는 성 바돌로매교회의 교구목사인 필 털리(Bill Tully)는 성장이 지니는 그 고유한 긴장감을 이해하면서 나라 전반에서 일고 있는 큰 교회들의 “회복운동”(restoration acts)을 주시하고 있다.
그는 어느 날 전자우편으로 내게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남겼다. “사람들은 소속되고 주위와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고자 교회로 나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이 클럽인 냥 지역모임들을 형성합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그들이 클럽들인 것처럼 대우하며 행동합니다. 그러나 클럽들은 성장을 반대하지요.” 계속해서 텔리는 말했다. “편안함에 만족하고 안락한 숫자를 유지하기 위해 일하는 것은 스스로 패배하는 것이다. 본래 그것은 정체된 것이며, 이는 곧 죽음이나 다름없다. 자라고 있는 교회는 그 교회가 추구하고 있는 바들에 대해서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성장하도록 도울까?’ 혹은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계속해서 전진하도록 돕는 것일까?’라는 질문을 던지게 될 것이다.
최근에 거대 교회들이 거대한 강당과 중앙홀, 식당과 분수대 등을 꾸밈으로써 세상적인 회합장소와 유사하게 느껴지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은행들과 대학들은 자신의 건물들을 고딕형식의 성당들처럼 보이도록 건축했다.) 매리너스나 윌로우 크릭 같은 교회 안으로 들어갈 때면, 사람들은 자신들이 회사본부나 큰 회의가 열리는 호텔 안에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위협적이지 않는 건물들을 마련함으로써 거대교회들은 교회 건물들 속에서 느껴지는 심리적인 부담이나 장애들을 없애주고 있다. 교회의 시설들을 많은 사람들에게 개방하여 모든 지역사회의 모임장소로 이용하도록 하는데, 이 시설들은 종종 그 지역에서 가장 훌륭하고 가장 큰 공간이다(윌로우 크릭은 시카고 전역에서 가장 넓은 강당을 지니고 있다-시의 교사 세미나 등을 위해 장소를 제공해 주는 일에 적극적이다-역자 주). 일단 사람들이 멋진 건물에 들어오는데 익숙해지다보면 보다 깊숙히 관여하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큰 회중은 결코 방해물이 아니라 시장확보를 위한 이점이 된다. 그들은 새로 오는 사람들과 구경꾼들과 호기심 있는 사람들(“찾아오는 이들”seekers이란 용어를 사용한다)에게 익명성을 제공하여 새로운 교회에서 편안한 느낌을 갖도록 도와준다. (지난 3월 필자가 버지니아의 한 작은 교회에 예배시작 바로 전에 들어갔을 때, 모든 사람들이 누가 들어왔는가를 보려고 고개를 내게로 향하였다.) 새신자들은 주목의 대상이기를 원치 않는다-물론 어느 일정한 시기에 이르기 전까지.
얼마전 윌로우 크릭에서 몇몇 새 교우들은 교회의 크기에 중압감을 느끼고 열심을 내는 몇몇 사람들조차 하나님을 위해 분주히 움직이는 거대하고 비인격적인 벌집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는 것이 불가능하였다는 보고가 나왔다.
이 문제를 살펴보면서 윌로우 크릭은 일반 세상에서 해결책을 찾았다. 거대교회에 관한 베스트셀러 비교인인 해리와 메리의 내면(Inside the Mind of Unchurched Harry and Mary)의 저자로서 윌로우 크릭의 지도자중 하나인 리 스트로벨(Lee Strobel)은 거대하고 비인격적인 기관들을 대중들이 불신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시키고 컨티넨털 은행 광고를 언급함으로써 그 개념들을 즐겨 설명하였다. 그 광고에서 컨티넨털 은행은 “그 안에 작은 은행을 가진 큰 은행”이라고 홍보하였다.
윌로우 크릭이 스스로에 대해 표현한 소그룹체제는 그리 크지 않은 교회에서도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모든 새신자들에게 평신도가 이끄는 10명 미만의 작은 조직모임에 참여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윌로우 크릭에서 작은 모임들을 지도하는 짐 멜라도(Jim Mellado)의 말을 빌리면, 그러한 작은 조직은 “교회생활의 가장 기본적 단위”이다. 윌로우 크릭에서 예배하는 15,000명 중에서 10,500명이, 그리고 다른 교회들도 그 정도 비율의 사람들이 소그룹-독신들이나 커플들을 위한 그룹들, 성별이나 나이에 따른 그룹들, 많은 지역모임들-에 속해있다. 나이든 사람들은 소그룹을 조직하여 50개의 진공청소기를 가지고 수마일이나 되는 교회 내의 강당과 복도들을 매일 밤 청소한다. 그 공감대가 무엇이든 지간에 모든 소그룹들은 성경공부와 하나님에 대한 토론-결국 교육의 핵심-을 포함한다.
이 그룹들의 향기(내적인 본질-역자 주)는 기독교적이지만, 그 겉모양은 사회적인 것이다. 실제적이지 않고 이상적일지 모르나 여러분들의 소그룹원들은 당신의 부모가 돌아가셨을 때나 새로이 이사간 아파트에서 짐을 풀 때, 혹은 당신이 갑자기 병원에 가야할 때나 아이들을 학교에서 데려와 줄 누군가가 필요할 때, 당신을 위해 이들이 당신의 자리에 있게 된다. 바로 그것이 관계이며 이웃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더 이상 가족이 없는 것 같이 보일 때, 바로 그들은 가족이 된다. 우리가 신화화하는, 적어도 소도시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보다 신중할 필요가 있다. 미네아폴리스의 한 교회에서 소그룹의 중요성을 강변하는 한 사람이 필자에게 “우리는 마을을 유지하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라고 말하였다.
거대함이라는 조류 속에서 소규모의 중요성을 강조해야할 필요성은 일련의 작업활동 영역들과 광고기획 등의 창의적인 팀들과 같은 경영묘책들 속에서, 그리고 백화점의 디자이너 부띠크나 출판사의 편집회의와 같은 마케팅의 기획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교회들이 교단들과 공식적인 유대를 유지하건 아니면 그 유대를 시작하려 하건 간에, 그들은 고객들의 주문을 받아들이고픈 충동을 반영함으로써 교회의 기관들로 하여금 고객들에게 보다 가까이 다가가도록 하며, 또한 그 기관들을 사람들이 쉽게 근접할 수 있고 거부할 수 없도록 하는 적당한 규모를 세워나간다.
세 번째 힘
이 교회들에 오는 사람들을 위해 제공되는 모든 소그룹들과 활동들은 살펴볼 때 우선적으로 두드러지지 않는 것은 이미 그 곳에 있는 사람들에 의해 제공되는 활동들이다. 주일학교에서 가르치고 화단을 가꾸고 꽃꽂이를 하며 헌금함을 돌리는 일 등은 일반적으로 개신교 교인들이 공식적으로 행하는 의무들이다. 그러나 차세대교회에 참여하는 정도와 강도는 전혀 다른 형태를 띄고 있다. 이들 교회는 비록 수많은 유임금 사역자들(윌로우 크릭에는 전임사역자가 약 200명 가까이된다)이 있다고 해도 실제로는 평신도들에 의해 기획되고 이끌어진다고 말할 수 있다.
놀라운 사실은 교회를 돌아가게 만드는 사람들 대부분이 자원봉사자들이라는 것이다. 몇몇 교회들은 다음과 같은 표어를 내건다. “-에서 여러분은 신호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떤 것이든 노래할 필요도, 어떤 것이든 말할 필요도, 어떤 것이든 줄 필요도 없습니다.” (즉, 당신이 준비되었을 때까지) 그러나 사람들은 비밀스런 악수(뒷거래가 있음)를 깨닫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적극적으로 활동하도록 기대되고 요청 받고 있으며 또한 그들 자신도 일하기를 원하고 있다. 윌로우 크릭에는 7-10명으로 구성된 1,400개의 소그룹들 만큼이나 이 그룹들을 이끄는 1,400명의 그룹인도자들이 중요하다. 이들은 팀 지도자들에 대해 책임이 있으며 이러한 책임선은 목사들에게까지 연결된다.
거대교회 운영상의 중요한 요소들 중 하나는 사람들의 은사를 잘 분별하여 그들을 교회의 다양한 사역들 중 필요적절한 곳에 배치하는 일이다. 교인수가 많아지면 질수록 교회의 사역도 더욱 야심차지며, 활동들이 더욱더 고객인 교인들의 요청에 맞춰 이루어지며, 사역들에 대해 많은 보상이 이루어지게 된다. 한 예로 윌로우 크릭은 자동차수선 선교회로 유명하다. 그 속에서 주말이면 전문적인 수리를 받을 형편이 않되는 교우들의 차를 수선해주며, 낡은 것을 잘 작동되도록 하며, 가난한 이들에게 차를 기부하기도 한다.
봉사는 그 자체가 보상이다. 하이블스는 필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자원자들에게 밤늦도록 교회바닥을 청소하게끔 할 수 있는 카리스마적 인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들 마음에서 무엇인가가 일어나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봉사의 은사를 가져다주는 것은 그들의 일상적인 일이 아닌 보다 의미있는 일을 하고자 하는 열망이다. 필자가 만나본 많은 사람들에 따르면, 사람들이 교회로 돌아갔을 때 그들이 비록 깨닫지는 못하나 자신들이 원하는 것은 단지 변화된 삶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기회이다.
가서 제자 삼으라
윌로우 크릭 커뮤니티 교회, 라스 콜리라스의 휄로우 쉽, 세들백 벨리 케뮤니티 교회, 매리너스 교회, 우드대일 교회, 갈보리 채플, 오픈 도어 교회, 조이 케뮤니티, 하우스 오브 호프, 게이크웨이 성당, 뉴 라이프 휄로우쉽.... 이러한 교회들을 어떤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이들 교회들은 교단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경우는, 이는 이 교회들이 교단에 속해있지 않기 때문이다. 차세대교회는, 독자적인 용기와 열성을 가지고, 교회가 속한 지역 고유의 재질로 지어진, 제구실을 다하는 집이다. 다른 경우는, 이 교회들은 어느 동떨어진 세상적인 단체(세상과는 떨어져 있는 일반교회들을 의미하는 것 같다-역자 주)에 충성심을 표하지 않는다. 아주 드문 경우이기는 하지만, 어떤 차세대 교회들은 그 자체를 교회라고 부르지도 않는다.
우드대일 교회에서 ‘침례’는 말이 빠져있다(원래는 침례교단에 속해 있으므로 우드대일 침례교회라고 불러야 되는데, 의도적으로 침례라는 단어를 삭제했다는 의미-역자 주). 그를 찾아갔을 때, 레이드 앤더슨(Leith Anderson)은 자신이 몇 년 전에 타겟으로 했던 대상들을 현재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지역 주민들 중에서 마구잡이로 선택된 그룹은 우드 데일 침례교회가 광대한(그런데 현재는 이미 이 곳도 교인들로 차고 넘쳤다-그 당시는 광대했었지만, 옮기자 마자 교인들이 너무 불어서 그 광대한 것이 광대한 것같지 않다는 의미이다-역자 주) 새로운 땅으로 이전하는 것과 관련되어 고려 중인 장소 명단에 반응할 것을 요구받았다. 미국 전역의 다른 곳에서와 같이, 그가 발견한 것은 교회 이름에다 ‘침례’라는 단어를 넣는 것은 비교인들에게는 가장 확실한 간선도로와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많은 차세대 교회들이 주류교단이나, 복음주의적 교단에 속해있고, 또 일부의 교회들은 보다 정통교단에서 성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 교회들이 자신들이 속한 교단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 것은 미국교회 생활에서 계속되고 있는 반란, 즉 교단에 대한 도전이다.
교단에 속하지 않는 교회들은 주당 7일 교회와 연결되어 생활하는 사람들의, 거대한 공동체를 짓기 위해 독자적이고, 창의적이며, 적극적이고, 경쟁적이며, 의도적인 방법을 채택하고 있다.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 이들 교회들은 스텝을 선정하거나, 예식, 경제적 지원, 그리고 지교회 인준 등에 있어서 교단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있다. 이중 극소수의 교회들만이 그 이름만으로도 교단을 구성할 수 있을 만큼 크고, 영향력이 있어, 이들 교회 자체적으로 목사들과 평신도 지도자들을 양성하며, 또 이들 교회들은 교회를 창립하며, 교회들을 자문하며, 그리고 자체의 비전을 출간하며, 새로운 추종자들을 찾는다.
필자가 만났던, 한 중서부의 감독교회의 감독은 후에 익명을 요구했는데, 그는 이러한 현상에 대한 대단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교단은 역사적인 예외입니다.” 이것이 그가 최근에 내게 한 말이었다. “매우 거대한 교회들이 새로운 관구들(dioceses)이 되고 있으며, 이들 교회들은 이러한 관구들을 만들기 위해서 당신의 수입을 많이 축내지는 않습니다.”
대형 교회 운동의 할아버지 교회들 중 하나인, 캘리포니아 주의 코스타 메사(Costa Mesa)에 있는 갈보리 채플은(이 교회는 “예수 사람들(Jesus People)의 집으로 시작했고, 때로 1960년대의 예수광으로 불렸다) 미국 전 역과 외국에 700 이상의 또 다른 갈보리 채플들을 세웠다. 그 중 40 개 정도의 교회에 수천 명의 교인이 모이고 있다. 갈보리 채플들은 만약 자신들이 그렇게 부르기를 원한다면 하나의 작은 교단이 될 수도 있다.
윌로우 크릭은 새로운 최초의 교단으로서의 보다 현대적인 예이다. 이 교회가 성장하고 그 명성이 교회 세계에 퍼져 나아가면서, 윌로우 크릭은 이내 당황해 했는데, 이는 그 예배와 선교회들에 모이는 사람들의 수에서뿐만 아니라, 이 교회의 성장 스토리를 듣고, 그 방법론을 배우고, 지혜를 얻기 위해 세계에서 몰려든 목사들과 교회 장로들의 수에 있어서 그러했다.
이들 전문 직업인 구도자들을 처리하기 위해, 윌로우 크릭은 60 개 이상의 교단(무교단 포함)에서 온 교회들을 모아 윌로우 크릭 어쏘시에이션(Willow Creek Association)이라는 일종의 parachurch 조직을 설립했는데, 그 교회 수는 현재 1,700 개 정도에 이른다. 이 세미나에 참석한 지도자들과, 목사들, 그리고 장로들의 수는 수 천 명에 이르는데 이들은 계속 교육을 받고, 뉴스레터(이 교회에서 발행하는 정기 간행물-역자 주), 서적들, 오디오 테이프, 비디오 테이프들로부터 도움을 받기 도하고, 하이블스와 그의 스텝들의 특별 자문을 받기도 한다. 고객(세미나 참석자들-역자 주)들은 윌로우 크릭 교회의 케페테리아에서, 윌로우 크릭이 발전시켜 온, 예배 시 단막극 사용에서부터, 비교인들을 전도하기 위해 소그룹을 조직하는 FDFX를 발전시키는 개념과 전략과 자료들을 챙긴다. 이것은 바티칸이 아니다. 윌로우 크릭, 새들백, 우드대일, 그리고 소수의 다른 교회들과 같은 대형의 “가리키는 교회”들은 수강생들에게 주문을 받아 만들어 시장에 접근할 필요성을 강조한다. 많은 작은 윌로우 크릭이 만들어진 것을 원치 않다는 것을 또 목사들이 행하고 있는 방법과 윌로우 크릭이 행하고 있는 방법 사이의 차이를 자발적으로 연구하라는 것을 빌을 강조하고 있다.(경매에 붙여진 큰 소년이 되는 것이 항상 재미있는 것은 아니다: 하이블스의 인터뷰를 다룬 Christianity Today의 표지에 빌의 전면 사진과 함께 다음과 같은 글이 쓰여져 있었다. “ 하나님의 집을 팔고 있는가?”)
가르키는 교회들은 또한 레이드 앤더슨에 의해 설립된 Teaching Church Network과 같은 기관과, 봅 버포드에 의해 설립된 Leadership Network와 같은 기관을 통해 교파를 초월하여 서로간의 전략과 교훈 등을 나눈다. Leadership Network가 사용하고 있는 방법 중 하나는 NetFax인데 이것은 브리핑들, 조그만 예고 광고들, 목록들, 그리고 피터 드루커(Peter Drucker), 켄 브랜차아드(Ken Blanchard), 릴 셀러(Ryle Schaller), 그리고 알빈 토플러(Alvin Toffler)와 같은 학자들로부터 구할 수 있는 인용 가능한 인용들로 편집된 한 페이지짜리의 시리즈로서, 정기적으로 3,800 명의 목사들과 지도자들에게 제공되고 있다.
“사실은 이들 대형교회들은 그 교회들이 속한 교단 교회들과 공동의 관심을 공유하는 것보다는, 교단을 초월하여 이들 대형 교회들 서로가 공동의 관심사를 주고받는 경향이 더합니다.” 지난 여름 어느 주일에 세 번째 예배를 참석하러 가기 위해 프리웨이로 차를 몰고 가면서 버포드가 내게 말했다.
기존 개신교단들과 마찬가지로 이들 대형 차세대형의 대형교회들에 있어서도 중요한 것은 이들 교회들이 자체적으로 목회자 스텝들을 양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 교회들은 매 5년마다 노회에서 파송(혹은 임명)하는 목회자를 선택하기보다는 교회들 자체의 이미지로(그들이 사용하지 않는 다른 단어인) 최고의 성직자들을 임명하고 성직을 창조한다.
차세대 교회의 목회자들은 일부의 제한된 학문적인 신학교 교육을 받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이들 교회와 함께 한 그날부터 이들의 실제적 교육은 시작되었고, 그 과정에서 성장이 시작되었다. 이들 교회에서 널리 행해지는 신학들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가장 전적으로 헌신된 제자란 삶의 변화와 신앙생활을 위해 자기의 직업을 포기하고 목회자가 된 사람이다. 스텐포드 M.B.A를 포함하여, McKinsey & Company의 자문직과 항성 궤도 전문가직을 버렸던 그렉 호킨스(Greg Hawkins)와 U.S 일간신문(The Chicago Tribune-시카고의 이대 신문 중 하나-역자 주)의 유일한 리포터며 편집자였던 리 스트로블과 같은 사람들에 의해 윌로우 크릭을 이끌어 가고 있다. 이들은 종교지도자가 되기 위해 자신의 직업을 버렸던 것이다. 드루커는 그러한 항성궤도들을 대형교회의 전형이라고 여기는 것 같다.
이들 새 목회자들은 교회의 스텝들과 함께 사역하거나, 어떤 교회를 설립하는 일을 이끌기도 하는데, 새로운 공동체를 섬기는 것은 지리적이며, 성장하는 소수인들을 섬기는 것은 인종적이며, 새로운 세대들을 섬기는 것은 인구통계학적이다. 우드대일 교회를 나사기 전에, 레이드 앤더슨은 내게 ‘새로운 교회를 형성하기 위한 본질적인 지식과 기술을 지닌 핵심 그룹을 위하여 부모 교인들을 모으는 “사냥허가증”이 지명된 목사에게 주어집니다’라고 내게 말했다. 우드대일의 앤더슨과 다른 교회의 스텝들은 최근에 다른 교단 내에 첫 번째 교회를 설립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우리는 교단을 만드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어느 날 저녁, 세인트 폴(St. Paul)에서 자신의. 아내와 함께 저녁식사를 마치면서 필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 있는 것입니다.”
정신을 차려야 하지 않을까?
필자는 지난 봄 선구적인 교회 컨설턴트이자 메릴랜드의 베데스다에 있는 에큐메니칼 Think tank인 The Alban Institute이 설립자인 로렌 메드(Loren Mead)와 전화대화를 나누었다. 메드는, 1960년대와 70년대 당시에 현대적 예배의 개척자로서 유명했던 워싱턴 소재의 한 감독교회에 자신이 출석했던 경험을 말해주었다. 한 워싱턴 인과 감독교회 교인으로 나는 그 교회를 소리를 대신하는 키타들, 주인을 대신하는 오곡 빵, 그리고 서제들의 부정에 항거하는 용감한 종교개혁자들로 기억하였다.
그 당시 나는 Phollips Exeter Academy의 학생이었으며, 네 친구들과 나는 오래된 학교 교회에서 실험적인 예배를 만들고, 이끄는 일에 연루되어있었다는 사실을 메드에게 말해주었다. 교목인 에드워드 스톤 글리슨(Edward Stone Gleason)에게서 받은 도전은 60년대에 자발적으로 예배에 참석할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사춘기인 우리의 동료 학생들에게 도달하여, Exeter의 거의 200년 된 필수적으로 예배에 참석해야하는 속박에서 해방되었다. 교회의 ‘집사들’로서 우리들은 비틀즈의 노래를 부르거나 사무엘 베케트의 연극 장면을 연기하고,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성경들을 무릎에서 떨어트리면서 예배에 참석한 학생들을 편하게 해 주려고 노력하였다. 우리가 그렇게 하였고, 학생들 중 일부가 예배에 참석하였다.
그러나 메드와 나- 그리고 글리슨 역시- 18 세기의 찬송가와 스테인드 글라스 창과 우리가 아무 생각없이 암송할 수 있는 아름다운 기도문들은 가진 전통적이며, 구식 교회에 오래 전에 돌아갔다. 메드와 나는 우리가 방문했던 megachurch에서 들은 현대 음악들에 대해 전화로 의견을 주고받았다. “나는 그 노래를 좋아할 수 있습니다.” 메드는 말했다. “그런데 분명 오랫동안 좋아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것은 마치 Top Forty(일정 기간 베스트 40에 오른 곡들)과 같아요.” 메드는 자기가 돌라간 워싱턴의 전통적인 교회에서 편안함을 느끼고 있다. 그는 말했다. “저는 친밀함이 좋습니다. 교회에 가는 것이 어느 정도는 집에 가는 것 같아야 합니다.”
나라 전역을 다니며 차세대 교회를 보고 탄복했던 한 구식의 감독교회 교인으로서 나는 삐걱거리고, 게으르며, 불명료하며, 자기 만족적이고, 그리고 때로는 금지되는, 그러한 내 교회에 대한 보다 조급한 느낌으로 리포트를 작성하고 돌아왔다. 전도의 내적 논리에 대한 새로운 고마움을 가지고 왔다. 복음주의자들이란 성도들을 자라게 하고, 하나님의 시장을 넓히고, 새 기독교인들을 전도하여(spawning, 혹은 양산하고), 이들을 성숙한 신앙과 봉사의 삶으로 이끄는 일에 전력하는 이들이다. 차세대 교회의 지도자들과 교인들은 기꺼이 위와 같이 말하고, 이에 따라 행하는데, 이런 행함은 전통적인 감독교회의 교인인 나의 교우들을 놀라게 할 것이다. 나와 같은 구식 교회의 교인들에게 교회는 우리와 믿는 것과는 다른 것을 믿는 이들에서부터 안전함과 자신들에게 전정(前定)된 확신들과 신앙을 나눌 다른 사람들을 모색함으로서 자신들의 전정된 화신들과 신앙대로 행해야 한다는 압박감으로부터의 안전함을 제공해 준다. 다른 말로 하자면, 외출이 금해진 공동체이다. 친숙하고 안전한 주변환경 속에서 우리는 편안함을 취하며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소유하려는 것만큼 주는 것이 중요하듯이 그렇게 중요한 그 어떤 것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이나 아니지....?
나는 megachurch의 교인이 되기에 적절한 사람은 아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괴퍅한 노인들과 함께 나는 1979년에 Book of Common Prayer을 보다 지적이며, 이 보다 지적인 언어를 보다 많이 포함시켜 표현하여 만들어진 이 기도책자의 온화한 변화를 탄식했다. 나는 나의 도시에서 가장 멋진 오르간과 성가대, 그리고 음악 지도자를 가진 한 아름다음 전통적인 오랜 석조 교회에 출석하고 있다. 나는 주일날 아침 오래된 찬송가를 크게 부르고, 신앙공동체의 생활 속에서 은혜의 순간을 경험하기를 갈망하며 무릎꿇고 기도하는 것과 같은 몇 개의 것들을 따스하게 여긴다. 그러나 나는, 메드의 지적처럼, 우리가 지금 우리보다 젊은 이들에게 외국어를 말하고 있지 않은지, 또 나의 교회는 고사될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이 아닌가, 또 만약 내 교회가 이내 정신차리지 않는다면(get intentional), 고사할 운명에 처하는 것이 당연하지나 않을까 하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