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잘 아는 의사 한 분이 나에게 긴급히 상담을 요청하였다. 그분은 본래 기독교 신자가 아니었으나 뇌성마비 아들을 낳고 나서 그를 위하여 기도하면서 신앙을 얻게 되고, 새로 발견한 기독교 진리를 더 깊이 알기 위해 틈나는 대로 신앙서적을 읽으면서 기도하여 온 분이다. 나는 나의 아내와 함께 그 분의 집으로 초청받고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는 당혹스러워 하면서 자기 아내를 상담해 달라고 부탁한다. 그들 부부는 강남에서도 은혜로운 교회라는 소문이 나 있는 B 교회에 2년간 출석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자기 아내가 더 이상 교회에 나갈 수 없다고 하면서 기독교 주요 교단들이 이단이라고 정죄한 모 집단에 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아내는 부부간에 신앙이 다르면 부부금슬도 좋지 못하게 된다고 하면서 남편도 B교회를 그만 두고 그 집단에 함께 나가야 한다고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 그 아내가 남편에게 준 최후통첩(?)은 이번 주말까지라는 것이다. 그 의사는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자기 아내와 함께 이 문제를 상담해 달라는 것이다.
나는 그 분의 아내에게 그 집단에 나가게 된 과정을 이야기하게 했다. 그런데 그녀의 첫 마디는 B 교회에 2년간 나가면서 너무 큰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이제는 양심의 가책을 받아서 더 이상 그 교회에 나갈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이 말을 듣고는 눈을 크게 뜨고 그녀의 얼굴을 쳐다 볼 수밖에 없었다.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받아 더 이상 그 교회에 나갈 수 없다는 말이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렇게 설명하였다. B 교회 담임목사님은 대단히 설득력있게 설교하시는 분이어서 무슨 제목으로 설교하든지 교인들은 감동을 받아서 아멘으로 화답하고 설교의 말씀대로 살기로 결단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전도하라”는 제목으로 설교했으면, 그녀는 이제까지 전도하지 못한 것을 회개하고 이제부터는 전도하는 사람이 되어 하나님께 영광 돌리겠다고 결심하고 하나님께 약속한다. 그러나 집에 돌아오면 집안 일에 바쁘고 세상살이에 바빠서 하나님께 약속한 전도는 한번도 못하고 다음 주에 교회에 나간다. 그 주에 다시 “사랑은 허물을 덮어주는 것이다”라는 주제로 설교했으면 이 설교를 듣고 이제까지 덮어주지 못한 죄들, 비판하고 비난한 죄들, 정죄했던 모든 죄를 회개하고 이제부터는 덮어주는 사람이 되어 살겠다고 하나님께 약속한다. 그러나 다시 일주일을 사는 동안에 덮어주기 보다는 비판하고 정죄하는 삶을 살다가 다음 주에 교회에 나간다. 그녀는 교회 나갈 때마다 하나님께 약속한대로 살지 못했기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받고 그러한 일을 2년동안 계속하는 동안에 이제는 그것이 스트레스가 되어서 자기 마음을 짓눌러 고통스럽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의 가까운 친구의 강권으로 이단이라고 정죄받은 집단에 처음 참석했는데 그 곳에 가니 “~하라!” “~살아라!”하고 성경을 가르치지 않고 상처받은 마음들을 위해 뜨겁게 기도해 주고 하나님은 명령하는 분이 아니라 돌보고 지탱해주고 감싸주고 위로해 주는 분이라고 가르쳤다. 그녀는 이곳에서 스트레스가 몸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경험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초월하신 하나님이 자기에게 찾아와 자기를 만나주시고 그분의 사랑이 자기 속으로 가득채워져 오는 기쁨을 맛보았다. 그녀는 이 집단에 참석할 때마다 평화와 기쁨을 얻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나에게 질문했다. “예수님이 정말로 사랑과 용서와 평화의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바로 이 집단이 예수님이 살아계신 곳이 아닙니까?”
I. 한국교회와 이단
1. 개인주의적인 신앙
이 여인은 개인주의적인 신앙이해를 가지고 있다. 그녀는 교회에는 나가지만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예배에 참석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교회에 봉사하지도 않고, 교인들과 함께 활동하지도 않고 구역회에 참여하지도 않았다. 그녀의 주위에는 그녀를 지탱해주고 그녀를 위해 기도해줄 믿음의 식구들이 없었다. 주일마다 양식을 받아먹지만 영적인 고아가 되어서 외톨이 신앙생활을 해왔다. 그가 은혜받았다는 것도 말씀에 도전을 받았다는 것에 불과하다. 아무리 음식을 맛있게 먹어도 외톨이의 삶은 언제나 쓸쓸하고 힘이 없고 넘어진다. 그런데 그녀가 친구와 함께 모집단에 참석하였을 때 친밀한 이웃을 발견한 것이다. 자기를 지탱해주는 이웃을 발견한 것이다. 그녀는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느꼈다. 십자가의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받는 수직의 측면을 잃어버리면 방향을 상실한다. 그러나 아무리 수직의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녀처럼 수평의 측면, 즉 믿음의 이웃과 신앙 공동체의 적극적인 지원이 없으면 신앙은 성장할 수 없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개인주의적으로 신앙을 이해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과 성령님의 사역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단순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믿음은 삼위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라고 생각한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면 구원을 받는다.” 이것은 진리이다. 그러나 이것은 개인주의적인 신앙의 문을 열어놓을 수 있다. 한국교회는 성부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와 예수님의 구속의 사역과 성령님의 은사와 교통하심에 대한 굳건한 신앙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런데도 이단이 등장하면 쉽게 그 이단에 빠지는 사람들이 생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개인주의적인 신앙의 문이 크게 열려져 있기 때문이다.
개인주의적인 신앙은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나’ 개인에게 응답하시고 역사하시는 것으로 생각한다. ‘나’가 개인적으로 마음에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임하시고 나에게 복을 주시리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인간 ‘나’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나에게 은혜를 주시기도하고 복을 주시기도 한다. ‘나’가 열심을 가지고 주님을 섬기며 마음에 하나님의 선한 창조와 예수님의 구속의 사역과 성령님의 역사를 믿는다면 하나님은 나를 구원하실 것이다. 나의 구원은 나의 믿음의 결단에 달린 것이다.’ 이것이 개인주의적인 신앙의 문을 열고 들어선 사람들의 생각이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개인들에게 믿음의 삶을 살도록 권면한다. 개인들이 열심을 내고, 개인들이 영성을 훈련하고, 개인들이 자기의 신앙에 책임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교회의 목회와 가르침도 개인들이 진리를 깨닫고 결단하여 열심으로 신앙생활을 하여야 한다는 점에 중점을 두고 있다. 이런 가르침을 받는 신자들은 자기의 열심이 자기의 신앙을 좌우한다고 생각한다. 신자들은 자기의 신앙을 점검하기 위하여 자기가 얼마나 열심히 노력하고 있으며, 자기의 마음에 얼마나 강력한 확신을 가지고 있으며, 자기가 얼마나 힘을 다하여 예수님의 모델을 본받아 살려고 힘쓰고 있는가를 살핀다. 신자들은 예수님을 바라보기 보다는 자기를 바라본다. 그리고 성도들은 우리 가운데 임재하신 하나님의 성령님의 역사를 기대하기 보다는 자기의 열심과 깨달음과 실천을 중시한다. 개인주의적인 신앙은 결국 인본주의로 떨어질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개인주의적이면서도 공동체적이다. 우리는 개인적인 결단과 실천을 결코 과소평가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공동체적인 신앙의 바탕위에 굳게 서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개인들에게 직접적으로 은혜를 베푸시기 보다는 믿음의 공동체를 통하여 은혜를 베푸신다. 하나님의 은혜를 거대한 생명의 저수지로 비유한다면 개인의 신앙은 그 저수지의 생수를 받아서 자라나는 논의 벼에 비유할 수 있다. 저수지의 물이 논에 있는 벼에게 생명을 공급하기 위해서는 수로라는 통로가 필요하다. 수로가 없이는 저수지의 물이 논에 이를 수 없다. 그리고 수로에 물이 흘러 간다고 할지라도 그 밭에 물고를 트지 않으면 물이 그 논으로 흘러들어가지 않는다. 저수지의 물이 논에 생명을 공급하기 위해서는 수로와 물고가 필요하듯이 하나님의 은혜의 생수가 개인에게 흘러 들어가기 위해서는 믿음의 공동체라는 수로와 물고라는 개인의 결단이 꼭 필요한 것이다.
사도신조는 8가지 신앙을 고백한다. 처음 세가지는 성부, 성자, 성령을 믿는다는 고백이다. 그리고 마지막 세가지는 죄사함과 부활과 영생을 믿는다는 고백이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은 우리에게 죄사함과 부활과 영생을 선물로 주신다. 그런데 중간의 두가지는 바로 삼위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세가지 선물을 주시는 통로를 고백하고 있다. 그것은 거룩한 공회와 성도들 상호간의 교통이다. 삼위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공교회를 통하여, 그리고 성도들의 교제를 통하여 구원의 은혜를 사람들에게 베푸신다. 이것은 우리가 모일 때마다 고백하는 사도신조이다.
우리는 성경말씀을 통하여 이것을 더 확실하게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과 예수님을 핍박하고 있는 사울을 구원하시려고 계획하셨다. 예수님은 대제사장의 공문을 가지고 다메섹으로 그리스도인들을 잡으러 가는 사울에게 나타나셨다. 예수님은 그 사울에게 빛을 둘러 비취시고 말씀해 주시고 당황하며 혼란에 빠져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섰는 사울에게 다메섹으로 들어가라고 지도하신다. 그러나 사울이 예수님을 만났을 때에는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받지 못했다. 오히려 사울은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에 눈이 보이지 않게 되었고 땅에 꺼꾸러져야 했고 3일 밤낮을 먹지도 못하고 마시지도 못하는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예수님은 사울을 만났으나 사울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베풀지 않았으며 하늘의 복을 선물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일부러 다메섹에 가셔서 믿음의 사람 아나니아를 만나서 사울을 찾아가서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고 성령으로 충만케하라고 부탁하고 있다. 사도행전 9장 17절을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가로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예수님은 드디어 사울의 어두운 눈을 치료해 주시고 성령으로 충만케 해 주셨다. 그러나 아나니아는 이렇게 말한다.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케 하신다.” 사울을 치료하고 사울에게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시는 것은 분명하게 예수님이시지만, 예수님은 이것을 직접하시지 않고 아나니아를 통하여 하신다. 아나니아는 예수님의 치료와 성령충만의 통로가 되고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다. 하나님은 은혜의 저수지이지만 교회와 믿음의 사람이라는 통로를 거쳐서 사람들에게 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신앙을 성장하고 영적으로 성숙하는 데에 있어서 믿음의 사람들과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의 역할은 필수적이다. 하나님은 교회를 세상에 세우셨을 뿐 아니라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우셨다. 사람들은 교회에서 그리스도를 만나며, 교회에서 그리스도와 교제하며,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은혜와 복을 받는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들, 즉 교회공동체는 이 세상에 현존하는 그리스도의 지체요 그리스도의 몸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만남이 없이는 진정한 신앙에 있지 못할 것이다. 그리스도를 만남은 교회를 만남이요, 그리스도와 교제한다는 것은 믿음의 사람들과 교제함이다.
위에 언급한 성도는 예배를 드리기 위해 예배당에는 가지만 믿음의 공동체와 만남은 단순히 예배를 드리는 순간으로 끝이 나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예배를 통하여 실날 같은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받지만 그 이상의 발전은 하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개인주의적으로 신앙을 이해하여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를 믿지 않기 때문이다. 믿음의 공동체의 지원과 믿음의 사람들과의 교제가 없는 신자들은 마치 고아와 같아서 그에게 약간만 따스한 정을 보내도 그곳으로 빠지고 만다.
2. 인본주의적 신앙
위의 사례의 B는 교회에 출석하여 예배를 드리면서 목사님의 설교에 많은 은혜를 받았다고 말한다. 그녀는 목사님은 매우 설득력 있게 설교하여 성도들이 그 설교를 듣고 나면 이제까지 자기의 잘못 살아온 것을 회개하는 마음이 생기고 앞으로 최선을 다해 그 말씀에 순종하여 살고자 하는 결심을 가지게 된다고 고백하고 있다. 이러한 고백은 한국교회가 얼마나 인본주의적인 교회가 되어 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인본주의는 하나님 없는 신앙이다. 인본주의는 인간의 정신을 깨우치고자 한다. 인본주의는 인간의 최선의 노력으로 이 땅위에 의와 선을 이루려고 한다. 인본주의는 자기 자신의 문제를 바라보고 자기의 가능성을 점검하고 자기의 결단과 실천에 먼저 관심을 집중한다. 인본주의는 인간의 정신을 일깨워서 인간 스스로 결단하고 최선을 다하여 선을 이루어야 된다고 가르친다. B는 목사님의 설교를 들을 때마다 자기의 영이 깨우침을 받았다고 말한다. B는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서 그 말씀을 실천하여 살고자 작정했으며, 자기가 결심한 대로 일주일간 살지 못했기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고 말한다.
그 목사님의 설교는 사람들의 영을 깨우쳐서 그들의 마음 가운데 말씀을 순종하여 살고자 하는 갈망을 일으켰으며, 성도들에게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이루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 목사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예수님을 따라 사는 것이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임을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사람들의 정신이 일깨워지고 진정한 마음으로 결단하고 최선을 다해 살려고 노력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 땅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는” 것이다.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에게 그것을 실행할 수 있게 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 이 땅 위에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 목사님은 사람의 영을 일깨우는 일보다 먼저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으로 충만하게 하는 일에 집중하여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는 인본주의적인 신앙이 지배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교회의 거의 모든 설교와 가르침과 성도들의 의식 속에는 진리를 깨달아 알아야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 이것은 인본주의적인 믿음이다. 인본주의적인 믿음을 가진 교회와 목사와 성도들은 예수님의 이야기 보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즐겨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중요한 목회자 전문잡지 하나에 소개된 우리나라에서 가장 각광받는 목회자 한 분의 설교를 예로 보자. 그는 곤고한 날을 사는 지혜라는 제목의 설교에서 대지를 셋으로 나누었는데, 첫째는 ‘곤고한 날도 하나님이 주셨다고 생각하여야 합니다.’ 이고 둘째는 ‘곤고한 날이 올 때에는 유익한 것을 생각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세째는 ‘곤고한 날에는 기도하여야 합니다’ 이다. 그 목사님은 곤고한 날에 인간들이 무엇을 하여야 하는가를 아주 설득력 있게 이야기하고 있다. 그 목사님의 의도는 사람들의 마음을 일깨우는 것이다. 그 목사님은 사람들에게 그런 마음을 가지게 하고자 설교하고 있다. 그 목사님은 인간의 노력으로 곤고한 날을 넘겨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물론 하나님께 기도하여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으나 그것도 인간들이 하나님께 기도하여 하나님의 응답을 촉구하는 인간중심의 이야기일 뿐이다.
이단집단들은 영적인 직접성을 신도들에게 제시하고 있다. 대부분의 이단들은 이단에 가입하는 사람들에게 초월적인 실재와 직접적이요, 신비적인 만남을 격려하고 그 방법들을 제시한다. 이단의 교사들은 신도들에게 우리의 일상적인 체험과 감각을 뛰어넘는 신적인 실재들과의 만남을 구체적인 방법을 통하여 직접적인 체험을 할 수 있게 도와 준다. 바로 이런한 영적 직접성, 또는 초월적인 실재와의 만남은 한국교인들에게 매우 친숙한 현상이다. 예컨대 1907년의 대부흥운동을 필두로 하여 한국교회는 부흥운동을 통하여 성도들에게 영적 직접성을 체험하도록 격려해 왔으며 실제로 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영적 직접성을 체험하였다고 고백하여 왔다.
그러나 오늘 수 많은 교회들이 영적인 직접성을 잃고 지성주의, 도덕주의, 인본주의적 주장을 되풀이 하며 우리의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빛으로서의 사명을 다하여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한국교회의 문제점들은 기도원운동, 성령운동, 은사운동 등 뜨거운 체험주의를 이 땅에 불러 들였으며 여기서도 만족을 얻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단집회에서 영적인 초월을 경험하고자 한다.
3. 공동체가 없는 신앙
하나님의 성령님은 위에서 언급한 바 대로 공동체와 믿음의 사람이라는 통로를 거쳐서 사람들에게 임하시지만 동시에 그 성령님은 성도들의 교제를 통하여 성도들을 지탱하고 돌보신다. 하나님의 아가페의 사랑은 하나님이 직접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들인 교회와 성도들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자기의 사랑을 전달하신다. 그러므로 자기의 주위에 믿음의 공동체가 없으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통로가 없어져 버린다. 그리고 믿음의 공동체가 없이는 하나님의 돌보심과 지탱을 받을 수 없다.
위의 B성도는 교회에 열심히 출석하여 예배를 드리고 있지만 그녀를 지탱해 줄 수 있는 친밀공동체가 없다. 그녀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며, 그녀에게 합당한 가치를 인정해 주고 그녀를 지탱해주고 적극적으로 그녀를 돌보아 줄 수 있는 믿음의 공동체가 그녀에게는 없었다. 그런데 친구를 따라 이단집단에 가자 그곳에서는 그녀가 맛보지 못했던 친밀한 관계를 만날 수 있었다. 이것이 자석이 쇠를 끌어 당기듯이 그녀를 그 집단 속으로 끌어 당긴 것이다.
친밀공동체는 1) 사람들의 속에 감추인 것들과 쌓인 것들을 털어놓아 서로 나눌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2) 친밀공동체는 그들의 어떤 신분의 사람이든지, 그들이 어떤 과거가 있든지 상관없이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용납한다. 3) 친밀공동체는 삶의 위기와 새로운 삶으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불안과 문제들을 카타르시스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4) 친밀공동체는 소속감을 충족시켜주며 지탱하고 돌보는 일을 한다. 수많은 사람들은 이런 친밀공동체를 갈망한다. 신자들은 적어도 교회가 이런 친밀공동체를 제공해 줄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그들은 교회에서도 이런 공동체를 찾지 못한다. 그런데 B성도는 이단집단에 가는 바로 그날 이런 친밀공동체가 거기 있음을 발견하고 감격한다. 그녀는 살아계신 하나님은 만나기 전에 사랑으로 감싸주고 돌보아주는 인간들의 공동체를 만난 것이다. 그는 거기에서 교회가 열심히 가르치기는 하지만 실제로 제공해 주지는 못하는 친밀공동체를 경험하고 거기에 빠지게 된 것이다.
II. 어떻게 이단에 대처할 것인가?
1. 성경의 신앙을 회복하자.
한국출신으로 미국 장로교회 총회장이 되었던 이승만 목사는 취임감사예배에서 “back to the basic" 을 강조하였다. 그는 자기가 미국 장로교회 총회장이 된 것은 자기를 통하여 미국교회에 하시고 싶은 일이 있기 때문이라고 확신을 가지고 이야기했다. 하나님은 지금 타락한 세상의 고난을 경험한 사람, 그리고 그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의 은혜를 몸으로 체험한 사람을 통하여 미국교회에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려주고자 하신다는 것이다. “지금 미국교회는 학문적으로 실천적으로 앞서 가는 교회 가운데 하나이지만 그들에게는 지금 복음의 본질, 즉 예수님의 이야기가 사라져 가고 있다. 미국교회는 복음의 본질로 돌아가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나 같은 사람을 세워서 복음의 본질을 이야기하게 하려고 계획하셨다.”
미국의 한 목사가 한국교회에 와서 한국교회의 부흥을 배우기 위하여 한달을 보냈다. 그리고 미국으로 돌아가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한국교회는 곧 쇠퇴할 것이다. 그 이유는 한국교회에서 예수님의 이야기가 사라져 가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말을 듣고 한국교회의 설교, 교육, 행정, 목회, 상담, 전도 등등을 점검하면서 그 목사의 말의 진위를 찾기 위하여 조사하였다. 결론은 그 목사가 한국교회를 제대로 보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국교회는 이승만 목사가 주장하는 대로 “back to the basic", 즉 복음의 본질로 되돌아 가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단들은 복음의 본질을 상실해 가는 한국교회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 오고 있는 것이다. 성경의 신앙을 회복하는 것이 이단을 대처하는 첫 번째 길이다.
1) 성경은 삼위 하나님을 증거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수 많은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을 발견하기도 하고, 인간들이 마땅히 따라 살아야할 윤리와 도덕적인 교훈들을 듣기도 하고, 저주에 빠진 인간들이 기도와 헌신의 삶을 살므로서 하나님의 복을 받아 행복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읽는다. 우리는 또한 성경 속에서 우리에게 유익을 주는 정보들을 발견하기도 하고, 마땅한 인간의 도리를 이야기하는 진리들을 깨닫기도 하고, 인생의 길과 목표와 삶의 구체적인 지침과 지식들을 찾아내기도 한다. 그것들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것들은 성경이 증거하고자 하는 중심이 아니다. 그런 것들은 변두리에 불과하다.
성경말씀이 증거하고자 하는 것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이시다. 성경은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를 증거한다. 성부 하나님은 이 세상을 선하게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사람들과 그외의 모든 하나님의 피조물들을 사랑하시고 그들을 위한 아름답고 멋진 계획을 가지고 계신 분이시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들을 향하여 사랑의 계획을 가지고 일하시는 분이시다.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언제나 하나님의 사랑과 그분의 우리들을 향하신 아름답고 멋진 계획들을 발견하고 그것들을 전달하여야 한다. 이것이 교회를 세우신 하나님의 목적이요, 사역자들을 세우신 뜻이다. 교회와 믿음의 사람들의 언어와 가르침과 설교와 목회와 모든 활동 속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와 사랑의 계획들이 드러나야 할 것이다.
성경은 칼빈이 말씀한 대로 예수님을 증거하는 책이다. 구약성경은 오실 예수님을 증거하고 신약성경은 오신 예수님을 증거한다. 칼빈의 지적대로 성경을 읽으면서 예수님을 발견할 수 없다면 그것은 성경을 읽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선하게 창조된 세상이 타락으로 사탄의 세상으로 변하는 것을 보았다. 하나님은 사람들과 피조물을 향하신 사랑의 계획이 사탄의 시험과 세상의 유혹과 죄의 정욕으로 말미암아 끊임없이 좌절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성부 하나님은 성자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선한 창조를 회복하고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랑의 계획을 완성하기 위하여 오신 분이시다. 성경은 예수님이 가는 곳마다, 예수님이 머무는 곳마다, 그리고 예수님과 만나는 사람들마다 사탄과 세상과 죄의 사슬에서 해방되어서 하나님이 계획하시는 풍성한 삶을 살게 되었다고 증거한다. 예수님은 그 일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계획을 단번에 성취하셨다. 성경은 이 예수님을 증거하는 책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목회와 설교와 가르침과 활동 속에는 예수님의 이야기로 가득해져야 할 것이다.
예수님은 성령님을 약속하셨다. 예수님은 성령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와 영원토록 함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성경은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의 성령님을 통하여 성취하신다고 가르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님을 보내어 하나님의 꿈과 계획을 이루시는 분이시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성령님은 우리에게 오셔서 예수님을 증거하신다. 성령님이 오시면 누구든지 예수님을 자기의 구세주로 고백하고 예수님을 자기의 주님으로 영접하여 그분을 따라 살고자 한다. 성령님은 우리들 가운데 오셔서 성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단번에 이루신 하나님의 사랑의 계획을 깨닫게 하고 받아들이게 하고 그것을 우리의 삶에 적용시켜 나가신다. 성경을 이런 일을 하시는 성령님을 증거한다.
한국교회는 성경의 중심을 보아야 한다. 우리의 모든 목회활동 속에 삼위 하나님이 증거되지 않는다면 언제든지 사탄은 그 틈새를 노리고 이단들을 침투시킬 것이다.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을 할 것인가?”를 이야기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셨는가?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시고 있는가? 그리고 우리를 위해서 무엇을 해 주실 것인가?”를 전달하여야 한다. 이것이 성경의 중심이다. 삼위 하나님의 이야기가 가득한 곳에 어떻게 사탄이 틈을 노릴 수 있겠는가?
2) 성경의 하나님은 교회를 통하여 역사하신다.
하나님은 구약시대에는 종들을 불러서 그들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세와 다윗과 여러 선지자들을 불러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고 그들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자기의 사랑과 계획을 전달하셨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성육신하여 세상에 보내시고 그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신다고 가르친다. 이것을 히브리서는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히.1:1,2).
옛적에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불러서 종을 삼으시고 그들을 직접 대면하여 하나님의 사랑의 계획을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종들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오셨다. 그러나 이 모든 날 마지막에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통하여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선한 창조를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사람들과 피조물들을 향하신 사랑의 계획을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계시가 되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3일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셨다. 우리는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재림하여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는 그 어간에 살고 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 기간 동안에 교회를 통하여 말씀하시고 역사하신다고 가르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교회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에도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믿음의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지체이다. 하나님은 지금 그리스도의 몸과 지체들을 통하여 사람들을 만나시고 말씀하시고 역사하신다. 몸이 있는 곳에 그 인격이 존재하며, 지체가 하는 일은 그 인격을 대변하여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를 성령님의 전이라고 부른다. 그리스도의 지체인 믿음의 사람들은 예수님이 사용하시는 만남의 수단들이다.
이것은 성경의 가르침일 뿐 아니라 우리가 경험적으로 배운 것들이기도 하다. 우리들 가운데 교회와 믿음의 사람들을 만나고 들음이 없이 예수님을 알고 배우고 믿은 사람이 있는가? 우리들 가운데 교회가 세례를 통하여 받아주지 않았는데 세상의 다른 어떤 다른 단체나 사람들을 통하여 그리스도인 된 사람이 있는가? 우리들 가운데 교회와 믿음의 사람들의 양육과 가르침과 훈련과 격려와 기도와 지탱이 없이 신앙에 성장하신 분들이 있는가? 우리들 가운데 교회가 베푸는 성례전에 참여하지 않고 믿음의 깊이에 들어가신 분들이 있는가? 우리가 드리는 기도들, 우리가 깨달은 진리들, 우리가 힘쓰는 헌신의 삶들, 우리가 전도하는 전도의 증거들, 우리의 신앙의 삶들 모두는 어디서 배우고 어디서 동기를 부여받고 어디에서 계속하여 활력을 공급 받아 왔는가?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 그리스도의 지체인 믿음의 사람들을 거쳐서 온 것이 아닌가?
그러나 이단들은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만남을 주장한다. 이단들은 하나님께 직접 받았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몸을 무시하고 능욕한다. 그들은 교회를 통하여 신비하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찌그러진 물통도 사용하여 물을 길으신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들은 완벽한 물통만이 물을 길을 수 있다는 환상을 가진 자들이다. 우리가 보는 교회와 믿음의 사람들이 인격과 신앙에서 찌그러진 물통과 같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런 물통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생수를 공급하실 수 있음을 알지 못한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교회를 버리고 자기들과 같은 완벽한 믿음의 사람들을 통하여 말씀하시고 구원하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살아계신 성령님의 전이요, 하나님은 이 교회를 통하여 말씀하시고 구원과 사랑의 계획을 이루어 가신다.
분명한 성경적인 교회론이 정립되어 있는 곳에 이단은 발을 붙일 수 없을 것이다.
3) 성경은 초월하신 하나님의 이야기이다.
성경은 처음부터 우리의 합리적인 이성의 생각을 뛰어넘는 이야기로 시작되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1:1). 이 말씀은 합리적인 이성이 이해할 수 있을까? 이 말씀을 과학적으로 분석할 수 있을까? 이것은 합리 이전의 이야기요, 이것은 과학 이전의 실제이다. 이것은 합리적인 이성의 탐구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으로 받아들여야할 하나님의 이야기이다. 성경은 세상을 창조하신 그 하나님의 이야기이다. 성경은 하늘의 하나님의 독생자가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사셨다는 이야기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재판을 받고 죽임을 당했다는 이야기이다. 어떻게 사람들이 하나님을 재판하고 사형집행을 할 수 있는가? 이것은 이미 합리적인 인간의 이성의 한계를 뛰어 넘는 이야기들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영이 인간들에게 임하였다고 가르친다. 이것을 우리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
독일의 신학자 불트만은 ‘오늘과 같이 전기불을 이용하는 과학시대에 귀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을 것인지 선택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성경의 이야기들 가운데 합리적인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은 신화적인 것으로 치부하고 버려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는 비신화화를 통하여 성경을 진정한 성경이 되게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주장은 성경을 성경이 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수 많은 성경의 이야기들을 비신화화시켜야할 대상으로 생각하고 그것들을 합리적으로 설명하려 하고 과학적으로 설명이 되지 않는 것은 버려야할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러한 신학적인 주장들은 오늘 한국교회에 엄청난 영향으로 나타나고 있다. 성경을 읽으면서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고 합리적인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성경적인 권위를 상실하게 만들고 있다. 그것은 우리의 세계관과 인생관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쳐서 하나님의 초월적인 개입을 부인하거나 의심하게 만들고,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고 설명할 수 있는 것들을 인간의 의지의 결단으로 실천하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래서 설교, 교육, 목회, 성도의 삶등 거의 모든 영역에서 인간의 결단과 인간의 노력과 인간의 헌신과 인간의 성취등을 조장하고 강조하고 있다. 즉 그리스도인의 삶 가운데서 초월하신 하나님의 임재와 역사는 추방을 당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을 읽으면서 끊임없이 하나님의 초월적인 임재와 역사를 만나고 있다. 그런데 교회의 목회와 가르침에서는 과학적이요, 합리적이요, 인간 중심의 깨달음과 결단과 실천만을 만나고 있다. 성도들은 성경에서 가르치는 것이 옳은 것인지 아니면 한국교회가 가르치는 것이 옳은 것인지 혼란에 빠져있다. 그런데 이단들은 이런 틈새를 비집고 들어와서 초월적인 존재의 직접 개입과 역사를 강조하고 자기들은 살아계신 초월자 하나님을 만나고 있다고 주장을 한다. 그래도 한국교회가 그런 이단들에 그렇게 많이 빠지지 않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라고 생각한다.
한국교회는 성경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고 ‘성경은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 이라는 우리의 신앙고백을 그대로 믿고 가르쳐야한다. 하나님은 초월하여 계신 분이시다. 그분은 과학적인 검증과 합리적인 이성의 이해를 뛰어넘으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이 동일하신 하나님이시다. 그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시요, 지금도 우리들 가운데 초월적으로 임재하여 하늘의 신비와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시다. 누구든지 영의 눈을 열고 보면 초월하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그 하나님은 오늘도 자기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임하여 신비한 하늘의 선물을 주시는 분이시다. 한국교회가 지금 우리들 가운데 임하셔서 역사하시는 초월하신 하나님, 은혜와 신비의 하나님을 증거하고, 그분을 만나고 그분의 구원을 끊임없이 받는다면 이단은 발을 붙일 곳을 찾을 수 없게 될 것이다.
2. 균형있는 영성목회를 실천하라.
영성은 사람들 가운데 그리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들 가운데 임재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께 초점을 맞춘다. 영성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위하여 무엇을 하셨으며, 지금 우리들 가운데서 무엇을 행하시고 있으며, 앞으로 우리들을 위해서 무엇을 하실 것인가를 묻는다. 영성은 오늘 우리 가운데서 우리들을 만나시고 말씀하시며, 하늘의 신비를 베푸시고 우리들의 필요를 채우시며, 우리들을 하나님의 사람들로 바꾸어 가시는 하나님의 사역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므로 영성의 사람은 우리들 가운데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보며, 그분을 만나며, 그분의 은혜를 받으며, 그분으로 말미암아 신령한 사람으로 만들어져 가고 있음을 경험한다.
이러한 영성은 역사적인 차원과 영적인 차원을 가지고 있다. 역사적인 차원은 성경에서 가르치는 대로 그리고 교회의 역사 가운데서 경험한 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어떤 사랑의 계획을 가지고 계시며, 그 사랑의 계획을 이루기 위하여 무엇을 행하셨으며, 우리들에게 어떤 은혜를 베풀고자 하시는가를 배우고 익히는 것이다. 이것은 영성의 수평적 차원이다. 영성의 영적인 차원은 지금 우리들 가운데 오셔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성령님의 역사이다. 하나님은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들 가운데 오시며 우리들 가운데서 역사하신다. 하나님은 성경과 기독교회의 역사 속에서만 역사하신 분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오시는 분이시다. 이것은 배우는 것이 아니라 경험하는 것이다. 이것은 영성의 수직적인 차원이다. 기독교 영성은 역사적인 차원과 영적인 차원의 만남이다. 그러나 그 핵심은 우리들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초월하신 하나님이시다.
영성은 인간의 가능성이나 능력이나 노력이나 헌신을 묻기전에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무엇을 하고 계신가를 묻는다. 영성은 언제나 하나님의 임재와 역사에 초점을 모은다. 그러므로 영성이 깊이가 더할수록 우리는 하나님을 더 갈망하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가고 하나님의 은혜와 신비를 더 많이 경험한다. 영성의 사람은 바울과 같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주님의 신비를 체험하며 그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여 하늘의 신비를 이 땅위에 이루어 가시는 것을 경험한다. 영성의 사람은 내가 무엇을 하드라도 그것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요 우리 안에 오신 주님의 역사임을 고백한다.
한국교회는 사람이 무엇을 행하는 인본주의적인 신앙에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행하시는 하나님 중심의 신앙으로 바꾸어져야 한다. 모든 성도들의 입에서 “하나님께서 ----하셨다”는 고백이 나와야 한다. 모든 교회에서는 하나님이 그 교회에 살아서 역사하고 있다는 소문이 나야한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인간이 무엇을 하는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임재하여 무엇을 행하는 하나님의 교회로 변해야 한다.
이것은 단순히 성경에서 약속하시는 하나님의 언약을 굳게 믿고 그대로 증거하고 기도하고 실천하는 데서부터 시작될 것이다. 이것은 성경을 성경되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은 하나님되게 하는 것이다. 이단을 물리칠 수 있는 한국교회의 영성은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고 성경을 성경되게 하는 영성이어야 한다. 그러면 이단들은 발 붙일 곳을 찾을 수 없게 될 것이다.
3. 전인목회를 실천하라.
하나님은 인간의 영혼에만 관심을 가지신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몸을 사랑하신다. 하나님은 인간의 몸을 건강하고 아름답게 지키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시는 증거로 수많은 병자들을 고치시고 장애인들을 온전케 하셨다. 하나님은 인간의 육체를 정신을 가두는 감옥으로 고행하여야할 대상으로 보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자기의 아들을 성육신하여 세상에 보내신 분이시요, 그 몸으로 사람들을 사랑하는 법을 보이셨으며, 그 몸을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다. 하나님은 몸을 사용하여 인간을 구원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령님은 우리의 몸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신다.
하나님은 사람의 몸에만 관심을 가지신 분이 아니다. 우리의 정신과 정서, 그리고 우리의 인간과계, 가정, 직업, 더 나아가서는 자연세계에까지 관심을 가지고 구원하려고 하신다. 하나님은 사람을 전인으로 사랑하신다. 하나님은 사람의 영혼만을 관심 가지시고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예수님을 보내시고 성령님을 보내신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의 모든 차원을 창조하시고 지탱하시고 구원하시는 분이시다.
그런데 오늘 한국교회는 하나님께서 관심을 가지신 인간 전인에 관심을 가지시기 보다는 교회를 성장시키는 데에 관심을 집중시키고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고 있는가에 너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불신자에게 전도하여 신자로 만드는 일에만 관심을 가지신 분인 것처럼 오해하게 만들고 있다. 이것은 마치 사람을 낳는 것에만 관심을 가지고 그 애기들이 양육과 성장에는 아무런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는 어리석은 엄마에 비유할 수 있다. 하나님은 불신자에게 전도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의 계획에 들어오게 하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사람들의 몸과 정신,정서와 인간관계와 가정과 직업과 그들이 속한 사회구조와 자연환경에까지 꼭 같은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 하나님은 지금 성도들을 전인적으로 돌보기를 원하신다. 교회는 전인목회를 위임받은 공동체이다. 목회자는 교회로부터 이런 전인 목회를 위임 받은 자이다.
한국교회는 사람들의 전인에 관심을 기울여 목회하여야 한다. 한국교회가 교회성장이라는 관심 때문에 사람들의 전인에 관심을 기울이지 못할 때에 이단들은 그 틈새를 비집고 들어 와 사람들의 전인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그래서 많은 성도들이 이단에 빠졌다. 한국교회가 다시 한 번 하나님이 계획하시는 전인목회에 힘을 기울이고 헌신한다면 이단들은 설곳을 잃어버리고 이 땅에서 사라지고 말 것이다.
나가는 말
한국교회는 성경적인 교회상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이단의 침입을 받고 있다. 한국교회는 초월하신 하나님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이단들에게 성도들을 빼앗기고 있다. 한국교회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잃어리고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하게 했기 때문에 성도들은 예수님의 이야기를 찾아 이단에게 가고 있다. 한국교회는 공동체적인 신앙을 가르치지 못했기 때문에 성도들은 교회를 외면하고 하나님께 직통계시를 받고자 애쓰고 있다. 한국교회는 하나님 중심의 영성을 상실하고 인본주의 영성을 가르치기 때문에 성도들은 하나님을 찾아서 이단들에 빠지고 있다. 한국교회는 인간 전인에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고 영혼구원, 교회성장이라는 부분적인 목회에 힘을 쓰기 때문에 갈급한 사람들은 이단을 찾아 거기에서 안위을 얻으려고 하고 있다.
그러므로 한국교회가 이단을 물리치고 이단의 유혹에서 성도들을 지키는 길은 성경을 성경 되게하고,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며, 목회를 목회되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단들은 설곳을 잃고 이 땅에서 사라지게 될 것이다. 성경에 분명한 기초를 세우고, 초월하신 하나님의 임재와 역사를 경험하며, 예수님의 사랑의 이야기와 구원의 이야기가 끊임없이 들려오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람들을 사랑하여 인격적인 존중과 전인적인 돌봄의 목회를 하고 있는 교회에 어떻게 사탄이 틈을 타고 들어 올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