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미국의 부흥사 찰스 피니는 성서는 결코 인간을 노예로 만드는 것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에 진정한 기독교인은 노예를 소유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였다. 피니의 이런 가르침은 그가 재임했던 오벌린 대학을 중심으로 구체화되었다.
오벌린 대학은 남부의 노예들이 북쪽으로 탈출하는 길목에 자리잡고 있었다. 이곳에는 수많은 노예들이 도망쳐 나왔다. 오벌린대학은 도망친 이들을 위하여 몸값을 치러주고 노예들이 죽으면 공동묘지에 묻어주었다. 종종 오벌린 대학 교수들의 집은 도망친 노예들의 은둔처가 되었다. 이런 오벌린 공동체의 행동은 실정법과 정면으로 배치되었다. 미국의 연방법은 도망친 노예는 반드시 송환되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었다. 피니는 이런 잘못된 법은 더 높은 하나님의 법에 어긋나기 때문에 법률로서 효력을 가질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유명한 오벌린의 시민불복종운동이다.
이런 확신에 근거해서 오벌린 공동체는 실정법을 어기고 탈출한 노예를 돕는 일에 앞장섰다. 이런 불복종운동의 절정은 1858년에 일어난 ‘오벌린-웰링턴 구조 케이스’이다. 남부에서 도망쳐 나온 존 프라이스라는 한 노예가 오벌린에 숨어 있었는데 남부의 무장 체포대가 이 노예를 오벌린 밖으로 유인하여 웰링턴이라는 동네에서 체포하여 남부로 압송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다행히 이 일이 오벌린 사람들에게 발견되었다. 오벌린 사람들은 교회의 종을 울리고 노예가 체포되었다는 것을 알렸다. 수백명의 사람들이 웰링턴으로 가서 기차를 기다리고 있던 체포대의 손에서 노예를 다시금 되찾았다. 오벌린 사람들은 이 노예를 페어차일드 교수 집에 잠시 숨겼다가 캐나다로 도망가게 해주었다.
이것은 오벌린 공동체가 실정법을 정면으로 어긴 것이었다. 결국 당국은 오벌린 주민 21명을 고발했고 여기에는 저명한 교수들도 포함되었다. 결국 이들은 유죄판결을 받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이 사건은 많은 사람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전국적으로 이들을 돕기 위한 성금이 모아졌으며 부당한 법을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많은 집회가 열렸다. 역사가들은 이 사건을 미국 노예해방에 중요한 계기가 됐다고 평가한다. |
|